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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vin Jul 04. 2016

봄이오기까지

캥거루 속 하마


중국에서의 꽤 다이내믹하였던 시간을 지내고, 돌아온 한국에는 몸을 쥐어짜는 듯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2007 겨울에는 지금 기억에도 참 많은 눈이 내렸고, 경기도 산 밑자락으로 이사한 동네, 청학리는 4월이 되어서야 겨우내 내렸던 눈이 녹기 시작할 정도라, 그 춥다는 캐나다나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 계획이 없이 왔던 터에, 날도 춥고 며칠 집에 있다 보니 3개월이 지나가버렸다.

'아, 나 백수군.' 꽤 시간이 지나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걸로 봐서 나도 참 대책 없는 타입이긴 하다.

  겨울의 무직자는 참 슬프다. 추워서 밖에 나가기도 힘든 그 상황이, 마치 연약하고 사냥 능력마저 상실한 아프리카 하이에나가 구석진 습지대에 찌그러진 모양새랄까. 아니면 이미 다 성장한 하마가 엄한 캥거루 어미의 주머니 속에 숨어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숨은 모습과도 비슷했다.


 이런 생각이 들다 보니, 더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고, 많은 시간을 아무 생각이 없거나, 지난 일을 되돌아 곱씹어 보곤 했었다. 때때로 솟구쳐 오르는 불안한 감정이 내 얼굴 밖으로 새어나와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눌러 담아 막아내기 급급했다.


아침, 눈을 뜨니 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 가족들 모두 어딘가 외출했고, 평일인지 휴일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쥐며느리처럼 방에서 거실로 굴러나와 발가락으로 TV를 켰다.

  SBS동물농장이 방영 중인 걸로 봐서 오늘은 일요일이다.

TV 스크린에서는 전원의 큰 집에 사는 가족이 소개되고 있었고, 그 집의 오리 몇 마리, 토끼들, 하얗고 큰 대형견 한 마리가(견종 이름은 모르겠다.) 아웅다웅 북적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10살쯤 되어 보이는 그 집 딸내미가 그 큰 개가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혼자서 읍내로 나가는 화면이 비친다.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이불속에서 바라보는 화면의 그 시골 풍경은 따듯해 보였다. 마당에는 여기저기 푸른 싹들이 트여 올라오고 있고, 땅은 촉촉하고 생기를 잔뜩 머금어 원두를 드립 할 때 생기는 커피 빵처럼 부풀어 올라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한낮의 봄 볕이 쏟아졌다.


"아... 봄이구나...."

Dp1x (남양주 청학주공 아파트 단지 내)


이러지 말고 우선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돈이 없다. 돈이 없으면 버스나 지하철도 탈 수 없고, 기껏 해야 아파트 단지 뒷산이나 다녀올 수 있을 뿐이다. 또 우울한 기운이 솟아오르려 할 때, 책상에 굴러다니는 롤라이 필름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같은 기분으로는 사진 찍을 일 또한 없으니 처분하기로 한다. 카메라를 처분하느라 오랜만에 인터넷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니 미니벨로가 또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사서 이곳저곳 달리면서 곰팡이 피어오르고 삭은 내 몸과 영혼에 봄기운을 넣어주고 싶다!'

1시간 넘는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서 샾에서 노란 접이식 미니벨로를 현금 30만 원을 주고 구매했다. 카메라를 처분한 돈과 거의 비슷한 가격이었다.


자전거 샵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내 손에 들어온 자전거 안장에 오르니, 광역버스로 1시간 거리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페달을 밟았다. 결국, 30분 만에 자전거를 접고 다시 버스를 탔다.

 30분도 자전거 주행을 못해서 삐걱거리며 포기하는 한심한 체력의 나, 모두가 일하는 평일의 낮시간에 나이 드신 분들이 몇 분 있을 뿐인 버스에 자전거를 접고 덜컹거리는 나, 낮기온이 이렇게나 올라갔는지 모르고 두꺼운 옷을 입고와 온통 땀범벅이 된 나.


 내가 생각해도 안쓰러운 내 모습에, 오히려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시원한 반바지에 티셔츠, 가방엔 책 한 권과 물통, 과일, 스니커즈 등을 넣고, 정한 곳 없이 돌아다녔다.

힘들면 쉬기도 하고, 접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1개월 정도만에 75kg까지 도달했던 체중은 68 kg으로 내 평균 체중으로 회복했고, 새하얗던 피부는 조금씩 태닝이 되어 건강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자주 들리곤 했던 노원역 할리스 카페는 탁 트인 대로변에 파라솔이 비치되어 있어,  봄바람을 맞으며 책 읽기에 아주 좋다. 그런데 그 건물엔 초대형 입시학원인 메가스터디가 입주해 있었다,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머리를 쮜어 짜내고 좁은 공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삭막한 공간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모두에게 상대적이다. 잔뜩 굳은 얼굴들로 학원 엘리베이터 앞에 늘어선 학생들 옆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 있자니 묘한 감정이다.


 자동차들로 늘 정신없고 시끄러운 동부간선도로 이어지는 도심과는 달리 자전거로 도로가 놓인 뚝방길은 사뭇 다른 세상 같다. 길게 늘어선 나무들은 눈처럼 벚꽃잎을 흩날리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산책하는 사람들, 팀복을 맞추고 줄지어 자전거를 타는 아주머니 동호회, 그리고 런닝족들의 가벼운 발소리로 그저 평화롭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내 눈에 띈 것은 보조기에 의지해서 힘겹게 걸을 걷는 노인들, 휠체어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불편함을 딛고, 각자의 어려운 상황을 떨쳐내려 밖으로 나온 그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보며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사실 그동안 자전거만 탔던 것은 아니고 잡포탈을 통해서 하루에도 몇 개 기업씩 이력서를 제출하고 지원해왔다. 연락 오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고, 난 포기해야 하나 생각도 했다.




Canon A-1 50mm f1.4 Fuji film (도봉구청 앞 뚝방길)


그래도 움직여야겠다.


 아직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중국어, 어설픈 영어와 해외경력, 회사라는 조직에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생각이 들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중랑천 길에서 한 발짝 씩 내딛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 다른 사연으로 다른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둘 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까만 안대를 씌워놓은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 대학교 선배 건우형에게 전화를 했다.

 건우형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면, 그는 작은 체구지만 묵직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학교 동아리 시절부터 친해진 같은 과 선배인. 그가 경제학과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형은 경제학과 99학번 우리 동기 중에 마음에 들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여학생이 듣는 강의시간에 노크를 하고 불쑥 찾아들었었다. 꽃다발을 들고 있던 건우형을 본 당시 여강사는 본인에게 찾아온 줄 알고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그날은 또 스승의 날이었다.)

 학생들은 술렁였고, 건우형은 덤덤히 그 여학생에게 꽃을 전달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왔었다. 참 클래식한 구애이긴 하나, 언제나 클래식한 건 좀 멋지다.

 결국 형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고, 시사경제 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도 후배들을 잘 이끌고, 4학년 때는 한국은행 주관 공모전을 출전하는 등, 하여간 추진력 있는 사람이다.


내가 먼저 형에게 물었다.

 "형, 최근에 이력서를 꽤 여러 곳에 뿌렸는데, 연락 오는 곳이 하나도 없네요..."

"음..."

"요새 워낙 취업도 힘들고, 치열한 것도 있고, 네가 신입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경력도 좀 애매할 수 있을 거 같긴 하다."형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렇군요..."

"근데 넌 학교 다닐 때 PPT좀 만들지 않았냐? 좀 남들보다 눈에 띄려면 좀 튀게 만들어봐 그런 거 잘 하잖아?"

" 아, 그렇긴 한데 PPT요?"

"응, 회사에서 반드시 양식대로 하라는 곳은 어쩔 수 없지만, 아닌 곳도 많거든."

" 네, 한번 해볼게요."


그렇게 일단 전화를 끊고, 고민에 빠졌다.

PPT로 이력서를 만든다.. 내가 알기론 보통 PPT는 제안이나 보고, 회의에 쓰이는 슬라이드쇼 툴인데....

제안..'제안?!"

'그래, 어차피 이력서도 인사담당자와 해당부서에 나라는 사람을 제안하는 거랑 다를게 없네 뭐.'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바로 내가 그간 모아 온 PPT 파일들을 뒤적이며 컨셉을 그려보았다.

그간 대학교 시절 광고공모전을 출전하면서 수집해 놓은 파일 분량도 그렇고, 큰 상은 못 받았지만 꽤 작업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잠깐 고민해서 생각해 낸 것이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 콘셉트이다.

 인간이 배터리로 전락한 미래시대에 수많은 이들 중에 진짜 네오를 찾는 일은, 마치 쏟아지는 지원자들 속에 옥석을 가리는 일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지금 생각하면 아저씨 같은 발상이긴 하다)


우선 PPT 표지를 뭔가 미래에 있을 것 같은  기형적인 도형들로 꾸미고, 사진은 증명 사진이 아닌 캐주얼 슈트에 계단에 다리 하나를 올린 상태에서 손을 턱에 가져다 놓은 섹시한(아닌 건 안다) 사진을 사용했다. 기본정보 페이지 바탕에는 까만 배경에 난수 암호들이 흘러내리고 마지막 메시지에는 수많은 스미스 요원 중에 내 사진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 잡 포탈에서 사원 대리급을 채용하는 회사들을 골라 이메일로 지원을 했다. 그러자 믿기지 않게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뤄왔던 익숙한 PPT를 만들면서 자신감을 좀 회복한 터라,

'네오를 알아보는 오라클이 있는 기업이 있군.'

요런 가당찮은 생각을 하며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에 마주하게 된다. 너무 이력서를 이곳저곳 많이 제출해서 나 역시 여러 면접을 보다 보니, 어느 기업을 선택해야 하는지 쉽지가 않은 것이다.

 재무제표는 잘 볼 줄 몰랐고, 매출 규모나 사원수, 복지, 사무실 위치와 환경, 면접 시 느껴지는 부분, 면접비의 지급 여부 등으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 면접장소에 사람을 불러 놓고서는 이력서가 특이해서 일단 연락해봤다는 인사담당자와 우리 부서와는 안 맞는 사람을 불렀냐는 실무자들이 내 앞에서 실랑이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한동안 또 연락 오는 회사가 없어서 유유자적한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데,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스템즈'라는 회사였고, 면접일자를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저녁 시간 때였고, 집에 혼자 있던 나는 거실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직감적으로 이 회사를 다니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선명했다. 이런 느낌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꽤 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았지만, 신기하게도 이전에 연락 온 회사와는 다른 무게감과 다녀보지도 않은 그곳의 존재감이 멀리서 감지되었다.

 그러자 그간 신경 썼던 팽팽한 긴장의 끈들이 몇 가닥 툭툭 끊겨, 움직이지 않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거 회사 이름 한번 폼 안나네....'




물론  그곳이 내가 5년 이상 다닐 직장이 될 줄은 몰랐다. 며칠 뒤, 아직 5월 말인데도 한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오후 1시, 해가 비추어 더 더운듯한 지하철 2호선의 열기 속, 새로 산 양복이 아무래도 저가 원단이다 보니 양 겨드랑이, 허벅지, 팔뚝에서 뇌로 전해지는 불편함을 느끼면서, 강변역에 도착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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