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의 수리대전쟁2

지난 줄거리: 프린터가 고장나서 손보다 잉크 누출로 난리가 남. 에어컨 누수를 잡음. 전동 칫솔이 부러짐.

긴 시간에 걸쳐 잉크 누출 사고를 수습했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는데, 프린터도 닦고, 바닥도 닦고, 잉크를 닦은 휴지를 담은 용기도 닦고, 작업에 쓴 장갑도 닦고, 슬리퍼도 닦고, 발도 닦고 손도 닦고, 세면대도 닦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도 프린터가 검은색이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잉크가 묻어 손을 몇 번이나 더 닦아야 했다. 게다가 프린터 받침으로 깔아놓은 스펀지도 빨아서 말려야 했고, 프린터를 올려놓은 선반과 선반 바퀴와 선반에 넣어놓은 상자들도 닦았고, 잉크를 모아둔 상자도 닦았다. 작업하는 내내 잉크도 이 모양인데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 누출은 얼마나 처리가 어려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덤으로 프린터를 새로 산다면 절대 검은색은 사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고.

그나저나 프린터 안으로 굴러간 카트리지 실리콘 마개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나는 손전등을 들고 한참동안 프린터를 들여다보다, 아무리 흔들어봐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소리도 나지 않는 터라 회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프린터 작동에 영향을 끼칠 자리에 없으니 찾지 못한다고 프린터가 더 고장나는 건 아니었다. 마개가 없으면 카트리지를 쓸 수 없게 되지만....... 그래서 다른 카트리지를 다시 살펴보다가, 쓰지 않는 카트리지에 같은 부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뽑아서 이용할 수 있었다. 나 원 참. 요컨대 처음부터 실리콘 마개를 프린터 안의 깊은 어둠속에서 찾아내려 하지 않고 대체품을 알아봤더라면 프린터를 뒤집어 흔들 이유도 없었고, 손이 닿은 모든 것을 닦아대는 헛짓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었다는 말이다. 적당한 포기가 아름다운 인생의 구성 요소라는 교훈이 프린터 수리 자체는 물론이고 부품 하나에도 서려 있었다.

새어나온 잉크를 거의 다 닦고 부품도 모아서 잉크를 주입한 프린터는 이제 정상 작동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헤드 청소나 상태 확인 페이지 인쇄를 할 때만 정상이고, 문서나 흑백 페이지를 인쇄하면 카트리지 인식이 안 된다고 뻗대었다. 그대로 쓰자니 문서 인쇄를 많이 하는 터라 문제가 심각한 노릇이었다. 옛날에 썼던 프린터는 검은 잉크가 고갈되면 컬러 잉크 조합으로 대체하는 기능이 있었으므로 검은 잉크 카트리지를 뽑아서 시험해보기도 했으나 이러면 카트리지가 없다고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카트리지 접촉부위를 열심히 닦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럴 경우는 카트리지나 프린터 둘 중 하나의 접촉부가 망가졌을 것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새 카트리지를 사서 끼워보는 수밖에 없는데, 굳이 실패할 수 있는 시도로 돈을 들이느니 그냥 프린터를 바꾸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판단을 하려면 정보부터 알아봐야 하는 법. 나는 일단 같은 증상을 겪는 이가 있나 검색해봤다. 오류 코드가 있는 터라 검색은 쉬웠다. 해당 문제의 원인은 내 예상대로 접촉 문제가 맞는데,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었다. 잉크 공급이 되지 않을 때도 인식 오류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잉크 공급기를 열어봤다. 검은색 잉크 통에 남은 잉크는.......작동 가능한 수위 이하였다. 잉크를 빨아들이는 바늘보다 낮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공포가 뒤섞였다. 나는 곧장 잉크 통을 채우고 인쇄를 시도했다. 그러자 프린터는 그야말로 무슨 문제가 있었냐는 듯이 작동하는 게 아닌가. 프린터를 고쳤다는 기쁨보다는 긴 시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시행착오를 반복한 원인이 이토록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잉크통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최소 수위가 생각보다 더 높았으며, 카트리지를 채워놓았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콘센트를 확인하지 않고 기기가 고장났다며 난리를 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수였다. 교훈이라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뼈아프고 굴욕적이었다.

(전원 공급이 되지 않는 전자제품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당연한 기본적 진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하여 나는 시험 인쇄로 뽑은 사진들을 코르크보드에 전시함으로써 마음을 달래고, 어쨌거나 돈은 굳었다고 기뻐하기로 하며 전동 칫솔 수리를 시작했다.

전동 칫솔 수리는 프린터에 비해 대단히 말끔하고 단순하고 부담 없는 작업이었다. 고작 3000원 짜리인데 실패한들 무엇이 두렵겠는가? 다만 원인과 증상이 또렷한 데에 비해 수리 방법은 상당히 난해했다. 중심축이 단순히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누르는 힘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조건을 이겨낼 접착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찾아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3천 원짜리 전동 칫솔을 수리하겠다고 만 원짜리 접착제를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일단 가장 단순한 방법인 순간접착제부터 써봤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떨어졌다. 그다음에는 점토형 접착제로 축 주변까지 감싸봤는데, 모양만 그럴듯하고 손으로 솔을 눌러보자마자 다시 부러졌다. 순간접착제는 뜯어내는 힘에 약해서 지름 5밀리미터의 좁은 접착면으로 칫솔 압력을 버틸 수 없었고, 점토형 접착제는 접착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압력을 버틸 구조체로 기능할 만큼 단단하지도 못했다. 원래 빈틈을 채우거나 막는 데에 특화된 제품이니까. 그렇다면 축 안쪽에 금속 심을 박는 것은 어떨까? 나름대로 그럴듯한 생각이었지만, 손잡이쪽 어디에 무슨 부품이 들어가있을지 모르는데 철사를 박아버릴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달군 철사로 리튬 이온 배터리를 찌르면 폭발할 것이다.

나는 접착에 실패한 접착제들을 모조리 긁어내면서 슬슬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3천 원짜리 물건 고치는 데에 두 시간은 쓰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해도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3천 원으로 두 달 넘게 썼으니 입문용으로는 충분히 잘 쓴 것 같기도 했다. 앞뒤 없이 모든 물건을 다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결국 수리를 포기하고 한계를 인정하며 적당한 전동 칫솔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만 워낙 싼 물건을 쓴 탓에 선뜻 비싼 걸 살 수도 없었고, 어떤 기능을 써야 하는지도 잘 알 수 없어 긴 시간을 버리고도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또다시 어차피 버릴 물건이니 더 강력한 방법을 시험이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적당한 실험 기회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하여 시도한 방법은 바로 ‘순간접착제에 베이킹 소다 뿌리기‘였다. 이렇게 하면 접착제와 가루가 빠르게 굳으며 플라스틱처럼 변하는데, 접착력도 강하면서 틈도 잘 메꿀 수 있다. 꼭 베이킹 소다만 되는 게 아니라 다공질의 분말이면 비슷한 작용이 잘 일어나는 편이라 인터넷에서 흑연이나 라면가루로 흠을 메꾸는 영상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순간접착제로 축을 접착하고, 베이킹 소다를 뿌려 굳히고, 다시 접착제를 바르고 또 굳히기를 반복해서 축이 힘을 받을 때 버텨줄 수 있는 구조체를 만들었다. 한 번 실패하고 더 견고히 만든 결과 마침내 성공했다. 적당한 힘으로 사용하니 균열이 생기는 일 없이 잘 붙어 있었다. 나는 3천 원이 굳은 것보다는 알고 있던 수리 방법이 어느 정도 가혹한 환경에서도 버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게 좋았다. 옛말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짓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다. 3천 원짜리 물건 고치는 것 말고 좀더 먹고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잘 익히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지만, 적절한 접착 기술은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으니, 이것도 먹고 사는 일의 일부이긴 할 것이다.

그리하여 월말에 몰려온 문제들은 마침내 대체로 해결되었다. 에어컨 날개의 고정부가 부러진 상태지만 순간접착제와 베이킹 소다로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마침내 한시름 놓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전혀 뜻밖의 문제가 질리지도 않고 또 터졌다. 프린터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더니, 아예 켜지지 않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