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제안서를 쓰고 있었다.
"핵심 역량" 섹션을 채울 차례였다. 키보드 위에서 손이 멈췄다. 내 강점이 뭐지? 잠시 고민하다가 지난 제안서를 열었다. 거기 적힌 문장들을 조금 다듬어 옮겼다. 풍부한 경험, 안정적인 기술력, 원활한 소통. 그럴듯하게 읽혔다. 다음 섹션으로 넘어갔다.
파일을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방금 적은 것들이 정말 나의 강점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저 문장들이 먼저 떠오르지는 않는다. 제안서에 어울리는 말을 쓴 것이지, 나를 정확히 들여다보고 쓴 것인지는 확신이 없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
.
.
자기소개를 부탁받으면 대개 비슷한 것들을 말한다.
이름, 나이, 직업, 사는 곳. 조금 더 나아가면 취미, 관심사, 최근에 본 영화. 프로필에 적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나열하면 자기소개가 끝난다.
그런데 그것이 '나'일까.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고, 나이는 시간이 지나면 바뀌고, 직업은 바뀔 수 있고, 사는 곳도 옮길 수 있다. 취미는 달라지고, 관심사는 변한다. 이 중에서 '나'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질문을 바꿔본다. 이 모든 것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나는 무엇인가. 직업을 잃어도, 다른 도시로 이사해도, 취미가 바뀌어도 여전히 나인 것은 무엇일까.
답하기가 쉽지 않다.
MBTI가 유행이었다.
열여섯 가지 유형 중 하나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INTJ야." 네 글자로 성격이 요약된다. 자기 이해의 지름길처럼 느껴진다.
검사를 받고 결과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맞아, 나 이런 면 있어.' 설명을 읽으면서 나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를 몰랐는데 이제 알게 된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다시 검사를 받으면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날의 기분, 최근의 경험에 따라 응답이 바뀐다. 어제는 INTJ였는데 오늘은 ENFJ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가.
MBTI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네 글자가 나의 전부일 수는 없다. 유형은 지도이지 영토가 아니다. 지도가 있다고 해서 영토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은 나를 안다고 말한다.
추천 시스템은 내 취향을 파악하고, 내가 좋아할 것을 보여준다. 검색 엔진은 내 관심사를 기억하고, 맞춤형 결과를 제공한다. 광고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낸다. 시스템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 앎은 어떤 종류의 앎일까.
알고리즘이 아는 것은 내 행동이다. 무엇을 클릭했는지, 무엇을 샀는지, 어디에 머물렀는지. 행동의 패턴을 분석해서 다음 행동을 예측한다. 정확하게.
하지만 알고리즘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 왜 그 영상을 끝까지 봤는지, 왜 그 물건을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삭제했는지, 왜 그 검색어를 새벽에 입력했는지. 행동은 알지만 이유는 모른다.
알고리즘이 아는 나는 데이터로서의 나다. 패턴으로서의 나다. 그것은 내가 아는 나와 같지 않다. 아니, 그것은 나도 모르는 나일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습관들. 알고리즘은 그것을 포착한다. 나보다 먼저.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알고리즘은 내 행동을 알고, 나는 내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정작 나는 내 이유도 잘 모른다. 왜 이것을 좋아하는지,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나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언제부터 나를 모르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에는 질문이 없었다. 그냥 나였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나는 의심 없이 나였다.
자라면서 질문이 시작되었다. "왜 그걸 좋아해?" "그게 뭐가 좋은데?" 이유를 대야 했다. 대지 못하면 이상한 취급을 받았다.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 남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 그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외부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것을 좋아하는 것이 정상인가. 이 선택이 합리적인가. 남들 보기에 괜찮은가. 내 안의 목소리보다 밖의 시선이 먼저 들렸다.
어느새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는 나를 말하게 되었다. 프로필에 적을 수 있는 것, 면접에서 말할 수 있는 것, 소개팅에서 어필할 수 있는 것. 나는 외부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번역되지 않는 부분은 흐려졌다.
바쁘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할 일이 있다. 일, 관계, 콘텐츠 소비, 다음 일정. 틈이 생기면 스마트폰을 본다.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드물다.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게 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이런 질문은 시간이 필요하다. 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물어보고, 기다리고, 떠오르는 것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다. 질문을 던지기 전에 다음 일정이 온다. 답을 찾기 전에 다른 자극이 밀려온다. 나에 대한 탐구는 계속 뒤로 밀린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해야지.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의 정의에 기대게 된다.
MBTI가 말해주는 나, 알고리즘이 파악한 나, 직업으로 정의되는 나, 사회적 역할로 설명되는 나. 스스로 탐구하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틀을 빌려온다. 그 틀 안에 들어가면 '나'가 된다.
편하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런 유형이야"라고 말하면 설명이 끝난다. 상대방도 이해한다.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틀은 나를 다 담지 못한다. 유형에 맞지 않는 순간이 있고, 프로필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고, 직업과 상관없는 욕망이 있다. 그런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틀 밖으로 밀려나고,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 스스로도 잊게 된다.
나를 모르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외부의 틀로 나를 정의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그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가끔 이런 순간이 온다.
어떤 선택 앞에서 멈춘다. 이직 제안을 받았을 때, 관계를 정리해야 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주변에 물어본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조언을 구한다. 하지만 결국 결정은 내가 해야 한다. 그 결정을 하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모른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프로필에 적을 수 있는 것들은 알지만, 프로필 뒤에 있는 나는 모른다. 남에게 보여주는 나는 알지만, 혼자 있을 때의 나는 흐릿하다.
자기 이해가 부족하면 선택이 흔들린다. 기준이 없으니 남의 기준을 빌려온다. 유행을 따르고, 다수를 따르고, 무난한 쪽을 택한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선택'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묻게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인가.
.
.
.
지금까지 사라지는 것들을 살펴보았다.
'왜'라는 질문이 사라지고, 맥락이 사라지고, 깊이가 사라지고, 관계의 깊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세상이 '왜'를 묻지 않으면, 나도 나에게 '왜'를 묻지 않게 된다. 맥락 없이 판단하는 데 익숙해지면, 나 자신도 맥락 없이 판단하게 된다. 속도에 밀려 깊이를 잃으면, 나를 깊이 들여다볼 시간도 잃는다. 관계가 얕아지면, 나와의 관계도 얕아진다.
결국 남는 것은 표면이다. 데이터로서의 나, 프로필로서의 나, 유형으로서의 나. 패턴은 있지만 이야기는 없다. 속성은 있지만 서사는 없다.
그렇다면 서사란 무엇일까.
한 사람을 그 사람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그 질문을 따라가 보려 한다.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