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놓는 사람

by 전민재
2_13.jpg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놓는 사람_by 전민재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집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발견한 문구이다. 암에 걸린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혼란스러울 때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자기 관리를 못해서 아픈 사람.

평소에 덕이 없는 행동을 해서 신으로부터 벌을 받은 사람.

운이 없는 사람이라서 일단은 피해야할 사람.


암에 걸린 사람에 대한 세상의 시선과 고정관념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나자신도 막연히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치부했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막상 암에 걸리고 보니 사람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도 많았다.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했는데 걸린 사람.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고 맑게 살아왔는데 걸린 사람.

운이 좋아 일이 잘 되고 있는 가운데 걸린 사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고민스러웠다. 사람들의 고정관념대로 스스로를 정의하다가는 치료는커녕 그것 때문에 우울해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암에 걸려서 한없이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스스로 세워주고 싶던 차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우연이지만 필연적으로 내 눈에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암에 걸린 나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을 카카오톡 프로필에 저장해두고 자주 꺼내어보았다.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이.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놓는 사람.”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물질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수한 힘으로 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훌륭한 인간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라고 책에서 소개한다. 작가는 저 시기에 한국에서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모호하지만 자신이 영혼이 이끄는 대로 해외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다. 어떤 변화의 시작점에 서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나와 비슷한 처지로 보였다. 나 자신도 스스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해왔던 어떤 대답 같은 것을 받아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암이라는 병이 나라는 사람을 거쳐서 지나가면서 나의 힘이 더욱 순수하고 강해지길 기도한다. 고여 있는 물 안에서 안전하지만 우울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그래도 한 발짝 나아가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암이 내 등을 떠밀었다. 나 자신을 흘러가는 흐름속의 어떤 존재로 정의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효과는 컸다. 한결 내가 아픈 나에 대해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중에는 암이라는 오지의 세계로 여행 온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는 시도로까지 이어졌다. 실제로 나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오지로 여행가서 극한 체험을 돈을 내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니 암으로의 여행자는 가성비가 좋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비가 들긴 하지만 나라에서 지원이 되는 부분이 있고 죽음이라는 미지의 차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어 오싹하기도 하지만 또 그렇다고 체험을 하다가 강도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예측불가의 상황에 놓일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같다. 따지고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첨이 되어야 한다. 마치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여기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는 본인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기본적으로 얻게 되는 디폴트값은 있다. 수술과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등의 표준 치료와 그로 인한 부작용들. 예를 들면 림프 부종같은. 심지어 그것들조차 본인이 선택하지 않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정보를 찾고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만큼 노력은 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자. 부작용이 생겼다면 그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찾아보면 될 것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지에 가서 우리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돌아갔던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암투병도 별다른 것이 없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이다. 어떤 결과가 돌아오느냐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힘든 점과 좋은 점. 여러 가지를 마음을 열고 체험하자. 그리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자.


아무튼 나는 그런 생각으로 내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재난적 사건이자 역경인 암진단과 치료과정을 무사히 지나왔다. 또한 나는 암에 걸리고 난 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고 느낀다.


윌리엄 B. 어빈은 자신의 책 <좌절의 기술>에서 좌절을 만났다면 오히려 우쭐해져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신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용기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리를 좌절시키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가능한 최고의 탁월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좌절은 우리가 신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이자 실제로 신이 우리를 인간적인 탁월성을 성취할 수 있는 후보자로 간주한다는 증거라고 말이다. 암은 한 개인의 건강에 있어 가장 큰 좌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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