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는 볶아야 맛이지
시어머님과 한지붕 아래 산 지 20년,
시어머니 앞에서 어려워하던 시간을 지나
지금은 더우면 숭덩숭덩 겉옷도 벗어제끼고
시어머니 옆에서 방구도 뿡뿡 끼는 세상 편한 며느리가 됐다.
그런 우리 집에서 요리할 때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깨를 매번 볶아주는 이는 어머님이시다.
친정 엄마가 직접 농사 지으신 깨를 매년 가을이면 한 봉다리씩 주시는데, 이 깨로 말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는 먹지 못한다.
잘 씻어서 물기를 쪽 뺀 다음에 뜨겁게 달군 후라이팬에 넣고 달달 볶아서 고소하게 볶아져야 요리에 넣어서 먹을 수 있는 상태의 깨가 된다.
이게 글로 써놓으니 세상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깨를 볶으려면 거기에 드는 품과 요구하는 세심함이 꽤나 크다. 그래서 손이 미덥지 못한 며느리를 시키느니, 어머님께서 깨 볶기 담당으로 사신 세월이 19년이다.
"야야, 너는 깨를 톡 털어서 다 먹었으면 볶아놔야지, 그냥 두냐~"
그렇게 타박을 하시면서도 크게 책망하시진 않고 냉동고에 고이 모셔둔 깨봉다리를 꺼내고, 커다란 채반이랑 후라이팬도 꺼내고, 깨 볶은 뒤 열기가 나가게 펼쳐놓을 스테인레스 양푼도 꺼내어 깨 볶을 준비를 하신다.
깨는 물에 담궈서 떠오르는 잡티를 제거하고 잘 씻은 뒤 채반에 건져낸다.
이렇게 채반에 건져 물기를 뺀 다음에 커다란 후라이팬을 가스렌지 위에 올린다. 이 후라이팬은 평소엔 거의 쓸 일이 없고, 오로지 깨 볶는 용도로만 쓰이는 엄청 큰 후라이팬이다. 그래도 한번에 씻은 참깨가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몇 번에 나눠서 볶아야 한다.
후라이팬에 넣고 볶으시다가, 불순물이 보이면 그때그때 바로 집어내신다. 밭에서 참깨대를 베어서 말린 뒤 털어서 담는 과정에 이물질이 개입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깨를 볶는 과정에서 씻을 때 한 번 건져내고, 볶을 때 손으로 일일이 건져내고, 나중에 깨를 다 볶은 다음에 또 건져내야 한다. 깨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볶은 깨를 커다란 스테인레스 양푼에 담는 과정에서도 까불대며 티를 끄집어낸다. 은근 이런 게 많이 나온다.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 아니면 이 과정을 생략하거나 대충 하기 때문에 나중에 반찬 만드느라 깨통에서 깨를 뿌릴 때 이물질이 섞여 나오기도 하니 잘 보고 추려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볶은 깨 완성!
이렇게 볶아진 깨는 보관하기 좋고 꺼내 쓰기 좋은 500ml 페트병에 옮겨담는 편이다. 이렇게 담아 냉장실이나 냉동실에 넣어두면 1년 정도는 거뜬하게 먹는다.
이렇게 통깨로 넣어두기도 하지만, 갈아진 깨가 필요하기도 해서 1/3 정도는 갈아서 따로 병에 담아 보관한다. 반찬용으로는 절구에 넣어 절구공이로 찧어가며 살짝 갈지만, 깨가루를 밥에 넣어 비벼 드시기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믹서기에 넣어 완전 미숫가루처럼 곱게 깨를 갈아서 통에 담으신다.
어쩌다 보니 갈은 깨 사진은 찍어놓은 게 없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한참 먹은 깨통을 꺼내 찍어본다. 어머님이 비빔밥으로 드실 때도 넣으시고, 입맛 없으실 때도 두세 숟가락씩 듬뿍 밥에 넣으신다.
내가 요리할 때 가끔 고운 깻가루가 필요할 때도 쓴다.
후라이팬에 깨 볶으며 나는 소리가 톡톡 튀어 돌아다니고, 고소한 깨향이 코속을 간지럽히는 날은 어머님이 깨 볶으시는 날이다.
작년까지 19년을 그리 해주셨는데, 올해는 볶은 깨가 다 떨어지면 아마도 내가 이제 볶아야 할 것 같다.
올 여름이 덥다보니, 어머님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시는 때가 종종 있으셨는데 오늘 아침에도 그럴 뻔 하셨다.
새벽에 집 근처로 운동삼아 나가신 어머님이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오셔서 전화를 드리니, 갑자기 어지러워서 아파트 헬스장 앞 의자에 누워있다고 하시며 힘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깜짝 놀라서 모시러 가니, 그 사이에 집으로 겨우겨우 올라오시다 1층 벤치에 앉아계셨다. 그런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셔서 머리랑 입고 가신 웃옷이 다 젖은 상태였다. 이대로 여기 계속 있으시면 한기도 드시고, 경험상 쓰러지시기 직전인 상태라, 잠시만 숨을 좀 돌리신 다음에 천천히 집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우신 뒤 물 좀 달라고 하셔서 물 한 컵 드시고는 젖은 옷을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누우셨다. 몸이 차가우셔서 이불 덮어드리고 주물러드리니 차츰 안정을 찾으셨고, 물에 만 밥 한 술만 갖다 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드리니 그거 후루룩 드시고 나니 조금 더 기운이 나시는 듯했다.
한참 뒤엔 복숭아도 한 접시 드시고, 남편이 집으로 점심 먹으러 왔을 때엔 같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실 정도로 기운을 차리셔서 식사 잘 하시고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쉬고 계시는 중이다.
올해 여든이 되시니 하루하루 기력이 달라지시는 느낌이다. 아무렇지 않게 잘 계시다가도 갑자기 이런 일들이 생기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따로 살지 않고 한집에 사니, 이럴 때 바로바로 보살펴 드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한집에 함께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어머님과 이별했을지도 모를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친정엄마도 작년부터 병원에 입원하시는 일이 자꾸 생기시고, 올해도 깨가 익어갈 즈음 병원에 입원하셔서 깨 다 쏟아질까 걱정하시느라 병원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하셨다. 다행히 깨 쏟아지기 전에 퇴원하셔서 깨를 베어 갈무리하시긴 했지만 깨 수확량은 신통치 않다고 하신다.
이제 친정에서 깨 얻어다 먹는 일도... 시어머님이 깨를 고소하게 볶아주시는 날도... 먼 추억으로 남게 될 것만 같아 마음이 애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