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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02. 2024

도봉산 우이암의 기쁨과 하산의 공포



이번에는 도봉산에 가기로 일정이 잡혔다. 여러 사람 모을 것 없이 딱 세 명이, 낙오자가 생기지 않을 만큼 쉬운 길을 택해야 한다는 제약 없이 트래킹의 범위를 넘어선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멤버는 관악산 정상에 같이 간 ㄱ과, 관악산 중간에서 내려간 ㅎ으로 정해졌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인원이 줄어드니 여간 홀가분하지 않았다. 의견도 빠르게 취합되고, 체력이나 입맛도 일일이 다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특히 의견 취합이 빠르다는 건 정말 빼어난 이점이었다. 전에는 어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실컷 얘기해봤자 누가 보긴 했는지, 보고 찬성을 해서 답을 안 한 건지 반대해서 답을 않는 건지 파악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일반적인 나들이와 달리 아웃도어 활동 모임은 중도 이탈자가 생길지 고려해야 하고, 이탈자가 대기하기도 쉽지 않으니 참가자 모두의 검토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도심 한가운데서 맛집에 갔다가 몇 명은 다른 곳으로 빠지는 것과는 경우가 몹시 다르다. 그런데 체감상 그 어떤 모임보다도 더 참가자의 계획 검토가 저조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아웃도어 활동에 별 관심이 없으면 어딜 가는지 궁리하고 알아볼 의욕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의욕적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어려운 쪽으로 잡힌 코스를 보고 관심 없던 사람들이 한층 더 관심을 잃거나, 의욕적인 사람들이 이들을 놓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은 별로 재미없는 코스를 찾거나 둘 중 하나로 흘러가기 쉽다. 어느 쪽이든 행복한 흐름은 아니다. 요컨대 등산처럼 긴 시간과 체력을 소비하는 활동에선 각자의 길을 찾는 게 가장 낫다는 말이다. 한 모임에서 조를 나누는 것도 좋고.


그래서 최소화된 이번 모임은 기대가 컸고, 코스와 목적지도 대단히 부드럽게 정해졌다. 적당히 험하면서 경치도 좋고 비교적 빠르게 다녀올 수 있는 코스. 그중에서 도봉산 우이암만한 곳이 없는 듯했다. 높이 542m니까 비교적 높은 편이고, 그러면서도 등산로로 택한 보문 능선은 초보가 다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관악산 신공학관 코스처럼 더럽게 가파른데 짧고 정비가 잘 되었다는 이유로 초보 코스가 아니라, 정비도 잘 되었고 그리 가파르지도 않으며 경치도 좋아 느긋하게 걸을 만하기에 초보 코스였다. 이제 와서 일종의 원한을 품고 다시 하는 말이지만, 관악산 신공학관 코스를 등산 초보에게 권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안전한 초보 코스가 맞긴 하지만 등산의 가장 재미없는 요소를 과도하게 모아놓은 길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다리가 튼튼한데 등산 경험은 없는 사람에게나 후딱 다녀올 수 있다고 권할 만하다고 본다.


약속을 잡고 당일이 되자 나는 뭘 준비하면 좋을지 좀 헤매다 거의 신지도 않고 10년을 보관한 네파의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출발했다. 나름대로 본격적인 등산이니 본격적인 등산화를 신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드컷과 하이컷의 중간 정도로 올라오는 물건이라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신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다이소에서 산 무릎 보호대도 챙겼다. 무릎 보호대라니, 그런 물건과 인연이 생길 거라곤 상상한 적도 없는데, 주말에는 산에 가고 평일에는 자전거를 타는 생활을 하다 보니 오른쪽 무릎이 은근히 시큰대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오른손잡이답게 항상 체중을 오른쪽에 싣는다는 걸 이때 알게 되었다. 그나저나 이때만 해도 나는 일시적인 증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진통제를 먹고 있다. 잘못된 운동이 얼마나 무서운가 알려주는 산 증인이 된 셈이다.


늦게 일어나 잡다한 물건을 챙긴 탓에 도봉산역에 30분 넘게 늦게 도착했다.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누가 늦었다고 핀잔을 주지는 않기로 작정했다. 아웃도어 활동에 늦으면 남들을 야외에서 기다리게 만드는 만큼 절대 늦으면 안되겠다고도 생각했지만, 절대 늦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나저나 도봉산 탐방 지원센터로 향하는 길은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이었다. 역에서 길을 건너면 곧바로 낮은 상가가 에워싼 길이 이어지는데, 어디로 눈을 돌려도 등산용품점이 즐비해서 장비를 하나씩 갖추기 시작한 나로서는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다. 등산용품점이 아니면 거긴 음식점이나 카페였고, 이미 하산한 등산객들이 자리를 제법 채우고 있었다. 역 앞의 골목을 지나 산 입구에 바로 이어진 길로 들어서자 이 부근은 아예 아웃도어 브랜드의 대리점 천지였다. 아는 브랜드는 모조리 있을 지경이었다. 요컨대 이 근방이 죄다 등산 테마파크였던 셈이다. 고전 판타지 작품을 보면 마물이 가득한 소굴 근처에는 모험가들을 겨냥한 무기점, 주점, 여관따위 상권이 형성되는데, 그런 상권의 모습이 이런 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요 근방 구경만 해도 두 시간은 족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늦게 모여서 아직 산행을 출발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곧장 등산로로 갔다. 타임스퀘어 같은 도봉산 앞 번화가를 지나 곧바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제법 붐볐다. 우리는 안내소에서 지도를 받고 하산하기 좋은 길도 물은 뒤에 출발했다. 아주 평탄한 오르막으로 출발해서 넓고 말끔한 절들을 지난 후에 화장실을 낀 삼거리가 나왔는데, 왼쪽은 아기자기한 문이 딸린 둘레길 입구였고, 오른쪽이 보문 능선 등산로였다. 둘레길쪽이 길이 좁고 바로 산속으로 들어가는 분위기라 상당히 끌리긴 했지만 예정대로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째서 본격적인 등산로보다 조그만 둘레길의 입구가 더 매력적인 걸까? 예산 문제인지, 아니면 가벼운 운동을 즐기려는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보기 좋은 환경이 더 효과적인 탓인지 의문이다. 하기야 거친 야생을 맛보고자 하는 등산객들에게는 손대지 않은 출발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보문 능선 등산로는 초보 추천 코스답게 상당히 오랫동안 산책로 같은 길이 이어졌다. 오솔길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비포장 길이라고 할 만했는데, 너무 단조로워 심심하고 질린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서야 자연적인 바윗길이 조금 나온다 싶더니 돌을 쌓아서 만든 계단길도 나오기 시작했다. 계단길과 흙길과 바윗길 나무 블록 길이 뒤섞여 나오는 오르막은 별로 어렵지 않은 듯하면서 은근히 땀을 빼고 체력을 털어갔는데, 능선이면서도 나무가 제법 자란 편이라 경치가 좋진 않았다. 이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경치가 정말 좋은 길은 보통 나무가 우거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암석으로 된 능선길인 것 같다. 그런 길은 흙이 쌓이지 않을 정도로 치솟은 산줄기의 척추 같은 길이니 뜨겁거나 춥고 가혹하지만 그만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능선길 중간쯤 되는 곳에 약간 넓은 공터가 나와서. 우리는 잠시 앉아 숨을 돌리고 간식을 먹었다. 주변에는 커플, 부부,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아이들을 보니 확실히 초보가 올 만한 길이구나 싶었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주말에 등산로에서 아동들을 발견하면 그 길은 대중적인 초보용 코스가 맞다고 볼 수 있다. 힘들 순 있어도 대단한 경험이나 기술이 필요한 길은 아닌 것이다. 물론 북한산 백운대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백운대는 치솟은 바위를 타고 올라가기가 무서워서 그렇지 견고하고 정비가 잘 된 길이긴 하다.


나는 무릎도 약간 삐걱댔고 지치기도 제법 지쳐서 한참 늘어져 쉬고 싶었는데, 일행들이 재촉해서 금방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은 점차 험해졌고, 이윽고 갈림길이 나왔다. 그야말로 그림같은 갈림길로, 왼쪽은 험로, 오른쪽은 우회로였다. 당장 눈으로 봐도 왼쪽은 바위들을 딛고 잡으며 오르는 길이라 만만치 않은 듯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그쪽으로만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이보다 더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장면이 또 있을까? 험한 길을 선호하는 ㄱ과 나는 좌측을, ㅎ은 우측을 택해 추후에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바위를 붙들고 난간에 의지해 기어 올라가는 길은 제법 훌륭했다. 더 흉악한 길을 다녀본 지금 생각하면 입가심 정도의 험로였지만, 그때는 제법 본격적인 등산을 하는 맛이 나서 좋았다. 제법 트인 바위 위로 올라가서 광활한 도시 풍경과 가까운 산봉우리들을 보자니 바람과 함께 거대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이 순간이 바로 등산의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쥐어짠 끝에 세상이 열리는 듯한 광경을 목도하는 즐거움은 단순히 전망만 좋은 곳에선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풍경 속에 믿기 어려운 사람들 모습도 보였다. 아무리 봐도 길이 없는 봉우리 위에 자리잡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등반용 줄도 없어 더 의문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슬랩을 타는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길 같지 않은 암벽을 암벽화만으로 오르는 사람들인데, 돌산을 걷는 즐거움은 나도 짐작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시도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보문 능선 중간의 풍경. 안대를 처음 푸는 듯한 자리였다)


험로가 끝나고 곧 데크에 고무 매트를 깔아서 보강한 계단이 나왔는데, 그 길을 오르자니 우회로를 택했던 ㅎ이 오는 게 보여 연락 없이 금방 합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을 좀 오르자 우측으로 길게 뻗은 전망대가 나왔다. 거대한 바위들이 자리한 다섯 봉우리, 오봉을 중심으로 주변 산세를 거의 다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전망대답게 이 등산로에서 가장 풍경이 넓게 트여 있었다. 게다가 구조물 위라 안전하기도 해서 잠시 또 사진을 찍었다. 등산 초보에게 등산의 보상이란 무엇인가 쉽게 알려주기 가장 좋은 장소라 할 만했다.


(전망대 풍경의 일부. 붉게 물들면 말할 수 없을 만한 장관의 중심이 될 것이다)


전망대에서 좀 더 오르자 목적지인 우이암은 금방 나왔다. 주변 나무보다 약간 더 솟은 자리라 전망대만큼 트여 있진 않았지만 산세에서 이어지는 도시 풍경이 감탄스러웠다. 앉아 쉬기에도 제법 괜찮은 바위들이 있어서, 우리는 간식을 먹고 소회를 나누며 숨을 돌렸다. 이만하면 무척 만족스럽고 즐거운 등산이라 할 만했다. 이게 바로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등산 코스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영원한 데크 계단을 기어오르는 건 사양이다. 


(우이암에서 본 도시의 풍경. 산에서 보는 인간 문명은 대단한 동시에 덧없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한 시 반이라 식사 시간이 다소 걱정스럽다는 게 슬슬 문제로 떠올랐다. 과연 세 시 전에 식당까지 갈 수 있을까? 목적지 도착의 기쁨을 갈무리하고, 금방 일어나서 하산을 시작했다. 어제까진 원래 온 길 그대로를 짚어 돌아가기로 생각했으나, 이날 우리는 안내소에서 추천한 하산 코스인 ‘원통사’ 방면으로 가기로 했다. 온 길을 그대로 가는 건 좀 손해 같기도 했고, 안내소에서 추천했다면 믿을 만할 거라 생각했다. 이게 첫 번째 실수인 줄도 모르고.......


아무튼 우리는 마지막 바닥에 발이 겨우 닿을까말까한, 정비가 되긴 했으나 모델급 체형만을 고려한 듯한 우이암 바로 옆 내리막을 지나서, 올 때보다 좀 더 험하게 느껴지는 길을 거쳐, 길 하나를 목책으로 단단히 틀어막은 갈림길 아닌 갈림길에 도달했다. 거기서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길이 생각보다 험한 탓에 이게 제대로 가는 건지 의심스러워진 탓이다. 그러자 도봉산을 백 번은 다닌 듯한 느낌이 감도는 중년 남성이 어디로 가냐고 묻기에 하산 길을 물었다. 그는 지도를 보고 방향을 가르쳐주며, 처음 왔으면 두 하산길 중에서 ‘무수골’말고 ‘원통사’ 쪽을 가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그가 알려준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산에서 본 사람들이 다 친절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그러나 이게 이 하산의 두 번째 실수라는 걸 우리가 알 턱이 없었다.


이후의 하산길은 친절한 사람들이 추천한 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으로 험난했다. 원통사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은 엉망진창으로 생긴 바위가 가득했는데, 발 디딜 곳이 멀어서 아예 주저앉아 미끄러지듯 내려가야 하는 부분마저 있었다. 이런 미친 길을 가라고 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게 길이 맞긴 한 걸까? 진지하게 그런 의심도 했는데, 다른 등산객이 스틱을 짚고 척척 가는 걸 보니 제대로 온 게 맞긴 했다. 그냥 우리 준비가 부족했을 뿐이리라.


영원처럼 느껴지는 지옥의 내리막을 지나자 비로소 좀 멀쩡한 길과 데크 계단이 나왔고, 원통사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밀림을 헤치고 간신히 앙코르와트 같은 고대 유적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간신히 한숨 돌리고 원통사에 올라가 건강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상상을 초월한 험로에 기진맥진한 터라 그런 소원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현금을 갖고 오길 다행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뒤에 우이동으로 빠지는 길은 대체로 단조로운 길이었다. 숲속의 완만한 흙길이 대부분이었는데, 문제는 그쯤 되자 새끼발톱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운동화와 같은 사이즈의 등산화가 왜 위험한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는 참고 걷다걷다 지쳐서 신발끈의 발목 부분을 더 단단히 조여 묶어야 했고, 그 틈에 일행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서가고 말았다.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멈춰세우지 않은 건데, 그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덤으로 뒤에서 일행이 오는지 보지도 않고 다니는 일행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사실 나란히 걸을 수 없는 길을 빠르게 무아지경으로 걷다 보면 옆이나 뒤에 누가 있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거리를 유지하는 습관이 된 사람이나 일행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잘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와서 적절히 멈추자고 하지 못한 자신을 탓할 일이었다.


하산길이 유달리 길게 느껴진 게 내 발 때문인지, 아니면 심심한 길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기록을 확인하니 이날 우이동으로 하산해서 식당을 찾아 들어간 건 4시였다. 산을 빠져나와 식당을 찾아 다닌 시간도 제법 되니 하산에 두 시간 남짓 걸린 셈이다. 다른 산을 생각하면 무난한 수준이지만, 초보가 굶주린 채 아픈 발로 걷기엔 긴 길이었다. 덕분에 가슴속 가득했던 등산의 환희는 벌써 어디로 사라지고, 우리는 지쳐빠져 기분이 좀 상한 상태로 겨우 식사했다. 도봉산 입구쪽의 화려한 상권도 여기까지 뻗어오진 않아서 식당 찾느라 고생을 좀 한 것도 기분을 저조하게 만드는 데에 한 몫했다. 쌈밥과 막걸리를 먹고 카페에서 놀면서 다시 즐거운 고생이었다고 기억을 수정하긴 했으나, 남의 말만 믿고 코스를 바꿀 게 아니라 올라온 길 그대로 원점회귀 해야 했다는 후회는 두고두고 남았다. 등산은 하산이 더 어려운 법이라는 말을 이렇게 체험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하산은 대충 할 게 아니고, 고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일이 절대 아니라는 걸 마음 깊이 새겨두게 되었다.


그나저나 이 못된 인간들이 우리에게 왜 원통사 방면처럼 험한 길을 알려줬을까, 차라리 무수골 쪽으로 갔다면 고생도 공포도 덜하지 않았을까 싶어 의문과 원통함을 두고두고 품고 있었는데...... 며칠 전 1년만에 다시 그 방면을 찾아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엉덩이로 기어다녔던 험로는 무수골로 빠지는 갈림길이 나오기 전이라 우이암에서 그 방면으로 내려온 이상 절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번에는 큰 어려움 없이 내려갈 수 있기도 했다. 전과 달리 등산스틱을 갖고 갔기 때문일까? 그 영향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 쳐도 다리가 닿지 않는 부분은 보지 못했다. 즉, 그때는 디딜 곳을 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등산의 경험치라면 단순히 체력과 그 배분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딜 밟을지 걸음 하나하나 정하는 게 모두 경험이었다. 1년간 너덜길과 험로를 다니며 늘어난 게 욕만은 아니었다. 사소한 고생의 반복이 무의미한 것 같아도 이렇게 내 몸 어딘가에 가치 있는 형태로 쌓인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는 구석이 있다.


한편으로 무수골 방면은 우이동으로 빠지는 길보다 확실히 좀 험하긴 했지만 초보도 천천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계곡물을 두어 번 건너다니며 내려가는 길이라 상쾌하고 재미도 있었다. 심지어 산에서 빠져나간 뒤에도 보기좋게 정비된 우이천을 보며 걷는 길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이렇게 아담한 시내를 가까이 두고 살면 우기가 아닌 이상 매일 산책길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요컨대 안내소에서는 우리를 약간 과대평가했고, 고수 아저씨는 약간 과소평가한 셈이다. 이렇게 수준에 맞는 코스를 정하는 건 여간 중요하지 않은데, 수준이란 실제로 길을 경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여러 의견을 확인할 수 있는 커뮤니티 따위 방법을 통해 사전 조사만이라도 성실하게 하고 다닐 일이구나 싶다. 산은 등산의 환희만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줄 고난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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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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