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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vin Feb 15. 2016

남산 타워의 색

[Chapter II]#3. 첫 컷을 찍었다.



 언제부터 남산타워를 '서울 N타워'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남산에 세워져 남산타워로 오랜 시간 불려 온 것을 누군가의 의도로 억지스럽게 개명하고 시민들은 그러려니 따라 부른다. 어쨌건 봄이 와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서울에서 편하게 오를만한 곳은 아직 변함이 없기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면서 낮에 올라와 본 일은 없다. 충무로에서 카메라나 렌즈를 사러 다닐 때, 현상소에 필름을 맡겨놓고 커피숍을 찾아 거닐면서, 아니면 남산 한옥마을을 가끔 혼자 산책하거나 하면서 멀리서 보였던 곳일 뿐이다. 특히 밤에 충무로길을 걸으면서 본 남산타워는 여러 색으로 바뀌어 가며 빛을 발했는데, 그 안의 레스토랑을 상상하곤 했었다. 만나기 시작하는 남녀들, 소개팅의 자리, 오래된 연인들이 그 타워를 꽉 채워 앉아 있고, 타워 기둥 안쪽에 숨은 늙은 기술자들이 정밀한 기계장치로 그 연인들에게서 넘쳐나는 기운을 뽑아내어 만들어 내는 색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개팅 커플이 많은 날은 밝은 초녹색, 불륜커플이 많은 날은 경고의  붉은색으로 보인다던가.

여하튼 난 오늘은 그곳에서 윤대리를 만나기로 했다.




 얼마 전 중국에서 돌아온 나는 윤대리에게 전화를 걸어 수요일 정도에 저녁을 먹자고 했었다.

"네 oo기획실 윤영선입니다~" 맑은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함태현입니다."

"아!.. 네... 안녕하.. 세요." 사무적인 톤은 이내 사라졌다.

"시간 괜찮으시면 수요일 정도에 시간 어떠신가요?"

몇 초 정도의 침묵이 지나갔다. 내가 다시 말했다.

"드릴 말씀도 좀 있긴 하고, 가볍게 식사하시죠~ 괜찮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시간은 다시 정하는 걸로 하고, 그 날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짧은 달리기를 마친 것처럼 숨이 차오른다.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기대어 앉은 목받침도 없는 의자에 앉자 달의 언덕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태우는 듯하다. 담배를 끊은지는 꽤 되었고, 담배 생각이 난 것은 아니다.



 서른 살이 넘은 일반적인 여자라면, 분명히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을 것이고, 지금도 누군가 그녀와 술이라도 한 잔 마셔보려고 기회를 엿보는 놈들이 없지 않겠지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떤 연애를 해봤을까? 꽤 부유한 재벌 2세쯤 되는 남자와 외국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서울의 그것과 또 다른 멋진 야경을 배경으로 좋은 빈티지의 와인을 마셨을지 알 수 없고, 그녀가 내가 상상할 수 도 없는 상류의 삶이나, 복잡 미묘한 과거를 품고 있다 한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나는 초밥과 간장새우를 꽤 잘 만드는 건대입구역에 실장을 알고 있었고, 그 근처에 꽤 많은 LP를 보유하고 있는 '산울림'이라는 단골 바를 알고 있었다. 지하의 술집을 운영하는 하얀 얼굴에 검은 머리, 검은색 뿔테 안경의 사장은 알파카처럼 멀뚱하니 손님을 맞았고, 안주 만드는 것을 꽤나 귀찮아했다. 그는 손님에게 음악을 틀어 주는 것을 즐겼고, 나는 그 음악을 좋아했다.  몇 번은 가게 문을 닫고, 우리끼리 아침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곳은 온전히 나의 세계였다. 밤이면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를 휘젓다가 건대입구에 들려 햄버거로 빈속을 채우 기도 했고, 만화방을 들리거나, '산울림'에 들려 술을 마셨다. 건대입구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정한 것은 이처럼 어지간한 사람보다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퇴근 후 역 입구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  초밥집 한 켠 구석의 좁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차가운 소주를 한 잔씩 따라가며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윤대리는 아주 매너가 좋았고, 매끄러운 분위기를 이어가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가끔 머리를 넘기는  손동작에 편안함은 없었다. 당연하게 아직 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는 그녀의 행동에 더욱 눈길을 주게 되었다. 오히려 너무 편한 동작과 분위기였다면 우리 둘은 거기서 좀 더 편하게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고 끝났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조금 더  불안해했다.  칙칙한 지하의 내 모습 같은 곳을 아직 내보이기가 나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산울림'은 가지 않았다.

 바로 근처의 2층에 자리한 호주식 꼬치집에 들어갔다. 난 꼬치요리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잘 모른다. 더구나 호주식 꼬치라니, 가본 적도 없는 정체불명의 퓨전술집이었지만, 일전에 가보았을 때, 창이 넓고, 작지만 밝고 깔끔한 분위기에 맥주 맛은 중간 정도는 뽑아내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어, 그녀와 2층의 그곳에 올라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사실 그 날. 윤대리와 만날 생각에 들떠 사무실을 복귀하는 중 회사 앞 서점에서 이혜인 수녀님과 정호승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사서 가방에 담았었다.

 '시라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그럴 재주는 없고, 시집을 샀다. 어떤 시집을  좋아할지 알 수 없어 두 권을 샀다'고 말하며 윤대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두 권의 시집으로 약간의 긴장감은 스르륵 녹아든 것 같았다. 그리고 윤대리가 말했다.

"저.. 사실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아, 생일이라고요? 그럼...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파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놓긴 했었는데 취소했어요.."

달뜬 표정으로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윤대리는 그날 친구들과 본인 생일 파티를 잡아놨었는데, 나를 만나기 위해 그 약속을 취소하고 건대입구까지 나와주었던 것이다.

 갑자기 술이 확 오른다. 윤대리와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기는 했는데, 그 순간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하얗게  잊어버렸다. 그 호주식 꼬치집이 지상 150층 정도 높이에 올라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기증이 났고, 마주 앉은 윤대리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이렇게 말했다.


"만나고 싶습니다,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대리님은 꼭 만나보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오늘 안 나오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윤대리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이미 150층 높이에 도달한 호주식 꼬치집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거기서 몇 마디 더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윤대리와 밖으로 나왔다. 밤이 되자 기온이 떨어져 꽤 추웠다. 하얀 재킷을 입은 윤대리의 가느다란 팔이 조금 떨려 보여서 살짝 잡아주었다.

그러자 윤대리는 아직 사냥이 서투른 치타에게 꼬리를 잡힌 초원의 사슴처럼 풀쩍 뛰어 택시 안으로 들어가서 이내 사라졌다. 짧은 인사로 그렇게 그날은 헤어졌고, 나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양치를 하고, 머리를 꼼꼼히 감고, 질레트 칼 면도기로 신경 써서  면도했다. 즐겨 입는 버커루 진에 봄에 입기 알맞은 얇은 재킷을 걸쳤고, 잘 닦아놓은 닥터마틴 구두를 신고 집에서 나왔다. 윤대리를 집 앞까지 데리러 가서 함께 남산에 걸어서 올라갈 계획이다.

 술에 취한 새벽에 봤던 것과는 다르게, 서촌의 골목길은 곳곳에 개나리가 낡은 담을 넘어 풍성하게 늘어져서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고, 자그마한 카페와 술집들이 도심의 복잡한 공간과 확연하게 분리된 아늑한  느낌이다.

 골목 위에서 윤대리가 내려온다. 하늘색 면바지와 운동화에 가벼운 차림의 그녀의 긴 갈색머리가 4월의 햇살을 받아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반짝거린다.

 주말이어서 꽤 사람이 많았지만 마을버스 안은 눈부시도록 해가 넘쳐 들어왔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녀가 가져온 카메라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그녀는 회사의 사진동호회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카메라를 구매했고, DSLR의 사용법도 모르거니와 잘 안 쓰게 되었다고 했는데, 일단 요즘같은 4월은 사진찍기 좋은 날이 좋으니 가져와 보라고 했었다.

검정색 투박한 카메라 가방을 열어보니 니콘의 D90카메라였고, 렌즈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남대문의 효성카메라로 갔다. 아주 오랜만의 방문이었지만 부장님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28-105mm 줌렌즈와 50mm f1.8 렌즈를 부탁했고, 대중적인 브랜드의 카메라 였기에 마침 괜찮은 컨디션의 렌즈가 있었고, 저렴하게 구매했다.

 우리는 남산으로 오르기 전 명동으로 걸어가서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피자를 주문해 놓고, 잠시 쉬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방금 구매한 50미리 렌즈를 접점에 맞추어 잘 체결하고 뷰파인더를 눈에 대고 오른손 검지로 셔터를 반쯤 눌러 초점을 잡은 후, 힘을 주어 셔터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우리의 첫 컷을 찍었다.




Nikon D90 af50mm f1.8 명동, 첫 컷!




첫 데이트날 구매한 28-105 렌즈 테스트 샷




그 날 남산에 오른 벗꽃잎처럼 많은 사람들 중 한 커플




그리고 나랑 만난 꽃




눈이 부시도록 빛났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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