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생활 6년 차
5월 23일 월요일 오후 12시 42분,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오늘은 빅토리아 데이. 5월의 하나뿐인 출근을 하지 않는 휴일이다. 오랜만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잠이 들기 전까지 보던 넷플릭스 쇼를 옆에 켜놓고 써보려 했더니 역시 집중이 안된다. 나는 무엇을 보면서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밥을 먹을 때도 무언가를 보는 사람들이 제일 신기하다. 영상을 틀어 놓으면 밥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놓친 장면을 다시 돌려서 보느라 보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밥을 쳐다보지 않고 먹으면 체한 느낌이 든다. 멀티태스킹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30살이 넘어서야 인정하게 됐다.
며칠 전에는 우울함이 크게 찾아왔다. 직장에 대한 회의감, 더 나은 직장을 가질 능력이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콤보가 하루종일 기분을 다운시켰다. 평소에는 잘 감춰져 있던 생각이 그날따라 턱밑까지 차오른 이유는 PMS 때문이다. 나는 생리 중에는 신체에 커다란 변화가 없지만, 생리 3일 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온다. 작은 것들에도 마음이 상하고, 큰 문제없는 애인과의 관계도 갑자기 끝내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우울감이지만 그 순간에는 주체가 잘 되지 않는다. 사실 PMS보다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먹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나도 한때는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고, 먹는 게 인생의 낙인 사람이었다. 처음 캐나다에 와서 2년 정도는 음식 스케줄표를 썼었다. 매끼가 너무 소중해서 무엇에 먹을지, 어떤 식당을 갈지 미리 정하고 기록해서 기억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끼니때마다 배가 고파오는 게 너무 성가셔졌다. 딱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어떤 음식을 봐도 진심으로 흥분되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장보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는 모든 행위에 지친 게 아닌가 싶다. 이 음식이 건강에 좋은지 고민하는 일도 하지 않고 입도 짧아졌다.
술도 마찬가지다. 내가 술을 정말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약속도 데이트도 모두 술로 시작하던 20대 중반, 좋은 술집을 발견하면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Bar 창업을 꿈꾸며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방에 개인 와인 냉장고를 두고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와인을 한 병씩 샀다. 이제는 좋은 와인을 마셔도 온몸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맛있는 안주와 좋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채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던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더 이상 사람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게 되서일까 아니면 야근을 일삼는 직장 생활을 하지 않게 되서일까. 어떤 계기가 변화를 만든 건지 궁금하다. 술을 즐기지 않게 된 건 건강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만 삶의 즐거움 측면에서는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줘야 한다는 게 내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교훈이다. 지금도 나의 가치관인 이 말은 이따금씩 나를 돌아보는 잣대가 되곤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잃었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국어 능력. 일터에서 한국어를 쓰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공적인 자리에서 쓰는 어려운 말들을 잊어버린다. 표현력이나 언어 전달력도 점점 사라진다. 룸메이트와 환승연애를 같이 보다가 우리는 절대 저기에 나가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X와 관련된 이유가 아니라, 개인 인터뷰 때 저런 한국말을 할 수 없어서. 요새 글을 잘 올리지 않는 이유도 필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브런치 초반에 올렸던 감성글을 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생각한다. 갖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슬프지만 그래도 아예 없어지게 두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럼 무엇을 얻었을까. 첫째는 물건을 아끼는 마음. 정신없이 살면서 물건들을 잃어버리고, 다시 사는 일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가치를 다할 때까지 소중하게 쓰고, 우산 하나조차 어디 놓고 오지 않는다. 잃어버리면 정말 곤란한 집 열쇠-캐나다는 아직 열쇠로 현관문을 딴다-는 5년 동안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나중에 쓰려고 한꺼번에 여러 개를 산 물건은 보관함에 잘 두었다가 필요할 때 찾아서 쓴다. 버리는 돈이 훨씬 줄고 환경에 대한 마음도 덜 무거워졌다. 나는 항상 칠칠치 못하게 이것저것 잘 흘리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음가짐을 조금만 바꾸니 일상생활에서도 꼼꼼한 사람이 되었다. 아무래도 타지에 혼자 있다 보니 나를 지키기 위해 생긴 습관이겠지.
요새는 아이패드로 전자책을 많이 읽는다. 코로나가 터지고 한국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한국 책과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고 살았다. 보면 한국이 그리워질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거기 살지 않는데 거기 문화를 소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그 시간에 영어 컨텐츠를 봐서 영어 실력을 늘려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었다. 영어 책을 읽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함을 다시 느끼고 나니 놓치고 있던 책에 대한 갈망이 물밀듯이 찾아왔다. 일반 소설, 에세이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추리 소설, 판타지 소설에도 다시 관심이 간다. 모두 친구가 알려준 Yes24 전자 도서관 덕분이다. 마치 동네 도서관에 다니는 것처럼 신간을 확인하고, 대여를 예약하고, 기간 내에 책을 읽어 반납도 한다. 초반 몇 장 미리 보기만 보고 eBook을 결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무료로 읽을 수 있으니 외국 생활도 살만하다.
작년 5월에 써놓은 글을 올해 1월에 마무리합니다. 봄 사진으로 시작해 겨울 사진으로 끝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