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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분류의 편리함, 분류의 폭력

분류가 지우는 것.

by jeromeNa

서점에 간다.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때 분류가 도움이 된다. 문학, 인문, 경제경영, 자기계발. 표지판을 따라가면 원하는 구역에 도달한다. 분류가 없다면 수만 권의 책 사이에서 헤맬 것이다.


마트도 마찬가지다. 과일, 채소, 정육, 유제품. 구역이 나뉘어 있으니 장보기가 수월하다. 병원에 가면 내과, 외과, 피부과, 정신건강의학과. 증상에 맞는 곳을 찾아갈 수 있다.


분류는 세상을 정돈한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흩어진 것을 묶어준다. 분류 덕분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원하는 곳에 도달한다.


그런데 분류의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일 때,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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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을 떠올려본다.


성적에 따라 반이 나뉘었다. 우열반이라고 불렀다. 상위권 학생들은 한 반에, 나머지는 다른 반에. 학교는 이것이 효율적인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준에 맞는 수업을 해야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류 안에서 학생들은 스스로를 '상위권'과 '그 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칸이 정해지면 그 칸에 맞는 정체성이 생긴다. "나는 어차피 이 반이니까." 그 문장이 가능성을 닫는 경우도 있었다.


분류는 효율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분류된 사람에게는 의미가 된다.




의료 현장에서도 분류는 필수적이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증상을 듣고 검사를 하고 진단명을 붙인다. 당뇨, 고혈압, 우울증. 진단명이 붙어야 치료 방향이 정해지고, 보험이 적용되고, 약이 처방된다. 분류 없이는 의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진단명을 가진 환자들이 모두 같지는 않다. 우울증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의 사연은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상실 때문에, 누군가는 관계 때문에, 누군가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 자리에 왔다. 같은 약이 누구에게는 효과가 있고 누구에게는 없다. 진단명은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 바쁠 때 생긴다. 환자가 많고 시간이 부족하면, 진단명이 그 사람 전체를 대신하기 쉽다. "우울증 환자"가 되면 그 사람의 다른 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류가 사람을 가린다.




분류의 폭력이라는 말이 과한 걸까.


물리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는 것만 폭력이 아니다. 한 사람의 고유함을 지우는 것, 복잡한 존재를 단순한 칸에 욱여넣는 것,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피가 나지 않지만,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폭력.


"너는 어떤 유형이야?"


이 질문은 호기심에서 나올 수도 있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질문 자체가 압력이 된다. 어떤 칸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력. 칸에 맞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압력. 유형이 있어야 설명이 되고, 설명이 되어야 존재가 인정받는다는 압력.


스스로 분류하는 것과 분류당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나를 어떤 유형이라고 말할 때와, 누군가 나를 어떤 유형이라고 규정할 때의 무게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지만, 후자는 때로 낙인이 된다.




통계는 분류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남성과 여성, 연령대별, 지역별, 소득 수준별. 집단을 나누고, 집단의 평균을 구하고, 집단 간 차이를 분석한다. 이것이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임은 분명하다. 정책을 만들고, 자원을 배분하고, 문제를 진단하는 데 통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통계적 분류가 개인에게 적용될 때 어긋남이 생긴다.


"20대 남성은 이런 경향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 20대 남성이 그 경향을 따르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는 평균이 아니라 개인이다. 평균은 집단을 설명하지만, 개인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통계적 분류를 개인에게 투사한다. "여자들은 원래 그래", "요즘 젊은 애들은 다 그렇지". 집단의 경향이 개인의 속성으로 둔갑한다. 분류가 편견이 되는 순간이다.




알고리즘 시대의 분류는 더 정교해졌다.


과거의 분류는 굵직했다. 성별, 나이, 직업, 거주지. 큰 범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백, 수천 개의 변수가 조합되어 미세한 분류가 가능해졌다. '30대 초반, 수도권 거주, IT 업계, 최근 운동 관련 콘텐츠 소비 증가, 늦은 밤 쇼핑 앱 사용 빈도 높음.' 이런 식의 세밀한 프로필이 만들어진다.


세밀해졌다는 것은 정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고리즘은 나를 더 잘 안다. 하지만 세밀해졌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분류다. 여전히 패턴을 기준으로 묶는 것이다. 변수가 많아졌을 뿐, 한 사람을 변수들의 조합으로 보는 관점은 그대로다.


그리고 세밀한 분류일수록 빠져나가기 어렵다. 굵은 분류는 "나는 예외야"라고 말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수천 개의 변수로 만들어진 분류 앞에서 예외를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시스템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류를 거부해야 할까.


그건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분류 없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병원에서 진단이 필요하고, 학교에서 교육과정이 필요하고, 사회에서 통계가 필요하다. 분류는 도구이고, 도구는 쓰임새가 있다.


문제는 도구가 목적이 될 때 생긴다.


분류가 이해를 위한 출발점일 때, 그것은 유용하다. "이 사람은 이런 범주에 속하는구나, 그럼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하지만 분류가 이해의 종착점이 될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이 사람은 이런 범주니까, 더 알 필요 없어."


전자는 문을 여는 것이고, 후자는 문을 닫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류한다. 외모, 말투, 옷차림, 직업. 몇 가지 단서로 상대방을 어떤 유형에 넣는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과 연결 지으려는 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그다음이 중요하다.


그 분류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그 분류를 넘어서려 할 것인가. "이 사람은 이런 유형이군"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로 나아갈 것인가. 분류는 첫 번째 질문에 답해주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답해주지 못한다.


분류의 편리함을 누리되, 분류의 한계를 잊지 않는 것.

칸을 사용하되, 사람이 칸보다 크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 균형이 쉽지 않지만, 그 균형을 잃을 때 분류는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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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찾을 때 분류는 편리하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칸에 맞지 않는다. 문학인지 철학인지 심리학인지 애매한 책들. 그런 책들은 어디에 꽂혀 있을까. 서점마다 다르고, 때로는 찾기 어렵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칸에 딱 맞는 사람보다 칸 사이에 걸치는 사람이 많다. 분류는 그 걸침을 잘 담지 못한다. 칸 안에 넣으려면 무언가를 잘라내야 한다.


분류가 지우는 것.

그것은 대개 예외이고, 결이고, 맥락이다.

바로 그것들이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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