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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검 작가 Oct 07. 2020

촉촉한 초코칩이 아닌 촉촉이 모래놀이 장난감 판매

<3> 산뜻한 3월, 아이들을 위한 모래놀이 장난감을 팔다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만'을 위한 과자를 팔았으면 나는 잘 팔 수 있었을까. 또는 과자를 먹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어리광에 부모님께서 못 이기는 척 넘어가며 하나쯤 사주셨을까. 아니면 과자에 비해서는 가격이 다소 높더라도 장난감 하나 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슬슬 추위가 떠나갈 준비를 하는 계절, 봄. 그리고 3월. 2016년 3월이면 나도 아직 대학생(3학년) 때라 이제 막 개강을 하고 학교를 오가던 시절이었다. 학과 특성상 조별 과제가 많아서 1학년 때부터 바쁜 학교 생활을 해왔지만, 특히 2학년 때부터는 복수전공까지 하면서부터 더욱 바쁘게 학교 생활에 매진하고 있던 차였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 중 하나인 '촉촉한 초코칩'이 아닌, '촉촉이 모래놀이'라는 이름으로 된 모래놀이 장난감 판매를 의도치 않게 하게 됐다. 이 또한 마트에서 진행했던 행사 중 하나였는데, 앞서 양말세트를 판매할 때나 혹은 신학기 가방 판매했을 때처럼 며칠간 연이어 일을 해야 했다면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단기로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촉촉이 모래놀이' 장난감 판매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는 '단기 알바'라고 말을 꺼내기에도 머쓱할 정도로 단 이틀 동안만 일을 하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신학기 가방을 판매하는 일을 그만둔 후 촉촉이 모래놀이 장난감을 판매하기 전까지의 공백기도 짧은 편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렇다. 바로 앞에 짧게나마 근무했던 사람이 나뿐이었기에 차라리 이틀만 하면 되는 판매 일을 내게 부탁하듯 넘겨주신 것이다.


이틀. 토요일, 일요일 단 2일 동안만 근무하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기간이 주말이고 이틀이었다. 그럼 내게는 딱 일주일 중 한 주의 주말만 없어지는 거다. 학교 다닐 때는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주말뿐이었는데, 한 주의 주말은 일에 반납해야 된다. 개강하기가 무섭게 쏟아졌던 '과제'라는 이름을 가진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의 그때의 나는, 어쩌면 지금으로서는 참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싶을 정도의, 나름대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뭐가 그리 생각이 많은지. 어차피 할 거면서. 이틀 제대로 잠 못 자고 바로 월요일부터 다시 등교한다고 해서 못 살아남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아등바등, 어떻게든 해결해나갈 거면서 그 날의 나는 이를 두고 자로 재듯 그렇게 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와중에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할까, 어떻게 하면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결국 하겠다고 해서 하게 된 모래놀이 판매직. 신학기 가방 판매할 때보다도 더 어린, 그야말로 완전히 어린, 꼬꼬마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다들 어렸을 때는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친구들과 모래성을 쌓거나 다른 모형을 만들어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모래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물론 내가 판매했던 모래는 그 모래가 아니긴 했다. 음, 부드러운 찰흙을 연상하면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촉촉이' 모래놀이이기 때문에, 손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정말 부드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음식을 판매하는 하는 직원분들이 시식을 권유하는 것처럼, 내가 '촉촉이 모래놀이' 장난감을 판매할 때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작은 환경이 주어져 있었는데,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내 손에서 먼저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었다. 원래 손에 무언가가 묻어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때만큼은 어차피 손을 대야 하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촉감이 좋아서, 또 혼자 계속 한 자리에 서있는 게 심심하기도 하고 해서 부드러운 모래를 조물조물거리며 부족한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혼자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 것일까. 아니면 '모래놀이'라는 그 물건에 관심을 가진 것일까. 조금씩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이들끼리만 오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은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정도 쇼핑을 마친 부모님께서 아이들에게 이제 집에 가자며 데리고 가시곤 하셨지만, 문제는 아이들만 마트에 온 경우였다. 그때부터는 아이들과의 실랑이가 끊이질 않았다.


"누나(언니), 이거 가져가면 안 돼요?"

"안 돼요~"

"누나(언니), 그럼 조금만 가져가면 안 돼요?"

"안 돼요~"

"누나(언니), 아주 조금만 가져가는 것도 안 돼요?"

"이게 누나(언니) 물건이 아니라서 줄 수가 없단다."


여기까지면 그래도 괜찮다.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모래뿐만 아니라 모래와 함께 있던 장난감까지도 아이들이 탐할 때였다.


"누나(언니) 그럼 이 장난감은 가져가도 돼요?"

"미안하지만 아가야, 장난감도 줄 수 없어요."

"그럼 이거 하나만 가져가면 안 돼요?"


아가야, 제발. 나 좀 살려다오. 


내가 촉촉이 모래놀이 장난감을 판매하기 전에 간단하게 교육을 받았었는데, 그때 방침 중에서 아이들이 달라고 해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한 번 주다 보면 두 번, 세 번 주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게 정말 방침이기도 했고 나 또한 이 방침에 동의했고 공감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조금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이를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흠,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딱 그뿐인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일에는 서툴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이라는 존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쁘고 귀엽다. 그래서 때때로, 나 또한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무의식적으로 "귀엽다"는 말을 자주 했고 종종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다만, 내가 일하면서 겪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떼를 쓰고 그럴 때면 퍽 난감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떼쓰는 아이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줘야 현명한 대답을 해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며 늘 고민을 거듭해보지만, 항상 마땅한 해답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매번 난처했고,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모두에게 원하는 답을 내려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힘들었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떠한 부모님이든 아이들이 떼쓰며 고집할 때마다 내리는 판단이 그 무엇이 됐든,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으로 보였다.

    

기를 쓰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어떤 부모님은 못 이기는 척 장난감을 사주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부모님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며 끝내 장난감을 사주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셨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내리사랑에서만큼은 정해진 정답이 없다. 그저, 한없이 사랑을 베풀 뿐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시든 사주지 않으시든, 여기서 어떠한 선택을 하시든, 한 가지 선택에 대해서만 현명한 판단을 하셨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 장난감을 사주시는 부모님을 통해서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을 테고, 장난감을 사주지 않으시는 부모님을 통해서는 세상에 꼭 필요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단호함'에 대해서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는 그 모든 것들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고 아이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자 덕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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