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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Oct 28. 2022

베트남 아줌마의 김치

<나의 아줌마 관찰기>



그리하여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정신을 차리니
마치 당연한 일이듯

낯선 땅
낯선 여관의
지붕 물구덩이 속에서
한 겨울에,

돈까스 덮밥과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





최근 들어 이상하게 입맛이 없었다.


가을 탓이려니 하고 괘념치 않았건만 매일 습관처럼 저녁거리를 정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게 대단한 숙제라도 된 듯 느껴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오늘은 호박이 눈에 띄네. 호박 잘잘 썰어서 전을 부쳐 먹자.’ 라던가,

‘날씨가 으스스 하니 칼칼한 게 당기네. 청양고추 팍팍 쳐서 얼큰하게 국 하나 끓이자’와 같이

그날그날 의식의 흐름대로 장을 보는 편이었는데 그 감이 변비처럼(?) 꽉 막힌 거다.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으니, 냉장고에 들은 것을 꺼내어 아무거나 먹어도 뭐 한 끼쯤은 거른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었다.


나가서 외식을 할까 해도 딱히 먹고 싶은 메뉴가 없었다. 뭘 먹을까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싱겁게 내려놓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주쯤 지나고 유난히 쌀쌀했던 어느 날 이웃과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놀리며 놀고 있는데, 추워서인지 갑자기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기에 가장 가까운 이웃집 화장실을 빌려 쓰게 되었다.


그 이웃은 베트남에서 온 여자였다. 사근 사근 웃는 낯이 귀엽고 “엉니 엉니.” 부르는 말씨가 정이 가서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내 서툰 영어와 그녀의 서툰 한국어를 반반씩 보태어 대화도 나누는 사이였지만, 그녀의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급한 아이 화장실부터 들렀다가, 손을 씻고 바깥으로 나오니 포근한 가정집의 풍경이 펼쳐졌다.


예정에도 없이 빈손으로 갑자기 들이닥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볼일만 보고 가려고 했건만, 차 한잔 마시고 가라는 이야기에 이끌리듯 집안으로 들어섰다.


내심 베트남 여자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슬쩍 집 구경을 해보니, 흔히 보이는 여느 집과 다름없이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거실 복도를 따라 아이가 오며 가며 볼 수 있게 한글과 영어 카드가 붙어 있고, 책장의 한편에는 그녀가 공부하는듯한 한국어 교재와 사이사이 꽂혀있는 프린트물 여러 장.


부엌에 놓인 식탁 근처에는 남편과 찍은 결혼사진 한 장, 그리고 베트남에 계신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액자에 담겨 나란히 놓여있었다.


사진 속 부모님 얼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서 오세요 우리 딸 집에 놀러 온 것을 환영해요’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먼 곳으로 딸을 보낸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실지. 짐작해보지만 막연한 상상뿐 제대로 짚어지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는 우리 집에 누가 놀러 오면 먼저 차 마시고 그다음에 밥 먹고 그다음에 남자들은 술도 마셔요.”


엉성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단어를 골라가며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건네받은 따듯한 차. 티백이 잠긴 머그를 받아 들고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식탁 의자에 깊숙이 붙였다. 홀짝홀짝. 몇 모금에 추운 속이 뜨듯해진다.


그녀는 여기에 와서 잘 지내는 걸까? 나도 타지로 와서 적응하기 어려운데. 친구는 좀 사귄 걸까? 남편이랑은 어떤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고르고 골라


“밥 잘 챙겨 먹어요?” 물어보니


“어어. 요리. 요리 그냥 그냥. 보통이에요.”


장은 어디서 보냐 물어봤더니 놀랍게도 집에서 20분 정도 차를 타야 가야 있는 전통시장에 간다고 했다.


“시장 재밌어요. 신선해요. 한번 가서 많이 사요.”


그러고는 최근에 김치도 담갔다고 하는 것이다.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담갔냐고 물어보니, 배추 한 포기를 딱 사서 저녁에 절여서 아침에 양념하고 담갔다고.


엄마한테 맨날 받아다 먹기만 했지 김장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문득 부끄러워졌다. 김치 맛을 보여주고 싶어 하기에 조금 맛 보여 달라 했더니 꺼내 준 그녀의 배추김치.


씩씩한 그녀의 배추김치


아직 덜 익은 김치에서는 젓갈 향과 더불어 신맛 단맛 짠맛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다. 알밤도 깎아서 조금 넣었다고 하는데 밤 씹히는 단맛이랑 식감이 샐러드 같기도 했다. 그렇게 젓가락으로 김치 몇 입을 먹으니 입 안에 침이 확 고였다.


“진짜 잘 만들었다. 맛있다. 대단하다. 김치도 담그고 너무 멋있어.”

맛보며 칭찬을 보태니 그녀의 얼굴이 해사해졌다.


결국 나는 그녀가 처음 담은 김치에, 찜기에 쪄서 보드랍고 짭조름한 생선에 아침에 먹고 남은 미역 된장국  그릇을 보태어 점심밥을 얻어먹고 나왔다.

다 먹고 밖으로 나오니 속이 훈훈해 춥지 않았다.


전혀 예정에 없던 하루 일정, 예정에 없던 이날의 식사로 나는 과장을 조금 보태 집 나간 식욕을 되찾았다. 베트남 아줌마가 만든 김치에 위로받다니 역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다음번엔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대단치 않은 실력이지만 정성들여 밥을 해주어야지.

그녀가 내 밥을 먹고 여기서 더 잘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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