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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맥락 없는 판단들

맥락의 증발

by jeromeNa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발행시 키워드는 누가 정하는걸까? 정작 있어야 할 키워드는 없고, 없어도 되는 키워드들만 잔뜩있는 것 같다.


몇 해 전 미국의 SNS가 한 편의 영상으로 발칵 뒤집혔다.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의 매니저가 식사를 하러 온 흑인 청년들에게 "음식값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지 않으면 주문을 받지 않겠다"며 거절하는 장면이었다. 영상 속 매니저는 단호했고, 청년들은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억울해했다. "인종차별 식당"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비난이 폭주했고, 본사는 즉각 해당 매니저를 해고했다.


며칠 뒤 반전이 담긴 후속 보도가 나왔다. 해고된 매니저는 과거에도 그 청년들이 수차례 음식을 주문한 뒤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갔던(Eat-and-dash)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종이 아니라, 상습적인 무임승차로부터 매장을 지키기 위해 결제 능력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었다. 청년들이 이전에 올렸던 SNS 게시물에는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치는 것을 자랑하는 영상들이 가득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50초였다. 그 50초 안에 매니저가 겪었던 수차례의 무임승차 피해는 없었고, 매장을 책임져야 했던 그녀의 고충도 없었으며, 계획적으로 카메라를 켠 청년들의 의도도 없었다. 남은 것은 "인종차별을 하는 매니저"와 "피해를 입은 청년들",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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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판단한다. 사람을 만나고, 상황을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린다. 판단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세상은 선택을 요구하고, 선택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판단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SNS에서 스크롤을 내리는 속도로 우리는 판단한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이 행동은 옳고, 저 행동은 틀리다. 짧은 영상, 캡처된 문장, 한 장의 사진. 그것만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다음 게시물로 넘어간다.


그 속도 안에서 맥락은 증발한다.




맥락이란 무엇일까.


어떤 말이나 행동이 놓인 배경이다.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는지, 앞뒤로 무엇이 있었는지. 맥락을 알면 같은 행동도 다르게 보인다. 맥락을 모르면 행동만 덩그러니 남는다.


"미안해."


이 한마디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미안함이 있고, 귀찮아서 대충 넘기려는 미안함이 있고, 자신이 잘못한 줄도 모르면서 상대를 달래려는 미안함이 있다. 글자는 같지만 무게는 다르다.


그런데 문자 메시지로 "미안해"를 받으면, 그 무게를 알기 어렵다. 표정이 없고, 목소리가 없고,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침묵이 없다. 글자만 있다. 우리는 그 글자를 보고 상대의 마음을 추측한다.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맥락을 잘라낸다.


대화의 일부만 캡처된다. 긴 대화에서 한 문장만 떼어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농담으로 한 말이 진지한 주장처럼 보이고, 자기비하가 타인 비난처럼 읽히고, 복잡한 감정이 단순한 분노로 축소된다.


인터넷에서 '짤'로 도는 유명인의 발언들이 그렇다. 전후 맥락 없이 한 문장만 떠돈다. 그 문장만 보고 사람들은 판단한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지만 원래 대화를 찾아보면 전혀 다른 맥락인 경우가 많다.


반박이 나와도 이미 늦다. 첫 번째 판단이 널리 퍼진 뒤에 맥락이 복원되어도, 그것을 보는 사람은 적다. 잘못된 인상이 남고, 그 인상이 그 사람을 따라다닌다.




첫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 만난 몇 초, 길어야 몇 분 안에 형성되는 인상.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첫인상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만들어지고, 놀라울 정도로 오래간다. 한번 형성된 첫인상을 바꾸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첫인상은 일종의 맥락 없는 판단이다.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외모, 표정, 말투, 옷차림 같은 단편적 정보로 전체를 추론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필요한 능력이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최소한의 판단을 빠르게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인상이 고착되면 문제가 생긴다. 첫 만남에서 긴장해서 말을 더듬은 사람이 계속 '말 잘 못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우연히 컨디션이 나빴던 날 만난 사람이 '무뚝뚝한 사람'이 된다. 맥락은 사라지고 인상만 남는다.




채용 과정에서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서류를 검토하는 시간은 평균 몇 분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한 사람의 수년을 판단해야 한다. 학력, 경력, 자격증, 자기소개서. 서류에 적힌 것만 보인다. 적히지 않은 것—왜 이 경력을 선택했는지, 저 공백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은 보이지 않는다.


면접도 마찬가지다. 30분, 길어야 한 시간. 긴장한 상태에서 준비된 질문에 답하는 시간. 면접관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 한다. 하지만 30분 안에 한 사람을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는 것은 '30분 동안 면접을 어떻게 보는 사람인가' 정도일 것이다.


물론 모든 지원자를 깊이 알아갈 시간은 없다. 시스템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면접 잘 본 사람"과 "실제로 일을 잘하는 사람"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서류에 적힌 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것을 알고 판단하는 것과 모르고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뉴스도 맥락을 잘라낸다.


기사 제목은 클릭을 유도해야 한다. 복잡한 상황을 한 줄로 요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뉘앙스가 사라지고, 조건절이 사라지고, 맥락이 사라진다. "A 장관, '국민은 개돼지' 발언 논란"이라는 제목이 달리면, 기사 본문을 읽기 전에 이미 판단이 시작된다.


실제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전체 문장은 무엇이었는지, 앞뒤로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제목만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 공유하고, 댓글을 달고, 분노한다. 본문까지 읽는 사람은 소수다. 맥락을 확인하는 사람은 더 적다.


미디어 환경 자체가 맥락을 소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짧은 영상, 짧은 글, 빠른 스크롤. 깊이 들어갈 시간이 없다. 표면만 스치고 지나간다.




맥락 없는 판단이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판단받는 쪽은 억울하다. 설명할 기회도 없이 결론이 내려진다. 해명해도 듣는 사람이 적다. 이미 형성된 이미지를 되돌리기 어렵다.


판단하는 쪽은 확신한다.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10초짜리 영상, 캡처된 한 문장, 첫인상의 느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더 알아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사회 전체는 날카로워진다. 모든 말과 행동이 잘려나가 증거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조심스러워지거나, 반대로 무감각해진다. 맥락을 고려한 대화가 줄어들고, 맥락 없이 던져지는 단정들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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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복원하는 것은 느린 일이다.


왜 그랬는지 물어야 하고, 앞뒤 사정을 들어야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판단을 유보하고, 정보를 더 모으고, 결론을 늦춰야 한다. 빠른 판단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맥락 없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불완전하다.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틀린 판단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낙인이 되고, 떼어내기 어려운 꼬리표가 된다.


식당에서 결제 능력을 요구하며 주문을 거절한 매니저. 그녀에게 쏟아진 비난은 여전히 주홍글씨처럼 남아 있다. 과거의 도주 전적들이 밝혀지고 복직 제안이 왔지만, 그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처음 분노를 쏟아냈던 사람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편견에 가득 찬 인종차별주의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단 50초의 영상이 한 노동자의 직업 정신을 지웠다. 맥락 없는 판단이 한 사람의 삶을 규정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판단하고, 매일 누군가에게 판단받는다.


그 판단 안에 맥락이 있는지, 한 번쯤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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