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네이버스 윈도우_The Neighbors' Window>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년 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웃이란 많은 것을 나누고 함께 하는 존재였다. 요즘에는 좁다란 복도와 엘리베이터만을 공유하는 관계가 되어 버린 “이웃”이라는 단어의 따뜻한 기억이 참 멀게만 느껴진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던 할아버지 댁은 이웃의 일이 곧 우리 집 일처럼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며 그러다가 발생한 소소한 오해로 다툼도 일어나는 확장된 가족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른이 되어 할아버지 댁을 다시 찾았다. 한없이 높았던 시골집의 이웃집 담장이 그렇게 낮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담이었다니, 피식 웃음이 났다. 담쟁이가 뒤덮인 이웃집 담은 지나가다 들리는 소리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하게 했던 것과 다르게 어른들의 눈높이에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형식적인 경계였을 뿐이었다니.
유년 시절 이웃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아주머니,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나는 아이들에게도 ‘이웃’이라는 의미가 더불어 사는 관계임을 전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타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고, 공동현관문 센서를 먼저 가서 열어주는 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내 이웃과 아이들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 들이었다. 쉽지 않지만, 굳게 닫힌 현관문이 내가 깨닫게 된 어린 시절의 형식적인 경계의 낮은 담과 같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중년의 아저씨를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쳤었는데, 항상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가 이쁘니까 아이들이 다 예쁘군요.”로 시작되었던 인사는 어느 날 출근길에 마주친 엘리베이터에서 “화장하시니 더 예쁘네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 이웃에 대한 나의 편함은 불편함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인사성 밝은 아이들 때문에 이쁘게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칭찬이 더는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고, 나의 친절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의 자유로움을 느끼듯, 심리적 거리를 좁혀오는 그 인사가 나에게는 불편함이 된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나에게 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하냐고 아이들은 묻는다. 아이들의 밝은 인사로 기뻐하지 않을 어른이 없고, 그렇기에 아이들이 그 시절 어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그래서 그걸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해주었다. 그 불편함 이후로, 나는 소란함이 없는 이웃에 감사하며 살게 되었으며 물리적 거리의 이웃의 의미는‘당근마켓’(당신 근처의 마켓)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이웃의 개념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이버상의 네이버와 페이스북 등과 같은 소셜미디어로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 이웃의 창문이 된 셈이다. 사각 프레임 속에 비친 이웃의 담벼락을 탐색하고, 친구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웃을 만들자면 팔로우 버튼 하나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정지우 작가의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라는 책에서 우리가 인스타그램으로 바라보는 타인의 일상은 일종의 환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곳은 언제나 밝고 희망차고 화려하다.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연출된 단 한순간의 이미지일 뿐이지, 현실도 삶도 아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일 뿐이다」. 이웃에 대한 환각을 다루어 2020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네 이웃의 창문>(The Neighbors’ Window)이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마샬 커리(Marshall Curry)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Love & Radio라는 팟캐스트 사연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앨리(Alli)와 제이콥(Jacob)은 세 자녀를 둔 뉴욕의 30대 평범한 부부이다. 어느 날, 길 건너 환하게 불 켜진 창문을 통해 이웃집 부부의 애정 행위를 엿보게 되면서 부모로서의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앨리 부부에게 신혼부부의 젊음과 열정, 구속되지 않는 자유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날 이후 앨리와 제이콥은 신혼부부를 염탐하며 살아간다. 친구들과의 화려한 파티, 자유분방한 애정 행위들을 창문으로 훔쳐보면서 앨리와 제이콥은 더욱 서로에게 불만족하게 되고, 지금 눈앞에 놓인 육아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무들이 버겁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신혼부부에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이웃집 남자가 머리를 깎고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 앨리는 남편에게 그 모습마저도 “Cool” 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웃집 남자의 사정을 모르고 창문을 통해서만 본 그 남자의 스타일로 본다면 멋지게 보이는 환각을 일으킬 수 있다. 병상에 누워있던 남자는 결국 죽음을 맞게 되고, 놀란 앨리는 이웃집 여자를 위로하기 위해 바로 달려 나간다. 그런데 이웃집 여자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된다. 남편이 아프게 된 이후로 그 신혼부부도 앨리와 제이콥이 그랬던 것처럼 건너편 창문을 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꿔왔다고. 영화는 앨리가 자신이 가진 삶을 부러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 일상을, 아이들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다른 사람의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그 행복한 순간은 24시간 중에 어쩌면 단 몇 분 몇 초일 지라도 우리가 보는 모습이 그들의 전부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 소셜미디어와도 많이 닮아있다. 내 이웃의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계가 전부인 듯 바라보면 우리는 앨리와 제이콥처럼 자신이 가진 것들은 보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 갖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가진 지금, 이 삶의 현실이 너무나도 소망하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영화는 2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러한 메시지를 이웃집 창문을 바라보는 두 부부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이미 내가 가진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 일상의 소중함 등을 느끼게 해 주고 깨달음과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각자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이웃의 창문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면 병으로 어쩔 수 없이 깎은 머리마저 “COOL” 하다는 표현이 대조적으로 마지막 우리가 느끼게 될 슬픔을 더욱 선명하게 해 준다.
어쩌면 이웃집 아저씨 역시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기 위해 단순히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이었을지도 모르는 외모 칭찬이 더 이상 반갑지 않고 반감이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로 멀리 산책하고 돌아오는 이웃집 아저씨가 보이면 일부러 걸음의 속도를 늦춰 마주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나의 프레임으로 아저씨를 바라보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이다. 오늘은 다시 누군가의 친절한 이웃으로 거듭나기 위해, 어린 시절의 허물없던 이웃처럼 형식적인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이웃을 향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싶다.
영화 감상하러 가기 : https://binged.it/30vOGBl
정지우 작가의 도서 :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