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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코드·글·그림, 같은 시작점에서

by jeromeNa

빈 화면 앞에 앉아 있습니다. 깜빡이는 커서가 심장박동처럼 리듬을 새깁니다. 코드 에디터일 수도, 워드프로세서일 수도, 그래픽 툴의 새하얀 캔버스일 수도 있습니다. 형태는 달라도 그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하나로 모입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이 공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닙니다. 가능성의 씨앗이 심어질 토양이면서, 동시에 첫걸음을 떼기 전의 망설임이 머무는 곳이기도 합니다.


개발자로 일하며 코드를 작성할 때면, 첫 함수를 선언하는 순간의 망설임과 마주합니다. 글을 쓸 때도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펜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그림을 그릴 때는 첫 선을 어디에 그을지 한참을 고민합니다. 이 세 가지 창작 행위는 겉보기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코드는 논리의 영역이고, 글은 언어의 영역이며, 그림은 시각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한 겹 더 들어가 보면, 이들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뿌리를 공유합니다. 빈 공간에 의미를 심고, 보이지 않던 생각에 형태를 입히며, 머릿속 아이디어를 손끝으로 끌어내는 작업입니다.


코드를 작성하는 과정은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설계하는 모습은 건축가가 도면 위에 선을 긋는 것과 닮았습니다. 전체 구조를 머릿속에 펼쳐놓고 각 부분이 어떻게 맞물릴지 그려봅니다. 함수 하나하나는 벽돌처럼 정확한 자리를 찾아야 전체 프로그램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은 생각의 벽돌이 되어, 하나하나 쌓아 올려 의미의 건축물을 만듭니다. 논리의 흐름이 끊기면 독자는 길을 잃고, 전하려던 메시지는 허공에 흩어집니다. 그림은 더욱 직관적으로 다가옵니다. 구도는 일종의 알고리즘처럼 시선의 경로를 설계하고 균형을 잡습니다. 색의 조화는 변수들이 서로 호응하듯,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체의 분위기를 빚어냅니다.


창작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도 서로 통합니다. 코드를 작성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버그와 씨름하고, 글을 쓰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의도와 어긋난 결과물 앞에서 한숨을 쉽니다. 하지만 이 좌절의 순간들이 창작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입니다. 실패는 종착점이 아니라 더 나은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코드의 오류를 찾아 고치는 디버깅처럼, 글에는 퇴고가 있고 그림에는 수정과 덧칠이 있습니다. 모두 작품의 완성도를 한 단계씩 끌어올리는 반복의 여정입니다.


버전 관리라는 개념도 세 영역을 관통합니다. 깃(Git)으로 코드의 변경 이력을 차곡차곡 쌓듯, 글도 초고에서 시작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최종본에 이르고, 그림도 스케치에서 밑그림을 거쳐 채색까지 단계별로 모습을 갖춰갑니다. 협업의 방식 역시 비슷한 결을 지닙니다. 코드 리뷰에서 동료의 날카로운 시선을 빌리듯, 글은 편집자의 손길을 거치고, 그림은 크리틱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얻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은 깊이를 파고들게 하고, 함께하는 시간은 시야를 넓혀줍니다.


창작의 여정은 크게 세 개의 물결로 흐릅니다. 기록, 성장, 그리고 공유입니다.


첫 번째 물결인 기록은 창작의 시작점입니다. 빈 화면에 찍은 첫 점, 흰 종이에 남긴 첫 획, 캔버스에 그은 첫 선은 단순한 흔적이 아닙니다. 창작자가 '여기 있었다'고 말하는 존재의 증명입니다. 개발자가 남기는 커밋 로그 하나하나는 코드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와 맞서던 시간이었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던 순간이었으며, 더 나은 구조를 향해 내디뎠던 발걸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물결인 성장은 창작을 밀고 나가는 엔진입니다. 실패와 성공이 교차하고, 혼자만의 고민과 타인과의 대화가 섞이며, 창작자는 조금씩 자신의 경계를 넓혀갑니다. 오류투성이 코드에서 얻은 교훈이 다음번엔 더 탄탄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거절당한 원고의 쓴맛이 더 깊은 글을 쓰게 하며, 외면받은 그림이 새로운 화법을 찾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 순환 속에서 창작자는 서서히 자신만의 언어를,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갑니다.


세 번째 물결인 공유는 창작이 완성되는 지점입니다. 코드를 오픈소스로 공개하는 일, 글을 세상에 내놓는 일, 그림을 타인의 시선 앞에 거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것이 누군가의 일상과 만날 때, 예상치 못한 연결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몇 줄의 코드가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 편의 글이 낯선 이에게 위안을 건네며, 한 장의 그림이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창작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과 만나는 접점이 됩니다.


창작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개발자가 코드를 짜며 자신의 사고 체계를 들여다보듯, 작가는 글을 쓰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렌즈를 만듭니다. 이 과정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코드, 글, 그림은 창작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지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 연재이 담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과정입니다. 창작은 선택받은 소수의 특권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면, 그것이 코드든 글이든 그림이든, 누구나 창작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거창한 도구나 화려한 재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 한 줄의 코드, 단 한 문장의 글, 단 하나의 선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작은 시작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자신만의 길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같은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빈 화면, 빈 종이, 흰 캔버스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첫걸음을 떼기 전의 떨림은 여전하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도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창작은 나와 세상을 잇는 다리이자, 스스로를 만나는 여정입니다. 이 연재가 그 길 위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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