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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쌓이는 기록

나를 만드는 흔적

by jeromeNa

창작의 본질은 순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시작이 아니라, 그 시작이 반복되어 남겨지는 흔적들입니다. 매일 아침 노트북을 열면 어제의 코드가 그대로 기다리고 있듯, 기록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지점이며, 시간의 층위가 쌓여가는 지층과도 같습니다.


처음 변수 하나를 선언했던 날을 떠올려봅니다. 'String a = "Hello World"'라는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순간부터 무언가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줄의 코드가 두 줄이 되고, 함수가 되고, 모듈이 되어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코드는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를 넘어 나의 사고방식을 담는 그릇이 되어갔습니다.


'오늘은 비가 왔다'는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한 일기는 어느새 수십 권의 노트를 채워갔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날씨 기록이었던 것이 점차 감정을 담게 되고, 생각을 풀어내게 되고, 결국엔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렌즈가 되었습니다. 삐뚤빼뚤했던 첫 스케치의 선 하나는, 지우개로 지웠다가 다시 그었던 그 부끄러운 선은, 이제 나만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남기는 작은 흔적들은 모여서 곧 '나'라는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패턴


기록은 쌓이는 순간부터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단독으로는 미약했던 조각이 누적될수록 하나의 패턴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마치 점묘화처럼, 하나하나의 점은 무의미해 보이지만 충분히 쌓이면 형태가 보이고 그림이 완성됩니다.


코드를 짜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변수명을 짓는 방식, 함수를 구조화하는 스타일, 주석을 다는 습관. 이런 작은 패턴들이 모여 코딩 스타일이 됩니다. 처음엔 다른 개발자의 코드를 따라 했지만, 수백 개의 파일을 만들어가며 어느새 나만의 문법이 생깁니다. 여러 날에 걸쳐 쌓이는 커밋 기록은 단순히 기능의 변화만 담는 것이 아닙니다. 개발자의 성장 곡선과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까지 고스란히 드러내는 하나의 궤적을 만듭니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감정을 적은 짧은 일기, 사소한 장면을 묘사한 문장, 지워졌다가 다시 고쳐진 단락들. 이것들이 쌓이면 그것은 단순한 글의 모음이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가 됩니다. 문장을 시작하는 방식, 단락을 나누는 호흡, 쉼표를 찍는 리듬. 이 모든 것이 쌓여 문체가 됩니다. 문장의 길이, 단어 선택, 호흡의 간격은 그 사람만의 언어적 지문이 되어, 기록자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증표가 됩니다.


그림 또한 흔적의 축적 위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듭니다. 수많은 스케치북 속 낙서들은 겹겹이 쌓이면서 비슷한 형태가 반복되고, 특정한 색감이 자주 나타나며, 자신만의 구도가 드러납니다. 화가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 흔적의 반복이 곧 '스타일'이 됩니다. 처음엔 대상을 똑같이 그리려고 애썼던 흔적들이 점차 단순화되어 가고, 결국 몇 개의 선만으로도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발전합니다. 이 변화의 궤적 자체가 성장의 증거이며, 나라는 창작자의 역사입니다.


실패의 흔적이 가르쳐주는 것


중요한 것은, 흔적은 단순히 '성과'를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한 코드, 지워버린 문장, 미완성의 드로잉이 쌓일 때 진짜 기록이 됩니다. 그 흔적들이야말로 창작자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Git의 커밋 히스토리를 보면 실패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버그 수정', '글자 수정', '이전 코드로 원복' 같은 메시지들이 즐비합니다. 처음엔 이런 흔적들이 싫었습니다. 완벽한 코드는 아니더라도, 버그라는 이력을 남기는 게 싫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장의 증거임을 압니다. 완벽한 코드를 한 번에 짜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완벽한 코드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수정하고, 개선하고,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쓰는 과정을 거쳐 좋은 코드가 탄생합니다.


쓰다가 찢어버린 원고들, 그 잔해들도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느 부분이 막막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버려진 문장들 속에서도 때때로 보석 같은 표현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쓰다 만 글도 따로 모아둡니다. 언젠가는 그 조각들이 모여 새로운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퍼즐 조각처럼, 지금은 맞지 않아 보이는 조각도 언젠가는 딱 맞는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망가진 드로잉, 비율이 맞지 않는 인체 스케치, 원근법이 틀린 풍경화. 이 모든 '실패작'들이 다음 그림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오히려 실패한 부분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을 때 다음에는 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완벽하지 않은 그림들의 누적이 결국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줍니다. 실패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계단입니다.


시간의 깊이를 담은 거울


기록을 돌아보는 일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거울과는 다르게 시간의 깊이를 담고 있는 거울입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시에 비춰볼 수 있는 특별한 거울입니다.


코드 리뷰를 하다 보면 몇 달 전에 작성한 코드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걸 짰다고?' 하는 의문과 함께 때로는 감탄하기도, 때로는 당황하기도 합니다. 이런 낯선 만남이 자기 객관화의 기회가 됩니다. 내가 어떻게 사고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실수를 반복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제3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타인의 코드를 리뷰하듯 자신의 과거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글들을 펼치면 시간을 건너뛰는 통로가 열립니다. 작년 이맘때 무엇을 고민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무엇에 기뻐했는지. 그 기록들을 읽다 보면 잊고 있던 나를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그때의 고민이 지금은 해결되어 있음에 안도하고, 때로는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도는 자신을 발견하며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듭니다. 그 간극 속에서 변화와 성장을 발견하고, 때로는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나를 확인합니다.


스케치북을 처음부터 넘겨보면 손의 변화가 보입니다. 조심스럽고 경직되어 있던 선들이 점차 자유로워지고, 대담해지고, 때로는 과감해집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직선적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갑자기 도약하기도 합니다. 이 불규칙한 리듬이 인간적인 성장의 모습일 것입니다. 기계적인 발전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의 성장처럼 굴곡이 있고 호흡이 있습니다.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닙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며,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어렴풋이 감지하게 됩니다. 과거의 패턴을 보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반복되는 실수를 발견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계획합니다.


기록이 만드는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기록 속에 있습니다. 내가 작성한 코드의 스타일,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 구조, 반복해서 그리는 모티프. 이 모든 것이 모여 '나'라는 창작자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개발자의 코드 로그는 그가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들이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각 커밋은 건물의 벽돌 하나이며, 그 벽돌들이 모여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조물을 만듭니다. 누군가는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누군가는 가독성을 중시하고, 또 누군가는 확장성에 무게를 둡니다. 이런 선택들의 역사가 곧 개발자의 서명이 됩니다.


작가의 글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화석이 지층에 남아 그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과 같아서, 각 문장은 작가의 삶의 한 순간을 보존하며 그의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어떤 주제에 끌리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독자와 어떤 거리를 유지하는지. 이 모든 선택이 쌓여 작가의 목소리가 됩니다. 처음엔 모방으로 시작했더라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문체가 생겨납니다.


화가의 스케치북에 쌓인 시각적 경험과 손의 습관은 더욱 직관적으로 드러납니다. 선의 강약, 색의 선택, 구도의 취향. 같은 대상을 그려도 사람마다 다른 그림이 나오는 이유는 각자가 쌓아온 시각적 경험과 손의 습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기술의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어떤 이는 빛과 그림자에 주목하고, 어떤 이는 형태와 구조에 집중하며, 또 어떤 이는 감정과 분위기를 담아냅니다.


미완성의 아름다움


모든 기록이 완성작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진 기록들이 때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성하다 만 코드의 주석에는 그 순간의 고민이 생생하게 담겨있고, 끝맺지 못한 문장 뒤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으며, 미완성 스케치에는 완성작보다 더 역동적인 에너지가 담겨있곤 합니다.


미완성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모든 창작물은 어느 순간 '이 정도면 됐다'고 멈추는 것이지, 완벽한 완성은 없습니다. 많은 창작자들이 작품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수정하고 또 수정하다 보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붓을 놓는 순간, 키보드에서 손을 떼는 순간, 그것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여기까지'라는 결단에 가깝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되 완벽에 갇히지 않을 자유, 창작자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언제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창작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기록은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어제의 기록 위에 오늘의 기록이 쌓이고,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기록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창작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확장하고, 때로는 재정의합니다. 코드는 계속 리팩터링 되고, 글은 계속 퇴고되며, 그림은 계속 다시 그려집니다. 이 반복적인 수정의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창작의 본질입니다.


기록이 만드는 연결고리


오늘 쓴 코드는 내일의 나를 위한 편지와 같습니다. 잘 정리된 주석과 명확한 변수명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친절한 안내문입니다. 반대로 급하게 작성한 스파게티 코드는 미래의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함정조차도 배움의 기회가 됩니다. '왜 이렇게 짰을까'라는 질문 속에서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갑니다.


기록은 또한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오픈소스로 공개한 코드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블로그에 올린 글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으며, SNS에 공유한 그림은 누군가의 하루를 밝혀줄 수도 있습니다. 기록은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공동체적인 가치로 확장됩니다.


기록의 무게와 가벼움


때로는 쌓여가는 기록의 무게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수천 줄의 코드를 유지보수해야 하는 책임감, 꾸준히 써야 한다는 글쓰기의 압박, 매일 그려야 한다는 드로잉의 의무감. 하지만 기록은 의무가 아닌 선택입니다. 오늘 하루 기록하지 않아도 세상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볍게 시작하는 것이 지속의 비결입니다. 한 줄의 코드라도, 한 문장이라도, 하나의 선이라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연속성입니다. 매일 조금씩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작은 기록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디지털 시대의 기록은 물리적 무게가 없습니다. 수만 줄의 코드도, 수천 페이지의 글도 클라우드 어딘가에 가볍게 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도 시간의 무게는 담겨있습니다. 각각의 파일이 생성된 날짜와 시간, 수정된 흔적들이 모두 메타데이터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자기 자신을 설계하는 과정


결국 쌓이는 기록은 나를 만듭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은 자기 자신을 설계하는 과정입니다. 건축가가 도면을 그리듯, 우리는 매일의 기록을 통해 자신이라는 존재를 설계해 나갑니다. 때로는 설계를 수정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 그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만드는 여정입니다.


오늘의 작은 기록이 내일의 나를 만들고, 내일의 나를 통해 또 다른 기록이 남겨집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창작자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갑니다. 코드, 글, 그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정의하는 이야기이며,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흔적입니다.




매일 쌓이는 작은 흔적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갑니다. 그 흔적들은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흐릿하지만, 모두가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냅니다. 창작자로서의 나, 그 자체를 만들어갑니다.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며, 미래를 준비하는 토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과 만나는 가장 솔직한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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