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칠흑 같은 밤. 프린시페 피오 언덕 아래 사각형 등불 하나가 땅 위에 놓여 있다. 그 빛이 흰 셔츠를 입은 남자를 비춘다.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손바닥에 성흔처럼 보이는 자국. 노란 바지가 어둠 속에서 불타오른다. 268 × 347cm 크기의 이 화폭 왼쪽, 이미 쓰러진 시체들이 흥건한 피 속에 누워 있다. 오른쪽엔 총을 든 병사들이 일렬로 서 있다. 얼굴은 없다. 등만 보인다. 어깨너머로 총구가 뻗어 나온다.
한 남자가 주먹을 쥐고 처형자들을 노려본다. 수도승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눈을 가린 남자가 공포에 떤다. 멀리 어둠 속에 성당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인다. 구원은 없다. 별 하나 없는 하늘 아래, 끝없는 행렬이 언덕을 향해 걸어온다.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나폴레옹이 형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히려 하자 시민들이 왕궁 앞으로 모였다. 원래 프랑스군을 환영했던 사람들이었다. 계몽주의, 자유, 부패한 왕실로부터의 해방. 하지만 한 왕을 쫓아낸 자리에 다른 왕을 앉히려는 것을 보고 배신감이 들었다.
시가전이 벌어졌다. 총과 칼로 무장한 프랑스 근위대와 돌과 칼을 든 시민들. 뮈라 원수가 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법률이 통과됐다. "무기를 가진 자는 체포 즉시 사형." 그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수백 명이 체포됐다. 호주머니에 가위가 있어도, 손에 금속 조각이 있어도.
5월 3일 새벽,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날 언덕에서만 44명이 처형됐다. 마드리드 곳곳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
고야는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당시 62세. 1792년 병을 앓고 완전히 귀가 먹은 상태였지만 포성만큼은 느껴졌을지 모른다. 혹은 이튿날 거리를 돌아다니다 시체를 봤을지도. 확실한 건, 그가 보았다는 것이다. 궁정화가로서 왕실의 초상을 그리며 일생을 보낸 사람이, 그 왕실의 무능과 프랑스군의 야만을 동시에 목격했다.
6년 후인 1814년, 프랑스군이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했다. 고야는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프랑스 계몽주의에 호의적이었고, 판화집 <변덕>에서 스페인 교회의 부패를 고발했으며, 나폴레옹 치하에서도 궁정화가로 남아 있었다. 친프랑스 파란 의심을 받았다.
고야는 왕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전제군주에게 대항한 명예로운 민중봉기를 기념하고자 합니다." 승인이 떨어졌다. 그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쌍작으로 그렸다. 5월 2일은 시민들이 맨몸으로 프랑스군의 말과 칼에 맞서는 장면. 5월 3일은 그 보복.
전통적인 역사화는 영웅을 그렸다. 왕, 장군, 승리의 순간. 고야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그렸다. 승리가 아닌 학살. 명예가 아닌 공포.
화면 구성이 단순하다. 왼쪽엔 희생자, 오른쪽엔 가해자. 중앙엔 등불 하나. 그 빛이 모든 것을 갈라놓는다. 빛이 닿는 쪽은 인간의 얼굴이 있다. 공포, 분노, 체념, 기도.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다. 빛이 닿지 않는 쪽은 얼굴이 없다. 프랑스군은 등만 보인다. 회색과 갈색의 제복. 똑같은 각도로 총을 겨눈다. 기계처럼. 명령을 따를 뿐.
흰 셔츠의 남자가 중심이다. 양팔을 벌린 자세가 십자가형을 연상시킨다. 손바닥을 자세히 보면 못 자국처럼 보이는 표시가 있다. 그리스도의 상징. 하지만 구원은 없다. 발밑엔 이미 죽은 사람들의 피가 고여 있고, 뒤로는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이 이어진다.
고야는 "스페인의 검은색"이라 불렸다. 초상화를 그릴 때부터 배경을 검게 처리해 인물을 부각시키는 기법을 썼다. 이 그림에서 그 검은색은 하늘 전체를 뒤덮는다. 별 하나 없는 밤. 멀리 성당이 보이지만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묘지의 상징일 뿐이다.
빛은 중앙의 등불에서만 나온다. 바닥에 놓인 사각형 등불. 이 인공적인 빛이 학살을 밝힌다. 낮의 햇빛이 아니라 인간이 켜놓은 불빛 아래서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 밤의 어둠이 범죄를 감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등불이 범죄를 환하게 비춘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까지 고야가 겪은 시간들이 있다. 1792년, 콜레라를 앓고 청력을 잃었다. 그 후부터 그림이 어두워졌다. 1808년부터 1814년까지 반도 전쟁을 목격했다. 판화집 <전쟁의 재난> 80점을 제작했다. 프랑스군의 만행과 스페인군의 보복, 양측의 잔혹함을 모두 기록했다. 생전엔 출판하지 못했다. 너무 잔인했고, 너무 진실했다.
<1808년 5월 3일>은 그 경험의 정점이다. 판화가 아닌 대형 유화. 궁정이 아닌 역사. 왕이 아닌 민중. 승리가 아닌 패배. 하지만 그 패배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지켰다.
1814년 이후 고야는 왕실의 신임을 잃었다. 1820년 마드리드 교외에 집을 사서 "귀머거리의 집"이라 이름 붙였다. 벽에 <검은 그림들> 연작을 그렸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혼자 보려고, 혼자 살려고 그린 그림들. 1824년 프랑스 보르도로 망명했다. 1828년 82세로 사망.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808년 5월 3일>은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다.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이 구도를 빌렸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때마다 돌아오는 이미지. 가해자와 희생자가 마주 선 구도. 얼굴 없는 총구와 얼굴 있는 죽음.
스페인은 5월 3일을 희생자들을 기리는 날로 국경일로 정했다.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그날 새벽이 고야의 그림 속에 남아 있다. 등불의 빛, 흰 셔츠의 남자, 총구 앞의 얼굴들. 역사화가 영웅담이 아니라 증언이 된 순간. 예술이 권력이 아니라 희생자 편에 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