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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Apr 18. 2021

세상이라는 딜레마.
<케빈에 대하여>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발생되는 일이 있을까?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수치화 해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그 행동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니체의 말처럼 세상은 '사실이란 것은 없고, 해석만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상황만 주어질 뿐,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석을 해야 할까? 


출처 : 영화 <케빈에 대하여>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지른 16살 케빈. 그는 자신의 학교 체육관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을 향해 여러 발의 화살을 쐈다. 그가 활을 사용한 이유는 그의 엄마인 이바의 영향이다. 둘째 셀리아가 태어난 후, 홀대 받기 시작한 것이 못마땅한 어린 케빈은 아픈 척을 해서 이바의 관심을 끌었다. (정말 아팠던 것일 수도 있다.) 이바는 아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로빈 후드를 읽어주었고 그 이후, 케빈은 로빈 후드를 동경하며 양궁 연습을 계속 하게 된다. 이바가 앉아 있는 쪽 유리창에 보란듯이 장난감 활을 쏘며 솜씨를 자랑한다. 이바는 원치 않게 케빈을 갖게 됐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투어 가이드였기 때문에 정착된 삶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프랭클린과의 관계에서 우연히 아이가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케빈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이바는 그에게 보편적인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하지만 온 마음을 다하지는 못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케빈이 경찰에 붙잡혀가는 것을 목격한 후 집에 돌아온 이바가 보게 된 것은 활에 맞아 죽은 프랭클린과 셀리아였다. 케빈은 감옥에 가게 되고, 이바는 감옥 같은 현실에 살게 된다. 이 모든 행동이 케빈이 이바의 관심을 원해서 한 행동이었을까? 정말로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그의 어린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사이코패스였기 때문일까? 영화는 계속해서 빨간색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이는 케빈이 저지르게 될 일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바가 얼마나 그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바는 혼자 살게 된 집에 누군가가 뿌리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빨간 페인트를 영화 내내 지우게 된다. 그러면서 계속 사건의 파편들을 회상한다. 마치 그녀가 그의 아들이 저지른 일의 흔적을 없애려 애쓰면서 동시에 그 사건의 원인을 생각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끝내 명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영화 초반에 나오는 토마토 축제에서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비명과 야유처럼 들리고, 케빈이 사건을 저지른 후 체육관에서 나올 때 사람들의 비명과 야유는 환호성처럼 들린다. 즉, 이것은 해석의 문제라는 것이다. 토마토 축제는 케빈이 저지른 일로 인해 죄인, 살인마라고 불리며 평생 손가락질 받게 된 이바의 꿈 속의 일이었다. (그래서 빨간 이미지가 형형하게 드러나고, 심지어 중간에 그녀를 향한 욕설까지 들린다.) 세상의 모든 비난을 떠안고 감옥 같은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이 모두 비난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케빈은 자신이 엄마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 소리가 함성처럼 들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그 모든 것은 그 상황만 주어질 뿐,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야유로 판단할지, 환호성으로 판단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소리를 듣고 해석하는 인간의 몫이다.


출처 : 영화 <케빈에 대하여>


 케빈은 18살이 되어 성인 교도소로 가게 되었고 소년원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게 된 이바는 케빈이 어떤 짓을 해도 왜 그랬는지 묻지 않다가, 처음으로 케빈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물어보게 된다. 케빈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답한다. (케빈은 그 전에 엄마의 컴퓨터를 망가지게 해놓고 '이유는 없어. 그게 이유야.' 라고 말한 적도 있다.)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에서 케빈을 안아줄 때, 케빈은 마치 그리웠던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엄마 품에 얼굴을 파묻는다. 영화는 프랭클린과 셀리아가 죽은 것을 발견하기 전에 흰 커튼 앞에 서 있던 이바의 시점쇼트에서 시작해서, 성인 교도소로 가게 된 케빈과 인사를 한 후에 환한 밖으로 나가는 시점쇼트로 끝난다. 결국 이 영화는 이 사건의 중심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관객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게 된다. 과연 누구 잘못일까? 이바에게 안기며 울먹이는 케빈이 정말 잘못한 것일까? 세상은 이바가 케빈을 악마로 키웠다고 판단하고 그녀를 살인자, 악마 같은 여자라고 '해석'한다. 세상이 엄마라는 이름을 해석해서 만든 규칙들을 따르지 못했던 이바는 계속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정말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도 낙태하지 않고 케빈을 낳아서 모든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가 정말 잘못한 것일까?


 영화는 그 수많은 질문들 사이로 엄마라는 이름에 세상이 너무나 큰 책임감을 가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미국을 종종 뒤집어 놓는 집단 살인 사건을 차갑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를 엄마와 자식이라는 둘레 안으로 가두며 나오게 되는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 관계가 뚜렷하지 않고 명백한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계속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진다. 결국은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기어코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딜레마 그 자체일 것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원제: We need to talk about Kevin) 그러나 관객은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끝이 나지 않는 대화를 통해 한없이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그 어떤 것에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오로지 자신 또는 타인의 해석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내 어떤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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