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의 형성 과정을 보여드립니다.
벨 에포크 (Belle epoque)란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파리의 풍경을 추억하는 말입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식민정책을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시작된 정치적 투쟁의 막은 내리고 사랑과 문화의 도시 파리가 새로 올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853년부터 1869년까지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오스만 남작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도시 개발이 이루어집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뻗어나가는 지금의 파리의 모습이 이때부터 갖춰지게 됩니다. 혁명군들이 숨어들어 바리케이드를 치던 미로 같은 옛 골목길들은 사라지고 새로 단장한 시가지를 잔뜩 차려입은 멋쟁이들과 예술가들이 활보했습니다.
예술가들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아차렸고, 이런 변화에 열렬하게 반응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그리고자 하는 모든 것이 그림이 되는 행복한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를 함께했던 인상주의는 그 어떤 미술사조보다 좋은 환경에서 수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 시대는 동시에 극렬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유럽이 누린 풍요는 사실상 식민지 수탈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식민지 획득을 위한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팽창은 전 유럽에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전쟁은 서서히 준비되어 가고 있었고 참 좋았던 벨 에포크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뒤이은 1차,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스페인 독감은 그들에게서 이런 화사한 색채와 웃음을 결정적으로 앗아갔습니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현대미술은 고통과 비극, 공포와 눈물로 얼룩집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기계화, 산업화 등 문명의 발전에 유럽은 열광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대륙보다 월등히 뛰어난 문명을 갖게 된 유럽은 다른 대륙들을 하나씩 식민화시키며 엄청난 부와 풍요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1차 세계대전 역시 이성에 근거한 과학문명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전쟁은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기성세대는 후방에서 애국적 수사를 늘어놓으면 그만이었지만, 젊은 세대는 직접 군인이 되어 공포와 충격을 몸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제로 체험한 전쟁의 참상과 국가에서 외치는 구호 사이에는 당연히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이 괴리 속에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뻔뻔한 허위와 기만을 보았습니다. 기성의 모든 것을 불신하게 된 젊은이들은 당연히 예술 분야에서도 모든 형식적 권위, 모든 전통적 양식을 증오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일군의 작가들이 스위스 취리히로 모여듭니다. 후에 '다다이스트'라고 불린 이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전쟁을 부추긴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증오했습니다.
다다는 입체주의처럼 특정한 회화적 양식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예술적 실험의 완전한 자유'를 표방했기에 그들의 작업은 외려 연극에 가까웠습니다. 다다이스트들에게는 새로운 예술언어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합일점도 없었고, 일관된 '다다 양식'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양식적 관점에서 다다의 퍼포먼스에는 입체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에 속하는 요소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다에 그저 부정의 정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예술 양식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훗날 다른 예술 운동에 영향을 끼칠 몇몇 기법들을 창안해 내는데 대표적인 것이 레디메이드와 우연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우리 눈에 펼쳐진 세계의 '재현'이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완벽하게 캔버스에 구현하려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죠. 모네의 인상주의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피카소의 도전 등 모두가 이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봉사하고 있었고, 이들에게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뒤샹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망막 회화'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물결이 덮여 온다고 해도 오래된 물결이 한꺼번에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추상주의들도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이 전통적인 장르의 허들을 넘은 사람이 바로 뒤샹입니다. 뒤샹은 당대 과학 문명의 발전에 충격을 받았으며 이에 발 빠르게 반응하였습니다. 예술작품의 의미, 기능,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 그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 뒤샹은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최초의 오브제를 만듭니다. 그리고 1917년 쓸모없는 일상의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바꾸는 그러한 개념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남성 소변기 <샘>이라는 '레디메이드' 초소로 탈바꿈시킨 작품을 탄생시킵니다. 이로 인해 애초에 뒤샹은 다다이즘의 존재조차 몰랐겠지만 그런한 행위로 인해 그는 다다이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뒤샹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 미학적인 명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이 담겨있죠. 보는 이의 눈이 아니라 머리를 자극하고자 했던 뒤샹은 이를 가리켜 '항망막적 예술'이라 칭했는데 이것은 훗날 예술가들에게 개념미술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