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에서 등산의 맛을 살짝 본 뒤로, 나는 다른 것보다 등산화 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일단 관악산에 다녀온 다음날 다리가 좀 아팠기 때문이다. 특히 종아리가 많이 당겼는데, 발목을 잘 붙잡아주는 신발을 신으면 종아리 대신 허벅지 근육을 쓴다고 하니 힘없는 누벅 부츠보다는 발목이 두껍고 빳빳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게다가 하산하던 와중에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이 살짝 바깥으로 휘청하기도 했으므로 높은 등산화는 필수적인 듯했다. 겨우 나은 족저근막염이 도질 수 있다는 공포도 등산화 탐색의 핑계가 되었다.
그렇다면 갖고 있던 네파 등산화로 만족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그 등산화는 너무 크고 둔탁했고 오래된 물건답게 무의미한 장식이 과해 다소 유치해 보였으며, 무엇보다 사이즈가 265로 운동화 사이즈와 동일한 탓에 깔창을 두꺼운 것으로 바꾸고 양말도 두꺼운 등산 양말을 신으면 새끼발가락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큰마음을 먹고 네파에서 또다시 할인 중인 등산화를 샀다가, 후배가 신고 왔던 클래식한 디자인의 등산화에 비하면 역시나 너무 아동용 운동화 같은 느낌이 든다는 생각에 반품해버리고 말았다. 등산화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당연히 성능이지만,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등산 자체가 내키지 않게 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새로 산 등산화에서 발목을 조이는 보아핏 시스템이 연결된 부위가 인조가죽이라 시간이 지나면 코팅이 벗겨져 아주 추해질 게 뻔했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고.
그런데 여기서 잠깐 네파를 위해 이로부터 훗날의 얘기를 첨언하는데, 이 오래된 네파의 등산화, 쉐도우 프로는 한 번 두 번 버티며 신다 보니 밑창 성능도 아주 마음에 들고 직접 손보다 보니 정이 들기도 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등산화가 되고 말았다. 사람 인생도 그렇지만 물건의 생애도 모를 일이다.
그 뒤로는 어째서인지 집에 처박혀 있던 경찰 기동화를 시험하기도 하고, 나이키 에어포스 미드 모델의 밑창을 개조해보기도 했는데, 당연하게도 등산화를 사는 게 가장 낫겠다는 결론만 얻을 수 있었다. 수많은 회사들이 내구도와 접지력을 모두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연구비를 들이고 있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등산화에 버금가는 신발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아름답고 편하고 튼튼하고 접지력이 좋으면서 가격도 싼 등산화’라는 유니콘을 찾아 헤매던 나는 당근에서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라는 등산화를 구하고야 말았다. 잠발란은 아름다운 통가죽 등산화를 만들기로 아주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이니, 등산에 대해 아는 거라곤 철자밖에 없는 초보에겐 약간 과했던 셈이다. 물론 초보라고 고급스러운 제품을 쓰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잠발란에서 주로 채택하는 밑창은 아주 견고한 한편으로 한국의 돌산, 그중에서도 아주 매끈해진 암석에는 다소 취약하다는 평이 많았으니 요령이 별로 없는 초보에게 최적이라곤 할 수 없었다. 아마 이때 내가 홀릴 만큼 아름다운 국내사의 등산화를 찾아냈다면 이중 삼중 사중으로 이어지는 지출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대체로 이상적인 듯한 등산화를 구했으니 산으로 나서야 했다. 다음 코스는 포기자가 나오지 않게 둘레길로 정했다. 서울 둘레길 관악산 코스. 지금은 호암산 12코스로 개편된 길로, 관악산 입구에서 시작해서 석수역으로 빠지는 코스다. 둘레길 중에선 중급에 속하지만, 아무리 초보라도 둘레길 초급 코스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건방진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악산 때와 한 명이 바뀐 멤버로 관악산 공원 입구에서 집합한 우리는 적당히 마음편히 걷기 시작했다. 공원의 아침은 맑고 평화로웠고, 새로 장만한 등산화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평탄하고 안온한 길을 걷다 지도를 확인하니 몇 분 전에 슬쩍 보고 지나친 경사로로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둘레길’의 이미지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나름대로 험해 보이는 길이었다. 둘레길이라면 말끔한 오솔길이나 데크길, 혹은 적당한 바위들을 깔아서 만든 계단길 정도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약간 험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안 지치고 계속 걸을 수는 없을 정도로 오르막이 이어졌고, 걷다가 문득 내려다보니 등산화의 앞코에 어느새 생긴 생채기들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 정도로 거칠기도 했다. 또다시 길을 너무 얕잡아본 셈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에너지를 불태워 거친 산을 오른 끝에 드넓게 펼쳐진 세상을 보는 등산의 맛을 한 번 본 나로서는 꽤 심심하고 길기만 한 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아파트 비상구 계단처럼 볼 것도 없고 재미도 없는 길은 아니었다. 제법 험하게 느껴진 초입 구간을 지나고 나니 그럭저럭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오솔길이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숲의 종족이 만든 듯한 데크길과 오두막, 넓은 숲을 지났다. 쭉 곧게 뻗은 침엽수가 가득한 숲은 야생의 성전처럼 맑고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 사찰도 하나 지났고, 천주교 순교자들의 묘소도 지났다. 코스의 최고점인 호압사에 도착하니 사람도 많고 쉴 자리도 꽤 있기에 앉아서 숨을 돌렸다. 좀 더 경관이 아름다운 시기에 와서 여유롭게 역사적 의미를 곱씹으며 구경하면 좋을 코스였다.
그러나 이미 한 시 반을 넘긴 시각이라 우리는 느긋하게 보낼 여유가 없었다. 식사를 대신할 음식을 가져온 게 나밖에 없었던 터라 모두 주린 배를 쥐고 숲속을 헤매는 산짐승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산책로라고 하기엔 힘든 길을 오래도록 걸을 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게 이번 모임의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30분 안에 상점으로 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선다면 먹을 것, 마실 것 하나씩은 갖고 다니는 게 이로울 모양이다. 무거운 게 싫다 해도 스마트폰이 낡으면 보조배터리를 갖고 다닐 수밖에 없듯이 노화로 에너지 용량이 떨어지면 먹을 걸 갖고 다녀야지 어쩌겠는가.
호압사에서 천천히 내려가는 길은 흔히 볼 수 있는 뒷산 산책로보다 더 편한 길이었다. 모조리 데크길이었다. 나무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살랑이는 아래서 산기슭을 따라 완만히 이어지는 나무 데크길을 경쾌하게 걸어내려가는 맛은 편하고 쾌적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한참 걷자니 좋긴 한데 재미는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마치 운동하겠다고 자전거를 타고 나서서 한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만 달리는 격이었다. 열심히 올라왔으니 대가없는 쾌락을 누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자극 없는 활동을 지속하고 싶진 않았다. 지독하게 오르기만 했던 관악산의 계단길이 고난이었던 것처럼 편하게 내려가기만 하는 이 데크길의 지루함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역시 고난과 보상이 잘 뒤섞인 길이야말로 내 취향에 맞는 길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평탄한 길을 걸어 메마른 호암산 폭포를 본 뒤에, 데크길 옆으로 빠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큰길로 나갔다. 길이 아무리 편해도 거기서 나가지 않으면 온 만큼을 더 걸어야 할 판이었으니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시기가 좋지 않아 인공폭포의 터 보다는 전통 등을 모티브로 만든 엘리베이터가 더 볼만했다. 마치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작된 롤플레잉 게임에 등장하는 순간 이동 장치 같은 엘리베이터였다.
큰길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대입구 부근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노는 것으로 이번 모임은 끝났다. 나는 제법 아쉬움을 느꼈다. 이번 모임도 즐겁긴 했지만 내가 바라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길이 볼 거리도 스릴도 부족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나의 등산화, 잠발란 울트라라이트는 사이즈가 문제인지 푹신한 신발에 익숙한 내 발이 문제인지 영 편치 않았을 뿐더러 쉽게 상처나는 게 안타까웠다. 나는 다른 등산화를 구하고 좀 더 재미있는 코스를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더 열심히 알아보면 완벽한 등산화도 찾을 수 있고, 일행과 나 모두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코스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이 모두 틀렸다는 걸 나는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된다.
*교훈
둘레길 난이도도 천차만별이니 잘 알아보자.
도심을 떠나면 식량을 잊지 말자.
길들지 않은 신발을 신고 처음으로 장시간 걷는 건 위험을 동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