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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18. 2024

누가 관악산을 쉽다고 했나 2



운동 기구 중에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물건이 있다는데, 계단이 끝없이 돌아가는 그 물건이 얼마나 과격한지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관악산의 계단이 여느 운동기구 못지 않게 가혹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처음 오르던 그 때는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층계참을 만들어 다리를 쉬게 하는 도시의 계단과 달리 산속의 데크길은 사다리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관악산 연구소 코스의 평균 경사도는 어지간한 험산 못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마 이 산 저 산 다녀본 지금 봐도 끔찍해 보이리라. 그러나 계단은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장점이 있는 터라 나는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달래며 간신히 데크길의 계단을 다 올랐고, 그 뒤엔 평범한 돌길을 걸으며 행복감을 느꼈다. 어지러운 돌길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 줄이야.


그러나 그와 별개로 지도상의 등산 진행도가 절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황당했고 대체 어딜 어떻게 더 걸어야 정상이 나오나 싶어 망연하기도 했다. 산에서 기대할 만한 전망이라곤 도통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고통스러웠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관악산의 이 코스는 길이 잘 정비된 최단코스일 뿐이고 전망은 전혀 없는 터라 그렇게 훌륭한 등산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짧은 길을 빠르게 다닐 수 있어 하산 코스로 애용된다고 한다. 실제로 그날 완벽한 등산 태세를 갖춘 등산객들이 등산 스틱을 짚어가며 산을 내려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집에 몇 개나 있는 등산 스틱을 가져오지 않은 것도 제법 후회했다.


어쨌거나 미친듯이 치고 올라가는 코스가 끝나긴 했으니 다소 여유를 찾고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자, 마치 무슨 롤플레잉 게임의 상인처럼 아이스박스를 놓고 음료와 아이스크림 따위를 파는 사람이 보였다. 우리는 짧은 논의 후에 냉동된 생수를 사서 조금씩 나눠 마셨다. 등산 생초보답게 물도 여유롭게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이제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가 레벨 3 이상은 되어야 할 던전에 가면서 회복약은 하나면 되겠지, 하고 출발한 셈이다. 그러니 이런 등산로 입구에는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엄밀히 작성된 준비물과 가이드라인 게시물 따위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우리는 냉수로 열을 식혀가며 갈림길 중에 올라가는 쪽을 택해서 다시 걸었다. 제법 넓은 바위 지대가 나왔고, 적지 않은 등산객이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거기서 어디로 더 가야 할지 길을 알 수 없었다. 저 멀리 정상과 기후 연구 시설 같은 것도 보이고, 이곳과 그곳 사이가 아주 뾰족한 능선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사람 다닐 길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나?


그런데 사진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잠깐 숨을 돌리자니, 등산 깨나 한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뾰족한 능선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발 디딜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좁고, 여차하면 좌우로 굴러떨어져 시체도 찾기 힘들 것 같은 그 능선을 몇몇 사람들은 태연히 걸어다니고 있었다. 아니, 이게 정말 길이 맞단 말인가, 아니면 길이 아닌데 길처럼 쓰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 우리는 포기하고 하산하기로 결정했는데...... 갈림길로 다시 내려가서 보니 팻말에 정상인 연주대 방향은 다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올라갔던 방향에는 아무 표식도 없었다. 남들이 많이 가기에 무심코 따라갔는데, 그쪽은 권장되는 정규 탐방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 참,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까딱했다간 남들 따라 지옥문으로 들어갈 판이다. 나는 그 험한 길 쪽에도 팻말을 제대로 세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길은 길이 맞다고 권하기엔 너무 험하고, 가지 말라고 막아버리기엔 갈 만도 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편안한 정규 등산로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험한 능선 옆으로 약간 내려가서 잘 정비된 길로 천천히 올라가는 코스였는데, 걷다 보니 그늘도 적당히 있고 한쪽으로 경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편적으로 초보가 떠올리는 등산의 풍경에 어울리는 길이었다. 게다가 오래지 않아서 산 정상 바로 옆의 암벽 위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사찰, 연주암이 보이는 전망대도 나왔다. 슬슬 경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등산이구나 싶었다.


결국, 우리는 마침내 관악산 정상에 올랐다. 드넓은 정상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줄서서 음료 따위를 사 마시는 노점상이 나오는 통에 문명을 떠나 자연의 한 부분을 정복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정상석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정상을 이루는 뾰족한 암석지대 한쪽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며 나름대로 험한 산세와 먼 서울의 풍경을 보니, 너덜너덜하게 지치긴 했어도 어쨌거나 지지 않고 이 난관을 극복하긴 했다는 달성감이 들었다. 뒷산을 돌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달성감이었다. 산에는 정상이라는 명확한 형태의 목적지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라는 보상이 또렷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상석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 보상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이렇게 긴 시간에 걸쳐 과격하게 몸을 쓰는 활동을 휴일에 남의 강요로 끌려나와 하게 되면 분노와 원한으로 피가 끓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컨대 모든 활동이 개인의 성향과 신체적 조건, 다양한 상황에 따라 보상과 대가의 크기가 저마다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등산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자진해서 고행하고 보상을 향유하는 광경)


그래서 나는 어땠는가 하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이후로 허겁지겁 하산해서 각종 중화요리와 고량주를 즐기고 보드게임을 했으면서도 관악산 정상의 광경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충격적인 경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좀 더 일찍부터 적당한 산을 좀 돌아다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몸 쓰는 여가는 하루라도 젊을 때 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는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등산화를 찾아대며 아웃도어 모임을 열성적으로 주최하기 시작했으나, 이것이 시작조차 아니었음을 이때의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교훈

-관악산 쉽지 않다. 쉽다는 건 여기저기 다녀본 사람의 평이다. 초보라면 초보의 평을 찾자.

-구성원의 체력과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계획을 짜자.

-등산화는 호들갑이 아니라 안전 장비다. 차에서 안전 벨트 매는 것을 호들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산에는 등산화를 신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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