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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산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연작, 1882-1906

by jerom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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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위키백과, wikiart

산이 파랗다. 어떤 그림에서는 보랏빛이 섞이고, 어떤 그림에서는 초록빛이 감돈다. 캔버스마다 다른 색. 같은 산인데 매번 다르게 보인다. 붓질도 다르다. 초기 작품에선 촘촘하고 섬세하게, 말년에는 거칠고 빠르게. 하지만 형태는 늘 비슷하다. 불규칙한 삼각형. 평평한 대지 위로 솟은 석회암 덩어리.


폴 세잔이 생트빅투아르 산을 처음 그린 건 1882년,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린 건 1906년 10월, 죽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 사이 24년. 유화 44점, 수채화 43점. 87개의 같은 산.


왜 이 산이었을까.




1440px-Sainte-Victoire_et_Barrage_Zola_(2021).jpg 생트빅투아르 산, 위키백과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이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도시 동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생트빅투아르 산이 있다. 높이 1,011미터. 프로방스를 가로지르는 석회암 산. 고대 로마인들이 이름 붙였다. '성스러운 승리의 산.' 기원전 102년, 마리우스 장군이 게르만족을 물리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세잔은 이 산을 어릴 때부터 봤다. 콜레주 부르봉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 에밀 졸라, 장 바티스탕 바유와 함께 산을 올랐다. 세 소년은 산 정상에서 미래를 꿈꿨다. 졸라는 작가가 되겠다 했고, 세잔은 화가가 되겠다 했다.


하지만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가였다.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길 원했다. 세잔은 1858년 엑상프로방스대학 법학과에 들어갔다. 2년을 버텼다. 1861년, 스물두 살에 파리로 도망쳤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에서 세잔은 실패를 거듭했다. 살롱전에서 낙선했고,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조롱했다.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친구들조차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1886년,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을 발표했다. 주인공은 재능 없는 화가로, 결국 자살한다. 모델은 세잔이었다. 졸라는 비망록에 "극적으로 각색된 마네 또는 세잔"이라고 적었다.


세잔은 졸라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다. 고맙다는 짧은 인사.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다. 같은 해, 세잔의 아버지가 죽었다. 유산을 물려받았다. 더 이상 돈 걱정은 없었다. 세잔은 파리를 떠나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왔다. 마흔일곱 살이었다.


고향에서 세잔은 고립됐다. 아내와 아들은 파리에 두고, 혼자 남았다. 당뇨병이 찾아왔다. 1891년, 시력이 나빠졌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심해졌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졌다. 남은 건 그림뿐이었다.




그는 매일 산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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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뷔 근처, 비베무, 레 로브에서 본 생트빅투라르 산, 위키백과


세 곳에서 주로 그렸다. 여동생 로즈의 벨뷔 저택 근처. 비베무 채석장 근처. 그리고 레 로브 언덕. - 위키백과 참조 - 장소에 따라 산의 각도가 달랐다. 벨뷔에서는 고가철교가 중간에 보였다. 비베무에서는 붉은 바위가 전경을 채웠다. 레 로브에서는 소나무 가지가 화면을 가로질렀다.


1902년, 세잔은 레 로브 언덕에 새 작업실을 지었다. 2층 건물. 북쪽에 큰 유리창을 냈다. 햇빛이 하루 종일 들어왔다. 거기서 생트빅투아르 산이 보였다.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캔버스와 이젤을 메고 나갔다. 로브 언덕을 올라 산을 마주했다.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세잔은 편지에 썼다. "나는 자연을 통해 고전적이 되고자 한다." 1904년,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사물의 구조를 찾으려 했다. 원뿔, 원기둥, 구. 모든 자연은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된다고 믿었다.


생트빅투아르 산은 완벽한 대상이었다. 불규칙한 삼각형. 단순하지만 복잡한 형태. 빛에 따라 색이 바뀌지만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 있다.


세잔은 한 획을 긋고 몇 시간을 기다렸다. 한 획 한 획이 "공기와 빛과 물체와 구성과 테두리와 스타일"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00개의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다.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완성은 없었다. 찾는 것뿐이었다.


1895년, 세잔은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쉰여섯 살이었다. 동료 화가들이 찾아왔다. 젊은 화가들이 존경을 표했다. 피사로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세잔의 특이한 성향을 이해시키려면 수백 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잔은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엑상프로방스에 남았다. 산을 그렸다.




말년으로 갈수록 붓질이 거칠어졌다. 색이 강렬해졌다. 형태가 흐트러졌다. 1902년부터 1906년 사이, 유화만 11점을 더 그렸다. 캔버스 일부를 비워두기도 했다. 미완성처럼 보였다. 아니면 의도적이었을까. 그림의 끝이 어디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1906년 10월 15일 월요일. 세잔은 로브 언덕에 올랐다.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놓았다. 산을 마주했다. 오후에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왔다. 세찬 비가 쏟아졌다. 세잔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림을 계속 그렸다.


비에 흠뻑 젖었다. 결국 쓰러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마차에 실어 집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도 일어나 다시 나가려 했다. 몇 시간 후 다시 쓰러졌다. 이번엔 일어나지 못했다.


1906년 10월 22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67세였다.


유품을 정리하다 마지막 편지가 발견됐다. 죽기 며칠 전,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 것이었다. "나는 자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왔습니다. 나는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보고 느낀 것을 화면에 논리적으로 부연시키고자 평생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1907년 9월, 파리 살롱 도톤느에서 세잔 회고전이 열렸다. 56점. 그중 대부분이 생트빅투아르 산이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찾아왔다. 그들은 세잔의 산을 봤다. 형태가 색의 조각으로 해체된 것을. 원근법이 무너진 것을. 평면과 깊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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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위키백과

이듬해 브라크가 <에스타크의 집들>을 그렸다. 집들이 정육면체로 쪼개져 있었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했다. 입체파가 시작됐다. 세잔이 찾으려 했던 것.




생트빅투아르 산은 지금도 거기 있다. 엑상프로방스 동쪽 10킬로미터. 1989년 산불로 숲이 타버렸다. 하지만 산은 남았다. 석회암 봉우리. 불규칙한 삼각형.


87개의 캔버스 속에서 산은 매번 다르게 보인다. 파랗게, 보랏빛으로, 초록빛으로. 붓질의 방향도, 색의 강도도, 형태의 명료함도 다르다. 하지만 모두 같은 산이다.


세잔이 찾은 건 산이 아니었다. 보는 행위 자체였다. 같은 대상을 보고 또 보는 것. 매번 처음처럼 보는 것. 완성하지 않고 찾아가는 것.


24년 동안 87번. 폭풍우 속에서 쓰러질 때까지. 집착이라 부를 수 있다. 아니면 신념이라 불러야 할까. 세잔은 말했다. "생트빅투아르는 나를 이끌었다. 그 산은 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은 생트빅투아르의 의식이다."


산을 그린 게 아니었다. 보는 법을 찾은 것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오랑주리 - 오르세미술관 특별전 : 세잔, 르누아르' 전시를 하고 있다. 감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세잔 편을 작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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