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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09. 2024

북한산 숨은벽의 고요한 비경 속에서 1



도봉산 우이암까지 다녀와서 등산에 슬슬 재미가 붙은 나는 컬럼비아의 속건 티셔츠까지 구입하고 다음으로 갈 곳을 뒤적이다 북한산 맛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꼭 가봐야 할 최고의 산으로 북한산을 떠올리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서울에서 가장 높으니까 북한산 정도는 가봐야 산 타는 시늉 정도는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북한산을 오르는 몇 가지 등산로를 알아보다 한 등산로의 이름에 사로잡히고 말았으니, 그 이름은 바로 ‘숨은벽 능선’이었다. 다른 쪽에선 안 보이는 면이 여기서만 보인다 해서 숨은벽 능선이라는데, 정말이지 한때 그럭저럭 열성적인 게이머였던 사람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수수께끼의 등산로, 전인미답의 비경 같지 않은가. 물론 북한산 국립공원이 세계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공원인 만큼 숨은벽 역시 실상은 상당히 유명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길이라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디서 봤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난이도도 ‘중’이었으니 못 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관악산과 도봉산을 다 가봤으면 연습게임은 마친 셈이고, 운동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많이 하니까 자신이 있었다. 덤으로 도봉산 원통사 방면의 오싹한 길을 무사히 내려온 경험도 자신감을 더해주긴 했다.


이번 산행은 일행을 모으지 않았다. 일단 초급 코스 갈 사람도 찾기 힘든 마당에 중급 코스를 가자고 해봐야 갈 사람도 없을 게 뻔했다. 그리고 점심에 쌀밥을 먹지 않은지 8년은 된 나로서는 점심 식사를 위해 시간에 쫓겨 다니는 것도 편치 않았고, 페이스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고 싶기도 했다. 요컨대 내 마음대로 나를 경험해본 적 없는 험로에 던져보고 싶었다. 그래야 부담 없이 덤비고, 실패해도 길을 잘못 고른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게 아닌가.


그리하여 11월초, 나는 겁도 없이 숨은벽으로 출발했다. ‘숨은벽으로 출발했다’라니, 써놓고도 로망이 넘치는 말이다. 구파발에서 한참 가는 버스에는 누가 봐도 등산객인 사람들이 제법 탑승했는데, 그중 대다수가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방면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은근한 희열을 느꼈다. 남들이 다 똑같은 길을 갈 때,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있다고. 물론 남들이 모르는 곳도 아닐뿐더러 대단히 용기 있는 일도 아니니 이건 그냥 유행을 살짝 비켜가며 기쁨을 누리는 홍대병의 일종 같은 증상이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뭐 즐겨서 나쁠 건 없으리라.


곧 버스에서 내려 걷자니, 그곳은 등산객이 많이 다녀 번화한 상권 같은 건 도통 보이지 않아서 그냥 국도 도로변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이따금 보이는 상점 한두 개, 식당 두어 개만이 등산로의 분위기를 간신히 풍기고 있었다. 이곳이 들머리가 맞는 걸까...... 나는 도로에서 좀 벗어난 뒤에 곧장 등산스틱을 꺼내고 바람막이를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나는 컬럼비아의 베이스레이어 위에 조끼만 걸친 가벼운 차림이 되었는데, 이 조끼가 아주 기막혔다. 땀에 젖어 무거워지지 않을 조끼가 도무지 없었던 나는 궁여지책으로 내가 소속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조끼를 입고 나온 것이다. 노동자 연대의 조끼답게 이 조끼는 현장 노동자들이 애용하는 물건과 동일한 모양이었으니, 실용성은 만점인 한편으로 등산에 사용하기는 약간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일행이 있었다면, 혹은 패션 감각이 빼어난 세대가 가득한 관악산이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도저히 입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관악산에 홀로 왔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밤골 공원 지킴터 입구로 가는 길은 도봉산과 달리 도로에서 벗어나자마자 산길에 가까웠다는 게 은근히 매력적이었다. 조금 걷자 안내소와 입구가 나왔고, 그 옆에서 등산객들이 가방을 내려 등산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같은 길로 가는 사람이 없을 때는 없다고 좋아했는데, 사람이 보이니 보이는 대로 반가웠다. 신기한 심리다. 외국에 혼자 갔을 때 관광지에 한국인이 없으면 대단한 곳에 온 것 같아 즐거워지지만 한두 명이 보여야 마음이 놓이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숨은벽 능선으로 가는 길은 은근하다 점점 쉽지만은 않은 오르막으로 변해갔다. 나는 처음으로 등산 스틱을 사용했는데, 그동안 등산 스틱은 어지간히 험한 길이 아닌 이상 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임을 금방 알게 되었다. 다리만으로 걷다가 팔도 써서 네 발로 걷게 된 셈이라 제법 힘이 덜 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상체 근육을 없는 것보다 낫게 만들어놓고 등산처럼 험한 일에 쓰지 않으면 손해가 아니겠는가. 이날부로 나는 등산 스틱의 유용함에 매료되어 어지간한 길에는 항상 갖고 다니게 되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요령이 없고 근육도 부족한 등산 초보야말로 등산 스틱 같은 장비를 잘 챙기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것까진 좀 호들갑 아닌가’ 하고 꺼릴 게 아니라, 있으면 어쨌거나 쓸 일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좋은 것을 사두는 게 건강에 이롭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서 대충 집어온 이 헬리녹스 등산 스틱은 좌우를 합쳐 300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물건으로, 상당한 고급형 제품이었다. 이렇게 가볍지 않았더라면 갖고 다닐 마음도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나중에 더 가벼우면 좋겠다고 이것저것 찾아다니다가 적당히 싼 것을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되겠다며 더 비싸고 가벼운 물건을 샀겠지. 역시 등산용품만은 확실히 한 번에 좋은 제품을 사는 게 이중 지출을 줄이는 방법이다.


오르막이 제법 만만치 않아서 중간에 쉬면서 양갱을 먹자니 중년 부부만 세 쌍쯤 지나갔다. 등산이 제철인 모양이었다. 나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그들이 부러운 한편으로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복수의 인간이 행동을 함께하는 이상 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둘 중 한 명은 집에서 쉬고 싶었을 수도 있고, 더 쉽고 편한 데크길을 가고 싶었을 수도 있다. 좀 쉬다 가고 싶은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나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안정적이다. 아무 불화도 없고 스트레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나는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무릎이 좀 불안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나저나 무릎 통증을 줄이려고 다이소에서 한쪽에 5천 원이나 주고 산 무릎 보호대는 아주 견고한 반면에 단순무식한 네오프렌 재질이라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운동량이 많은 길에 오자마자 땀이 심하게 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이런 물건도 한번에 좋은 걸 사는 게 이득이다.


흙이 덮인 오르막과 데크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이 정도면 체력을 꽤 소모하긴 해도 중급자 코스로 분류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데크길이 끝나고 나자 당장 야생의 길이 펼쳐졌다. 심한 오르막인 것도 모자라서 바위와 나무 틈으로 한 명만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바위 사이에서 간신히 자라나느라 뿌리를 이리저리 뻗어댄 나무 때문에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나무뿌리는 미끄러지거나 부러지기 쉬우니 밟지 말라는 얘기를 어디서 본 기억이 나서 사람이 지나길 기다렸다가 간신히 통과했다. 슬슬 중급다운 길인가......라고 감탄하면서. 그러나 그건 시작도 아니었다. 곧바로 매우 가파른 바위 언덕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아차산의 바위 언덕이 좀 오르기 힘든 경사로고, 보문 능선의 언덕이 손으로 여기저기를 잡아야 오를 수 있는 장애물 지형이라면, 여기는 일반 상식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을 만큼 매끈한 경사였다. 이 언덕이 어디 가서 자기를 절벽이라고 소개해도 누가 핀잔을 주진 않을 듯했다. 요컨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지나기에 적합한 길이 아닌 듯했는데, 튼튼한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길이 맞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40에서 50리터쯤 되는 배낭을 맨 사람들이 줄줄이 난간을 잡고 그 길을 올랐다.


인왕산 정상 이후로 상체 힘을 쓰는 길을 도봉산 보문 능선에서만 살짝 맛봤던 나로서는 놀라운 한편으로 여간 반갑지 않았다. 내가 힘을 써야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야말로 등산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다만 재밌다고 신나게 타고 계속 오르기에 그 경사진 암릉길은 제법 길게 느껴졌다. 이런 길에 줄 서서 지나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다는 게, 심지어 중년층이 남녀 골고루 있다는 게 제법 충격적이었다. 등산은 지구력과 하반신 근력을 주로 쓰는 운동이라 진입장벽이 낮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험한 길을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다닐줄은 몰랐다. 그 이전에 이렇게 오랫동안 철봉을 잡고 올라야 하는 길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오르기 힘든 바위를 오를 때 비로소 걸어서 이동하는 일의 가치를 실감한다)


1시를 좀 넘긴 시각이라 경치 좋은 절벽 근처에 자리잡고 식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사흘치 짐은 들어갈 것 같은 배낭에 뭘 그렇게 넣어서 다니나 싶었는데, 상당 부분이 음식인 모양이었다. 나는 식사의 즐거움을 상당히 등한시하는 터라 김밥과 양갱과 사탕밖에 가져오지 않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여럿이 잘 챙겨 먹고 다니는 즐거움도 제법 훌륭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과학적으로 가장 행복한 일이라니까 친구나 연인들이 경치 좋은 곳에서 전신 운동을 하고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겠는가.


그러나 최소한 오늘의 내가 추구할 가치는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이 위험천만하게 벼랑 위에서 등산로로 떨어뜨린 물통을 주워주고 걸음을 재촉했다. 경사 50도는 되어 보이는 바위 언덕을 신발만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하며 지나치자, 오래지 않아서 산 기슭을 따라 만든 긴 데크 계단이 나왔다. 이전의 암릉에 비하면 데크 계단은 그럭저럭 완만해서 나로서는 드물게 반가운 편이었는데, 좌측으로 가리는 것 없이 완전히 탁 트인 풍경이 펼쳐져 하늘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관악산에서 끝없이 가파르게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며 천국의 계단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서 한 소리고, 이 세상 같지 않은 허공을 걷는 기분이라는 뜻에서는 이곳이야말로 천국의 계단이었다.


중간에 잠시 가방을 풀고 앉아 양갱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부분이 거의 다 허공이었고, 그 너머에 점차 울긋불긋해지는 산과 뿌옇게 멀어지는 산세의 곡선들이 가득했다. 산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기 시작했다. 마침 근처에 등산객이 전혀 없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먼 도로에서 차가 달리는 소리만이 바람소리의 일종처럼 아련하게 배경음이 되었다.


나는 산 위의 허공에 홀로 놓인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는 것을 알았다. 등산을 왜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거기 산이 있으니까’라는 답이 가장 유명한데,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한다고 생각했다. 훌쩍 혼자 떠나는 여행이 일상의 풍경과 인간 관계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라면, 등산은 거기서 문명 사회마저 제거하는 일이다. 남는 것은 내 몸뚱아리와, 도시의 일상 공간에선 먼 배경에 불과한 산을 걷는 일뿐이다. 이토록 단순한 행위에 몰입하며 자연의 풍경 속에 놓여진 시간 동안, 나는 오로지 육체라는 속박만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계속)


(산과 길과 몸뚱아리밖에 없는 곳에서만 느끼는 자유가 있었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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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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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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