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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의 어머니, 권기옥을 아시나요?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한 우리나라 최초 여성비행사

by 말그미

106주년 삼일절을 맞아,

공군 입대한 아들과 통화하다 문득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한 권기옥 여사가 생각났다.

권기옥 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다.


권기옥 여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년 책 <우리나라 최초 여성 파일럿 권기옥>(임복남 글, 작은씨앗) 덕분이었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의 비행사 하면 <만년샤쓰>(방정환)에도 나온 안창남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공군의 어머니라 불리운 이 멋진 여성을 보기 위해 뒤늦게 청주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찾아가 박물관에 있는 그녀의 유품과 기록을 찾아보기도 했다.(현재 공사 박물관은 방문이 좀 어렵지만 사천 항공우주박물관과 김포공항 국힙항공박물관은 방문하기 좋다고 함)


그리고 독립만세운동 106주년인 삼일절에 <우리나라 제 1호 여성비행사 권기옥>(강정연 글, 비룡소)이란 책을 읽고 권기옥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에서 권돈각과 장문명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나 또 딸이냐며 이름도 지어줄 필요 없이 얼른 가버리라고 갈네(갈례)란 이름으로 불리는 수난을 겪었던 권기옥은 남자보다 당차게 자기몫을 하는 소녀로 자라났다.


집안이 어려워 열두 살이 되어서야 숭현소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나, 17세에 처음 평양 하늘에 뜬 비행기를 보면서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18세에 숭의여학교에 들어가 '송죽회'라는 여성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 1919년 3월 1일 전국 만세운동을 준비해 참여한다. 이 날을 위해 2월부터 200장이나 되는 태극기를 만들고, 3월 1일엔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맨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


그러나 일본군의 총칼앞에 맥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는 잔인한 일본에 맞서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 일로 일본군에 붙잡혀 모진 가문을 당하고 감옥살이하면서 전염병까지 걸렸다가 여섯 달 반만에 감옥에서 겨우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기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전국의 교회를 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남성 전도대 브라스밴드에서 영감을 얻어 여자 전도대를 만들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을 전하는 비밀연락수단이 되었다.


그러다 1920년 평남도청을 폭파하는 일에 가담하면서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중국으로 가는 멸치잡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밀항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공부를 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홍따오 여학교에 입학해 공부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이때 "항공력이 강한 나라는 절대 나라를 뺏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미국에 비행학교를 세운 노백린 선생에게 듣고 자신의 어릴 적 꿈이었던 비행사가 반드시 되어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여학교 졸업 후 중국에서 문을 두드려 볼 수 있는 항공학교는 모두 세 군데였는데 아무리 꼼꼼하게 입학서류를 준비해서 내도 "우리 학교에는 여학생이 없어서 권기옥 학생을 입학시키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두 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마지막 하나 남은 윈난 항공학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서까지 챙겨서 윈난성에 직접 찾아가 원서를 내면서 결국 입학하게 된다.



권기옥은 여자라서 못한다는 소리를 절대 듣고 싶지 않아 비행기를 정비하는 힘든 훈련도 끝까지 잘 받고 비행훈련도 잘 받아, 1925년 2월 28일(그러보 보니 딱 100년 전이었네요) 윈난 항공학교를 졸업하며 비행사 자격증을 받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행사가 되어 일본황궁에 폭탄을 쏟아붓겠다는 일념으로 그 모든 과정을 남자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이겨내고 비행사가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세든 건물의 임대료도 내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그래서 당시 일본과 적대적이었던 중국 공군에 합류해 독립군을 돕는 일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 만난 9살 연상의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1926년 10월 내몽고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유동렬 장군의 주례와 결혼증서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권기옥은 1932년 1월에 발생한 상하이사변에 중국군 정찰대로 근무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중국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당시 권기옥은 그 넓은 중국에서도 단 한 명뿐인 여성전투기 조종사였다. 하지만 권기옥은 언젠가는 기필코 내 조국에 공군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더욱 단단히 하게 된다.



1945년 3월 드디어 한국광복군에 비행대가 만들어지고 기옥도 광복군 비행대가 되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되어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꿈이 현실이 되기 직전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의 항복 선언으로 해방을 맞이한다. 광복은 기뻤으나 우리의 손으로 일본을 박살내고 해방을 이끌어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광복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중국인들에게 약탈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애쓰다, 남편 이상정이 모친의 사망소식을 듣고 먼저 고국으로 떠나고 기옥은 남아서 상하이의 일을 정리한 뒤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상정은 귀국한 지 한 달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하고 만다.



게다가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남편의 사망소식과 함께 남편에게 처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상정은 고국을 떠나기 전 당시이 관례대로 소년 시절에 집에서 맺어준 소녀와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는데, 오랫동안 함께 독립운동을 해온 동지들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안 권기옥은 강한 배신감이 들기도 했으나, 남편과 자신은 남녀 사이보다는 강한 동지애에 더 가까웠으며, 긴 세월 남편을 기다리며 살았을 본처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1948년 8월 권기옥은 고국을 떠난 지 28년만에 귀국해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 위원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에 공군이 만들어지도록 힘을 보태면서, "공군의 어머니"란 별명을 얻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역사가 살아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1957년부터 1972년까지 16년 동안 <한국연감> 발간 사업도 계속했다. 이 일로 권기옥은 196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출판인으로 신문에 소개되는 한편,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일흔이 넘어서는 그동안 모은 재산을 젊은이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1985년부터는 남은 삶을 보훈병원에서 보내다 1988년 4월 19일 8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가끔 그녀를 찾아오는 기자들과 젊은이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꿈을 가지라우! 꿈이 없으면 송장이나 다를게 없디 않가서! 특히 젊은이들은 꿈이 있어야 돼. 내 지금 열댓 살이라먼 말이야, 우주비행사를 꿈꾸갔어. 미국 아해들이 달에 갔다 왔다는데 우리라고 와 못 가갔어. 갸들은 밥을 다섯 끼를 먹니 열 끼를 먹니. 다를 거 없어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우. 못할 게 뭐가 있어, 저지르고 보는 기야. 댐벼들고 보는 기야. 아이 되면 별 수 없디 어카갔어. 길키만 말이다, 해보지도 않고 아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이야. 어느 나라든 젊은이들이 꿈이 있고 패기가 있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어."


이 말이 참 좋다. 꿈과 패기가 있다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는 말이. 106주년 삼일절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 여성비행사이자, 공군 창설의 어머니인 권기옥 여사의 이 말을 꼭 기억하고 싶다.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 여사를 주인공으로 한 책은 많이 나왔으나, 영화는 가제로 <강철날개>라는 이름과 김한민 감독까지 정해졌으나 결국 완성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여성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청연>은 2007년 장진영, 김주혁 주연으로 만들어져 개봉해 49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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