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고를 수 없는 등산화와 스펙 요점 정리
(고민 끝에 등산화를 샀지만 후배가 산 등산화를 보니 내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는 내용에서 계속)
게다가 새로 산 등산화인데도 어디서 본 것 같은 디자인이다 싶어 기억을 잘 더듬어 보니, 어머니가 홈쇼핑으로 충동구매하는 바람에 맞지도 않는데 몇 년을 억지로 신어야 했던 운동화와 흡사했다. 물론 성인이 되어 부모님이 사준 운동화가 마음에 드네 안드네 하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부끄러운 일이고, 그럴 거면 애초에 받지 말지 그랬냐고 비난받을 수도 있겠다싶다. 하지만 방송에 비친 운동화는 제법 괜찮아 보였던데다, 그때는 운동화 세트 구매에 가담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가족 전체의 행복에 득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로 구입한 신발이 취향이나 발 둘 중 하나라도 만족시켰다면 좋았으련만……. 메쉬와 반짝이는 인조가죽으로 만들어진 키높이 운동화는 초등학생 신발처럼 보이는 것도 모자라서 발까지 불편했다. 영어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다’ 같은 표현이 있는데, 정말이지 취향에도 발에도 맞지 않는 신발을 계속 신는 짓이란 육체와 심리 양쪽으로 피곤한 일이다.
회상이 길었다. 아무튼 그런 과거를 떠올리고 보니 아무래도 새 신발에도 정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신발을 신고는 산행이 그리 개운치 않을 게 분명했다. 방금 사귀기 시작한 새 애인이 전 애인과 똑같은 습관을 가졌음을 알게된 것과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흔히 등산 고수들은 등산화를 고를 때 디자인을 보지 말고 기능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취미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만족할 수 있고 타인에게도 거리낌없이 보여줄 수 있을 외형을 갖추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호감과 마찬가지다. 내면의 매력을 아는 게 더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당장 내면부터 알 방법이 없으니 외형부터 좋아하는 게 취미로 빠져드는 길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단순히 생각해도 등산은 험한 길을 오래 걷는 고역인데 이걸 멋도 없는 꼬락서니로 한다는 건 여러모로 지독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 것도 모자라서, 쇼핑몰 통합 검색 사이트를 한참 뒤적여보니 내 취향에 꼭 맞는 등산화가 서너가지나 발견되었다. 저렴한 순서로 정렬한 다음 8만 원까지만 볼 일이 아니었다. 칼같이 예산을 지키려는 목적 하에선 좋은 방법이었지만…… 등산화가 두어 달에 한 번씩 교체할 물건도 아니니 기왕이면 내 취향에 딱 맞는 걸 사서 쓰는 게 오래도록 후회하지 않을 현명한 결정 아닐까? 나는 결국 왕복 택배비를 다 지불하면서까지 기껏 산 등산화를 환불하고 말았다.
이후로는 그야말로 지독하기 짝이 없는 고민이 이어졌다. 일단 전술화 모양으로 나온 아이더의 노마드 모델이 디자인으로 보나 기능성으로 보나 이상적이라 9만원 쯤에 살 작정을 했지만 막상 쇼핑몰에 들어가니 내 발에 맞는 사이즈가 품절이라 사지 못했다. 당장 사자면 백화점에 가서 12만 원에 구해야 하는데, 8만 원으로 생각한 예산을 50퍼센트나 초과하자니 아무래도 시원스럽게 지갑을 열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포인트나 할인권을 써보려 해도 이미 할인가라는 이유 때문인지 먹히질 않아 빈정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자니 이미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결해서 지출을 아예 않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예 등산화를 만드는 건 어떤가 싶기까지 했다. 더워서 신지 않고 있는 나이키 에어포스1 미드 모델의 접지력을 개선하면 발목도 잘 고정해주고 예쁘기도 한 등산화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상당히 터무니없는 생각인데, 공교롭게도 나는 그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잡스러운 재주는 갖추고 있는 터라 곧장 에어포스1의 밑창에 골을 더 파기도 하고 글루건 따위 보강재를 바르기도 했다. 며칠에 걸친 시도 끝에 내가 낸 결론은, 뭐든 별로 효과적인 짓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단 되는대로 골을 더 파는 것 정도로는 접지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기야 대충 파도 되면 회사들이 뭐하러 연구를 하겠는가. 그리고 글루건은 별로 잘 붙어있지 않았고, 마찰력이 특별히 좋지도 않았다. 이 역시 많은 제조사가 고무의 특성과 비율 따위를 줄곧 연구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될 일이 아니었다. 또한 에어포스 1은 밑창이 두꺼워보여도 앞쪽은 요철을 밟았을 때 충격이 상당히 많이 전달되었으므로 새 밑창을 추가로 붙이는 것만이 만사 해결의 길일 터였는데…… 아무리 그게 내 능력으로도 가능한 일이라지만 선뜻 할 작업은 아니었다. 재료나 공정 문제는 둘째치고, 지금도 5백 그램인 신발을 불완전한 6백 그램짜리로 만들면 손이 갈 턱이 없지 않은가. 해볼 수 있다고 뭐든 해봐도 되는 건 아니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긴 쉽지만 엉망이 된 물건과 흘러간 시간의 뒷감당은 어렵기 때문이다.
오만가지 괴상한 고심을 거듭하는 한편으로 중고 거래 앱에 ‘등산화’로 키워드 알림을 설정해 놓은 터라 주인에게 영속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등산화들을 하루에도 몇 켤레씩 보기도 했다. 당연히 그중에서 마음을 뒤흔드는 것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오래된 캠프라인의 등산화였는데, 특별히 디자인이나 성능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무료나눔’이라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가져오고 싶었다. 그러나 새것이나 다름없는 하이컷 등산화가 있는 마당에 비슷한 포지션의 등산화를 추가로 들인다는 게 내키지 않아서 포기했다. 공간도 문제였고, 정말 그게 없으면 곤란에 처하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욕심을 내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로 고심하게 만든 것은 호카의 인기 모델인 카하였다. 중창을 두껍고 푹신하게 만들기로 유명해서 스케처스와 함께 족저근막염 환자들의 구원자로 여겨지는 브랜드가 바로 호카고, 여기서 비슷한 개념으로 아주 푹신하게 만든 등산화가 카하다. 당연히 나는 이걸 신으면 발이 몹시 편할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중고 카하를 사기 직전까지 갔으나…… 내구성이 아주 떨어진다는 평에 어울리게 밑바닥이 닳아 있어서 멈춰서고 말았다. 어지간한 신발이라면 내가 가진 소소한 재주만으로도 대충 쓸만하게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등산화처럼 극한 환경에 노출되는 신발이라면 결과를 짐작할 수 없었다. 보강재가 바위 위에서 뜯어져 미끄러졌다간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수선을 맡기면 8만 원 가량이 나갈 텐데, 6만 원에 산 물건을 8만 원에 수선한다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일일 뿐더러, 쿠션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카하의 밑창만 수선한다고 다시 쓸만한 물건이 될지 알 수 없기도 했다. 벽에 박힌 못은 뺄 수 있어도 자국은 지울 수 없듯이 뭐든 고친다고 다시 말끔히 살아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원점으로 돌아온 나는 결국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지도 못하고 공짜로 주는 신발을 받지도 못했으며, 편해 보이는 신발을 사서 잘 고쳐본다는 알뜰한 계획을 실행하지도 못했다. 낡은 것을 오히려 더 선호하는 유난스런 취향 때문에 선택지가 너무 넓은 것도 문제였지만, 돈도 별로 없고 신발 놓을 공간도 남아나지 않아 등산화 살 기회를 딱 한 번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기에 결정이 너무 무거웠던 것도 문제였다. 도전과 체험은 분명 값지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그 대가를 여러 번 지불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클라시코의 목토 부츠를 신고 관악산으로 갔다. 인왕산에 오르거나 자락길을 걷는 등으로 몇 번이나 잘 신고 다닌 기억도 있고, 지금도 가장 발에 잘 맞는 하이컷 신발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소 옆에서 출발하는 길은 초보자도 쉽게 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니 로우컷 트래킹화를 신을까 싶기도 했으나 안전이 검증된 선택지에 더 마음이 갔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날 최고의 결정이 되었다. 관악산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야말로 지옥 같은 돌길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가파른 경사가 아무렇게나 생긴 돌과 바위로 가득해서 매 걸음마다 고심해서 디뎌야 하는 순간이 이어졌고, 운동화를 신고 온 친구 둘이 낙오되었다. 나도 섣불리 운동화를 신었거나 발에 익지 않은 등산화를 신었다면 연주대까지 오르진 못했으리라. 천만다행으로 모험을 포기하고 고른 부츠는 비브람 크리스티 웨지솔이었던 덕분에 내 발을 적절히 보호해주었고, 나는 다음날에도 발바닥만은 멀쩡하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었다. 종아리와 허벅지는 오래도록 당겨서 고생을 했지만……(종아리에 아대를 단단히 감아 고통을 줄였다).
그러나저러나 이제 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듯한 산 정상의 기쁨을 알았고, 빼어난 장비의 소중함도 발견했다. 그리고 여러 산을 다녀본 사람들이 적어놓은 등산 난이도는 한국인들이 말하는 매운맛과 비슷해서 도무지 믿을 게 못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등산이란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되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이 분야의 모든 부분에서 믿을만한 객관적 수치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수라의 길에서 환자가 건강히 살아남으려면 내 몸에 꼭 맞고 좋은 장비를 구비하는 수밖에 없다. 10월중에는 만족할 만한 등산화를 기어코 발굴해낼 작정이다.
(이 글을 쓰는 중간중간 등산화와 후기 따위를 뒤적이느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추신
클라시코의 목토 부츠는 실밥이 한 칸 풀렸다. 이를 붙인다고 순간접착제를 썼다가 얼룩이 번지는 바람에 순간접착제 제거제로 순간접착제 얼룩을 지우고, 제거제 자국을 알코올로 또 지워야 했다. 이게 다 무슨 짓이란 말인가…….
정보를 기대했는데 넋두리만 본 분들께 미안해서 추가로 간략히 정리한다.
등산화는 발의 실제 길이보다 10밀리 이상 큰 사이즈가 좋다. 안 그러면 하산시 발가락이 계속 찍힌다. 심하면 발톱이 뽑히니, 단단히 조여 신고 앞코를 찍어도 발끝이 닿지 않는 사이즈가 안전하다.
한국 산은 어디든 화강암이 많고 계곡도 종종 있어 접지력이 중요하다. 부틸고무가 70퍼센트 이상 들어갔다고 하면 믿을 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틸고무 함량이 높으면 저온에서 경화되어 접지력이 떨어진다. 이름이 붙은 밑창 중에 유명해서 구하기 쉽고 좋은 평이 많은 것들은 캠프라인 릿지 엣지, 비브람 메가 그립, K2와 아이더의 엑스 그립, 컬럼비아의 옴니 그립, 블랙야크의 Y5다. 릿지 엣지는 접지력이 아주 빼어난 대신 겨울에 약하고, 메가 그립은 접지력이 그보다 덜한 대신 성능 저하도 덜하며 내마모도가 높다. 옴니 그립은 비교적 저렴한 모델에도 붙어 나오지만 컬럼비아가 창갈이를 해주지 않는다. 트렉스타의 하이퍼그립은 물기만 조심하면 훌륭하다는 평이 있기도 했으나 더할나위 없이 개선되었다고도 한다. 근래 모델 중 부틸고무 100퍼센트가 들어간 게 있다는 정보 외에 객관적 데이터나 비교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방수투습 소재는 고어텍스부터 시작해서 대단히 많은 종류가 나와 있지만 성능 알기가 힘들다. 특출나게 비싸지 않은 제품중에서 단순 성능으로 고어텍스를 이길 소재가 별로 없다. 그나마 컬럼비아의 아웃드라이(옴니테크 아님)가 무난한 가격대에서 고어텍스보다 투습도가 약간 높다. 내수압도는 약간 낮다. 그러나 몇 겹을 썼는지, 갑피를 매쉬로 처리했는지 가죽으로 처리했는지 등에 따라 실제 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체감 습도 문제에는 양말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는데, 발에 직접 닿는 만큼 그게 사실인 것 같다. 미군의 연구 결과에도 물집의 원인이 대개 빨리 마르지 않는 양말이라고 하니 메리노울 소재가 많이 들어간 속건성 양말을 추천한다. 믿을만한 메리노울 양말은 등산 인구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찾기 힘든데, 인터넷쇼핑몰에서 검색하면 메리노울이 60퍼센트가량 함유된 것을 15000원 내외로 구할 수 있다.
갑피(외피)는 합성 피혁이 저렴하고 가볍지만 쉽게 손상되어 보기에 흉해진다. 합피의 우레탄 코팅은 제품을 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손상된다. 가죽의 바깥면을 쓴 풀그레인은 비싸고 무겁고 잔상처가 쉽게 나지만 내구도가 높고 아름다우며 상처 커버가 수월하다. 기공이 살아있어 통기성이 있다고도 하지만 조직이 촘촘해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비싼 만큼 쉽게 난 상처에 가슴이 아파지는 건 확실하다. 겉면에 기모처리를 한 누벅과 안쪽면에 기모처리를 한 스웨이드는 적당히 튼튼하고 보기에 좋으며 잔상처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상처가 나면 복구할 방법이 거의 없고 액체에 약하며 물든 오염을 지우기도 쉽지 않다. 다이소에서 전용 지우개와 솔을 사서 써도 안되면 전용 클리너를 따로 사야 한다. 스플릿 가죽은 풀그레인이나 스웨이드보다 더 내부측 가죽으로 운동화에 흔히 쓰이는 편이며, 바깥에 코팅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등산화에선 잘 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정리한다고 했지만 확고히 신뢰할 데이터가 거의 없다. 상황따라 사람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해서 어떤 신발은 정반대 평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영어권 유튜버 Rose Anvil의 채널을 보면 인기있는 스니커즈나 부츠를 리뷰하며 부위별로 쿠션의 압력이나 탄성을 측정하는가 하면 신발을 태우거나 반으로 갈라보기까지 하는데, 등산이 압도적으로 대중적인 취미로 이어져온 나라에서 등산화에 대해 객관적이고 신뢰할 정보를 이렇게 찾기 힘들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추신
국내 유일의 기후위기 대응 매거진인 매거진 1.5도씨에서 진행한 인터뷰가 5호에 실렸습니다. 제목은 '중고 생활 20년 베테랑과 ‘새활용센터’ 가보니'로, 송파 새활용센터를 함께 둘러보고 낡은 물건 다시 쓰기와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추신
10월 매주 일요일 오전 6:50-7:00(본방). 오후 4:50-5:00, 11:50-12:00(재방) (수도권 105.3, 광주 99.9, 대구 93.1, 부산 101.1, 대전 106.3, 여수 99.5, 포항 96.9, 안동 100.7, 김천 100.5, 울산 94.3)
*추신
가톨릭 평화방송 라디오 기후특집 '공동의 집, 지구'에 출연해서 낡은 물건 쓰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피디님이 근래 녹음 중에 가장 웃겼다고 하시더군요.
10월 매주 일요일 오전 6:50-7:00(본방). 오후 4:50-5:00, 11:50-12:00(재방)
(수도권 105.3, 광주 99.9, 대구 93.1, 부산 101.1, 대전 106.3, 여수 99.5, 포항 96.9, 안동 100.7, 김천 100.5, 울산 94.3)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