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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씨 May 26. 2019

한 번쯤은, 퇴사

디자인하는 회사원의 퇴사 기록



3년 차부터였나, 문득 이러다 평생 이 회사만 다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앞으로도 이렇게 똑같이 살면 어떡하지? 하는 삶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홀수년차에는 직장인 사춘기가 온다더니, 10대에도 무난하게 넘어간 사춘기가 이제 왔나 보다 했다. 하지만 곧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서 이 생각은 조금 희미해지고 그런 걸 고민할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고민을 흘려보냈다. (왠지 팀장님의 의도적인 배치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후로도 몇 가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6년 차인 지금 무계획을 계획하고 소위 '생퇴사'를 한다.


퇴사 사실을 알리면, 우선은 어느 좋은 곳에 가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는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쉽사리 믿지 않는다. (에이, 나한태는 말해도 돼요. 우리 사이에?) 진짜 이직이 아닌 생퇴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들 물어본다. 그렇게 힘들었냐, 불만이 많았냐, 무엇이 제일 마음에 안 들었냐. 물론 모든 게 완벽한 직장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는 무언가 싫어서나 힘들어서라는 부정적 이유로 퇴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해드렸다. 오히려 지금 회사가 좋은 점이 많아서(?) 문제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 (사랑해서 헤어지자는 거야 뭐야)


대기업이니만큼 안정적이고 복지가 좋았다는 점. 누구나 원하고 노력한다면 훌륭한 워라밸을 이끌어낼 수 있으면서(하지만 디자이너들에게 욕심을 버리는 일은 힘든 일이긴 했다), 또 다양한 IT 신기술을 빠르게 접할 수 있고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 IoT, AI, AR/VR, 스마트 자동차나 뭔가 재밌어 보이는 아이돌 서비스 까지.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요소들 외에도 내 발목을 가장 붙잡았던 건 함께 일하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 팀의 팀원이 다 좋을 순 없다고, 다 좋다면 네가 또라이일 거라는(...) 말도 많이 들을 정도로 적어도 UX 관련 사람들은 참 좋았다.


하지만 점점 더 밖의 삶을 꿈꾸게 된 이유는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그려지는 내 미래 모습이 너무 명확해서였다. 

나같이 주어진 숙제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한국식 교육에 길들여진 1인) 회사 안에서 그려지는 ‘성공적인 미래’가 뻔했다. 매일 같은 회사에 출근해서 점점 직급이 올라가고, 직책이 올라가고, 더 큰 프로젝트를 리딩 하고, 조직의 리더가 되면... 그럼 되는 걸까? 몇 번의 프로젝트 사이클을 돌고 나니 점점 일의 루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이 익숙해지자 재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재미가 떨어지면서 이 일 뒤에 있는 더 큰 의미를 자꾸 찾게 되었다. 이 버튼을 더 쉽게 누를 수 있게 하고 더 이쁘게 만들고 만족도가 더 높아지면, 그럼 그 뒤에 얻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주어진 일이 작아도 거기서 의미를 찾고 재미있게 하는 타입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더 큰 의미를 찾게 되었다. (이게 바로 사춘기구나)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해서 학원에 들어가 4년 동안 꼴등 반에서 1등 반 까지 올라갔고, 학원에서 가라던 외고에 들어갔다. 이번엔 그림을 그려보라고 해서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으라고 해서 열심히 해냈고, 취직을 하라고 해서 나름 괜찮은 곳에 취직했고 그 안에서 주어지는 미션들도 열심히 완수했다. 하라는 건 다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던 것 같다. 하라는 것을 열심히 하던 내가 샛길로 새서 딴짓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느껴지는 시점이 온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쯤 다른 방식의 삶을 꿈꿨었는데... 세계여행을 하면서 동화를 쓰고 온갖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는 그런 것. 그걸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있을까? 혹시, 다른 사람들이 경고해준 대로 내가 퇴사하고 어떤 ‘실패’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해도 그 ‘실패’가 뭐 실패여 봤자 어떤 거겠어, 평생 백수? 는 아닐 것이고. (설마 아무 곳도 취업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다. 그게 누가 봐도 멋져 보이는 곳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전에 다니던 안정적 직장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도 내 삶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걸 직접 겪어본 것과, 계속 미래에 대한 의문과 왜 해보지 못했을까 후회만 하면서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인생에 한 번쯤은, 퇴사를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디서 들었는데, Change is Life라고.






다섯시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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