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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03. 2023

나의 등산화 고민담 1

내 발에 꼭 맞고 아름다운 등산화를 찾아서



어쩌다 관악산에 가기로 일정이 정해지자, 당장 나는 답을 구하기 힘든 고민에 빠졌다. 적당한 등산화가 없는 탓이었다. 몇 켤레나 기부하고도 신발이 서른 켤레 이상 남아있는데 그중에 등산화가 없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엄밀히 따져보자면 등산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있기야 셋이나 있었다. 다만 족저근막염에 시달리던 사람이 신고 다녀도 될지 시험해보질 않아서 적당한 등산화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곧장 보유한 등산화의 검증 절차에 들어갔다. 멀쩡한 등산화를 놔두고 새 등산화를 산다는 건 금전적으로도 낭비일 뿐더러, 신발 상자 놓을 자리가 없다는 면에서도 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책장의 책을 버리고 신발 상자를 꽂는다면 공간이야 나오겠지만, 육체적 욕망이 지성을 침범하는 듯한 사태는 가급적 피하고 싶다.

(떨이로 산 클라시코 부츠(절판). 뭣모르고 샀는데 제법 빼어난 신발이었다.)

먼저 시험한 것은 등산화로 취급중인 클라시코의 누벅 부츠였다. 이것은 이랜드 산하에서 신발을 주로 파는 편집숍인 폴더에 공급된 물건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땡처리되어 8천 원에 구할 수 있었다. 신발 밑창계의 슈퍼스타인 비브람창을 채택하고 있는 데다가 가죽 품질도 만듦새도 제법 준수해서 왜 정리되었는지 의문이다.

이 부츠는 밑창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순수한 부츠라, 등산화처럼 발을 푹신하게 감싸주거나 방수투습 안감으로 발을 보호해주는 기능, 혹은 다이얼로 간편히 조여주는 기능 같은 건 없다. 덕분에 무게는 약 500그램. 부츠치곤 가볍고 적당히 편안하며 접지력이 좋아서 나는 그동안 이것을 트래킹에 쓰곤 했는데, 그것도 2019년이 마지막이라 2023년인 지금도 발에 잘 맞을지 어떨지 불안했다.


발 상태가 걱정되었던 나는 이 부츠에 비싸고 쿠션이 아주 좋은 깔창을 넣었다. 그런데 밖에 나가서 열 걸음도 떼기 전에 이상을 감지했다. 염증이 더 심한 오른발 발바닥에 힘줄이 억지로 늘려지는 듯한 통증이 감돌았던 것이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어서 급히 깔창을 교체했다. 덤으로 챙겨간 깔창은 다이소에서 파는 아치 지지형 오솔라이트 깔창으로, 쿠션은 평범하나 냄새를 잡아두며 아치도 단단히 받쳐주는 제품이다. 다이소라면 보통 품질을 크게 따질 필요가 없는 공산품을 저렴하게 파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솔라이트는 많은 고급 신발이 기본 깔창으로 채택하고 있으니 이 깔창이 품질로 아쉬울 이유는 없었다.

깔창을 바꾼 이후로는 천만다행으로 문제가 감지되지 않았다. 발은 적당히 편안했고, 대충 어디든 걸을 만했다. 보통 장시간을 걷거나 요철이 심한 땅을 걸을 때는 푹신하지 않은 신발이 좋다고 하며 족저근막염에는 푹신한 바닥이 좋다고 하는데, 비브람창을 채용한 이 부츠는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수준을 알맞게 지키고 있는 듯 싶었다. 불만을 가질 구석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범용형으로 준수한 신발이었다.

딱 하나 걱정스러운 점을 꼽자면 사이즈가 265라는 것. 평소에 신는 운동화와 같은 사이즈라 등산 양말을 신으면 내리막길에서 발끝이 조금씩 닿는 것을 확인했는데, 장시간 이런 마찰이 반복되면 물집이 잡히거나 발톱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걱정이었다. 이번에 갈 관악산 코스야 짧아서 그럴 일이야 없겠으나, 발 때문에 반 년을 고통받은 터라 위험 요소는 뭐든 다 피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더 오래전에 저장된 등산화를 시험했다. 저장되었다고 요상한 표현을 쓴 것은,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해놓은 신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체 어디의 무슨 등산화인지도 정체를 알 길이 없기에 여러모로 검색해 보니, 선실업이라는 생산 업체의 샘플격 물건인 듯했다. 비슷한 모양의 다른 모델에 달린 평이 좋았다.

(선실업의 등산화?(절판))

부츠와 마찬가지로 5백 그램 가량인 것치고 더 무겁게 느껴지는 이 미드컷 등산화는 새카만 가죽 재질에 충전재가 든든하고 다이얼로 와이어를 조여 간편히 신을 수 있다는 장점이 빼어났다. 몇 년 전까지는 방한용으로 종종 신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역시 푹신하고 좋은 깔창을 깔고 나가보니 발이 아파서 다이소 깔창으로 바꿔야만 했다.

대체 왜 비싼 깔창을 사놓고 쓰질 못한단 말인가……. 한탄은 그만두고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아마 두꺼운 깔창을 쓰면 발꿈치가 높아지면서 발이 더 휘거나 무게중심이 바뀌어 발바닥에 가해지는 부담이 심해지는 탓이 아닌가 추측한다. 단단하다고 불편한 게 아니며 푹신하다고 꼭 편한 것도 아닌 셈이다. 의자도 장시간 앉을 의자는 좀 딱딱한 게 낫다는데 같은 이치인 모양이다. 너무 편안해서 불편하다니, 인간이란 어쩌면 이렇게나 까다로운지.


다만 이 등산화도 265 사이즈가 문제였다. 특히 내리막에서 새끼발가락을 자꾸 자극하는 게 여간 거슬리지 않았다. 못 참을 지경은 아니지만 두세 시간 내내 참을 자신은 없었다. 왜 신발들을 좀더 여유있게 사지 않았을까? 후회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구두는 260을 신으니까 265도 아주 틀린 사이즈는 아니긴 했다. 아마 요 몇년 사이에 내 발이 더 길어지거나 넓어지거나 두꺼워진 것이리라. 남몰래 저지른 죄의 업보처럼 손발도 알게 모르게 살이 붙으니까 있을 법한 일이다. 나는 뒤늦게 알게된 이 작은 변화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보통 발은 걷는 일 말고 다른 작업을 하지 않으니 무디리라 생각하는데, 신발 안쪽이 2밀리만 바뀌어도 우리는 불편감을 느끼게 되어 있고, 불편함이 지속되면 어딘가는 손상될 수 있다. 아무 신발이나 대충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것은 매일 성장하고 빠르게 재생되는 10대 시절뿐이다. 20대를 벗어났다면 만 걸음을 걸어도 불편감이 없는 신발을 몇 켤레 구비해둬야 삶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설산용처럼 보이는 네파 쉐도우프로(절판))

그런고로 다음 등산화를 테스트할 차례가 되었는데…… 남은 하나는 9년 전에 저장된 네파의 육중한 하이컷 등산화였다. 진짜 중등산화는 밑창이 구부러지지도 않고 무게도 1킬로그램에 달하기도 한다니, 6백 그램을 좀 넘는 이 등산화는 좀 무거운 경등산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만, 어쨌든 초보자용 코스를 걷는 일정에 쓰기에는 분명 지나친 물건이다. 요 녀석은 이상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곧장 집어넣었다.


결국, 안심하고 신을 등산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산화 물색에 빠져들었다. 사이즈는 270에, 디자인이 아름답고, 가벼우며, 쿠션이 넉넉하고, 방수 투습 기능이 없고, 접지력은 빼어난 것으로. 다이얼 끈 방식이라면 고장을 대비해서 두 개가 달린 모델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이런 기준을 모두 충족하면서 가격도 저렴한 모델이 과연 있을까, 그런 날강도 같은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의외로 싸고 좋은 신발이 많았다. 방수 투습 기능이 없는 등산화를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너도나도 방수 투습 원단을 개발해서 탑재하는 통에 평범한 등산화는 도통 팔리지 않게 된 나머지 시장에서도 사라진 게 아닐까…….


여기서 내가 방수 투습 기능을 꺼리게 된 이유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단순하다. 고어텍스 신발을 하나 구해서 신어보니 바람은 솔솔 통하고 물만 안 들어올 듯한 광고와 달리 갑갑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물이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촘촘한 망을 두르고 있는 셈이니 공기가 잘 통할리 만무했다. 요컨대 예기치 못한 눈비를 만나는 경우나 동상 위험이 있는 한겨울을 제외하면 방수 투습 원단이 없는 게 편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 특수 원단이 들어가지 않은 등산화를 구하고 싶었던 것인데…… 상황을 보니 그 고집은 버리는 게 나았다.


문제는 고집을 버리고 방수 투습 원단이 들어간 신발을 이리저리 비교해 보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 회사에서 원단을 개발해서 넣고 자랑은 하고 있지만, 그 어떤 상품도 방수 성능, 투습 성능을 수치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해서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는 시대에 무조건 아주 쾌적하고 좋다는 광고만 믿고 물건을 고르라니, 이 무슨 연비도 모르고 자동차 고르는 소리란 말인가. 결국 유튜버나 한국소비자원이 정리한 자료를 찾거나 후기를 보고 체감이 어땠는지를 참고해야 했다.


원단뿐만 아니라 밑창에 대한 내용도 한계가 심각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제품의 광고가 ‘편안하고 안 미끄러진다’라고 엇비슷하게 떠들 뿐이고 ‘이 제품은 젖은 바위 위에선 미끄러워요’ 따위로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니 상품 소개를 보나마나 거의 쓸모가 없었다. 어머니가 낙상으로 다리가 부러져 고생하는 걸 본 이후로 접지력에 신경을 쓰려는 나로서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것도 사람들의 입소문을 보고 판단해야 했다. 국제적으로 믿을 수 있는 접지력 점수 따위가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노면의 상황이 다양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나마 믿을 만한 수치라곤 부틸 고무 함량 정도였다. 부틸 고무 함량이 높으면 젖은 바위처럼 미끄러운 표면에도 잘 붙는 한편 내구성이 떨어지고 착화감이 나빠지며 겨울에 경화되어 오히려 미끄러워진다고 하니, 특별히 암릉지대를 찾아다닐 게 아니면 70퍼센트 정도가 적당한 수치인 듯했다.


그리하여 나는 길고 긴 고민 끝에 마침 할인중인 네파의 미드컷 등산화를 구입했다. 다이얼이 두 개라 발등과 발목을 따로 조절할 수 있고 하나가 고장나도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460그램 가량으로 가볍고, 밑창도 부틸 고무 70퍼센트 가량으로 높은 접지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신어보니 쿠션과 착화감도 적절했다. 나는 이것의 사이즈가 맞는지 아닌지 이렇게도 신어보고 저렇게도 신어보고 오만가지 자료를 찾아보며 가늠했는데, 결국은 잘 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등산화처럼 혹독한 환경에서 신는 신발은 실전에 나가보기 전에 문제를 알기 어렵고, 실전에 나가보면 환불이 불가능해진다는 딜레마를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간에 그것으로 등산화 고민은 끝이 날 줄 알았는데, 동행할 후배가 산 등산화 사진을 보니 아무래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후배의 등산화는 밝은 갈색 가죽 제품으로 아주 미려하고 내 취향에 부합하는 제품이었던 반면에, 내가 산 제품은 내 취향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외형의 운동화처럼 보였던 것이다. 강동원 영화를 보고 나니 그동안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애인이 오징어로 보이더라는 얘기와 비슷한 셈이다.





*추신

가톨릭 평화방송 라디오 기후특집 '공동의 집, 지구'에 출연해서. 낡은 물건 쓰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피디님이 근래 녹음 중에 가장 웃겼다고 하시더군요.

10월 매주 일요일 오전 6:50-7:00(본방). 오후 4:50-5:00, 11:50-12:00(재방)

(수도권 105.3, 광주 99.9, 대구 93.1, 부산 101.1, 대전 106.3, 여수 99.5, 포항 96.9, 안동 100.7, 김천 100.5, 울산 94.3)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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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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