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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씨 Jun 04. 2019

퇴사에 관한 대화

디자인하는 회사원의 퇴사 기록



퇴사를 결정하고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 퇴사 소식은 이미 작년 12월부터 나만 모른 채 모두에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선배 퇴사자가 말했다. 퇴사 소식은 본인만 빼고 다 안다고.) 그 후로 4개월이 지날 동안 새 프로젝트를 맡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나 보다 생각했던 듯하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모두들 나에게 티를 내지 않아서 (난 정말 다들 모르는 줄) 내가 공식적으로 입 밖에 내고부터 약속이 잡히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밥을 먹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카페를 가면서 소소하게 퇴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다들 관점이 다르고 해주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이를 기록에 남긴다.

전후 맥락이 빠지고 기억이 왜곡되어 내용이 매끄럽진 않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새롭게 느껴질 듯하다.




A님 : 왜? 안돼안돼안돼! (진정 후) 그래. 한 번쯤 퇴사를 해본 사람이 후에도 무언가 결정해야 할 순간에 겁 없이 할 수 있더라. 퇴사도 해본 사람이 더 잘하는 듯. 더 오래 한 (좋은) 회사에 있을수록 더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꼭 나갈 필요는 없지만.


W님 : 나도 똑같은 고민으로 퇴사했었다. 나가서 무얼 하든 어떻게 되든 다섯시님에게는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거다. 나는 퇴사하고 돈도 더 잘 벌고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바쁘게 외주 일을 하다 보니 이 전 회사의 장점이 보이게 되었다. 또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가족으로 많이 옮겨져 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 나가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나간 시간이 가치 있을지 아닐지는 결국 본인이 만드는 것이니까, 헤어진 남친(=회사) 절대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L님: 퇴사가 해보고 싶으면 해 보시면 된다. (쏘쿨) 음 퇴사하고 뭘 할까 고민이면 공부해보고 네트워크를 쌓아보는 건 어떤지. 아는 분은 다양한 대학원을 1학기씩 옮겨 다닌다. 신기하지? 수료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


자유인 : 나도 원래 되게 자유로운 사람인데... (저도 그다지 자유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듣기로 지금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을 차린 후 exit 하면서 큰 회사에 2년간 묶이면, 그동안 큰 회사는 대충 다니면서 다음 아이템을 준비하고 exit 하는 순환이 유행이라더라. (결론은 평생직장의 반대 개념을 추천해주신 듯)


J님 : 우리의, 회사에 남은 사람들의 그래프는 앞으로 정해져 있다. (손으로 수평을 그리며) 너는 여길 나감으로써 상승 그래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하향일 수도 있잖아요?ㅠ) 하향 그래프가 되면... 제가 밥을 사드릴게요.


O님 : 제가 여기로 이직한 지 한 달 되었는데, 여기 회사 분들을 퇴직 면담해보면 모두 지금 회사는 좋다고 하신다. 그런데 퇴사는 하겠다고 한다. 할 말이 없다. (음... 평소 무슨 일을 하시나요?) 지금은 직급=짬순으로 급여를 매기는 비정상적 구조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를 바꿔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직급 순이 아니라 업무기여도에 따라 연봉이 지급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지난번 회사에서 이 작업을 할 때 디자인 직무는 1~7등급 중 낮은 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만큼 한국은 디자이너에게 박하다. 디자이너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한 회사의 문제보다는 한국의 문제인 듯하다. 아직은 가고 싶은 회사도 안정하셨고 대학원을 갈 것도 아니시라니... 아무튼 꼭 잘 되시길 바란다. 잘 된 사람은 책을 쓰던데, 잘 안된 사람은 조용하니까. (저는 잘 안 되더라도 꼭 책을 쓸게요. ‘쉽게 나오지 마라’ 아니면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봐라’ 어때요?)


M님: 나도 네 연차를 지나면서 비슷한 고민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이 분야만 하는 게 맞을까? 왠지 다른 것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이제 나는 단계별 목표가 있다. 나는 사업을 하고 그걸로 10억을 버는 게 단기 목표다. 45세 이전에 월 2천씩은 고정적 수입이 생기도록 시스템화를 시키고 싶다. 더 나중엔 츠타야 서점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내가 보기에 너는 책임감도 있고 성실하고 주어진 일을 잘 해내긴 하지만, 속에 한량 기질이 있어 걱정된다. (인정) 그리고 혹시 퇴사 후에 여행 계획이 있나? 퇴사 후 여행 이런 것 좋긴 한데... 그냥 여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작년부터 여행을 끊은 건 이제 그냥 휘발되는 시간을 갖지 않기 위해서다. ‘힐링’ ‘YOLO’ 키워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 난 이제는 무언가 얻거나 공부하거나 조사하기 위해 나만의 출장을 가는 거지 더 이상의 여행은 하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너의 버킷리스트라면 그런 건 의미 있다. 혹시 입사한 후로 정말 가슴이 설레서 두근거리는 일을 열정이 있게 해 본 적이 있나? 난 츠타야 서점에 대한 책을 읽으며 그랬다. 그런 걸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


E님: 지금 안 좋은 이유가 없는데 나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 안정적인 회사를 퇴사한다는 결정 자체가 대단하다. 이후에 어떻게 되던 그런 결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건 다섯시님이 강단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라 멋지게 생각한다. 뚜렷한 인생 목표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그건 평생 동안 찾는 것이다. 적어도 주변에 의해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B님: job은 중요하지 않다.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무얼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르게 살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농사를 짓게 되어도 지금 같은 프로세스로 일 할 것이고 크게 바뀌는 것은 없을 거다.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것 같은 싫은 일을 한 달 해봐라.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나?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나이 n9, n0, n1 때마다 똑같이 인생에 대한 고민이 든다. 내가 할머니 한태 물어봤는데, 70세에도 그 고민이 든다더라.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사춘기설) 그리고 그때가 어쩌면 터닝포인트 시점이다.


S님 : 나 같은 Generalist (하나에 특출 나기보다 여러 분야를 고루 잘하는) 에게는 큰 조직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무언가 하나에 특출 난 Specialist는 작은 조직에 적합하고. 내가 제너럴리스트인데,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그때그때 할 수 있어야 해서 자신이 스페셜리스트임을 강조한 분들은 면접을 보면서 뽑지 않았던 경우가 있다. 직장은 그냥 ‘성향’의 차이다. 내 성향을 바꾸거나 맞출 필요는 없고 성향에 맞는 곳에 가면 된다.


D님 : (고민 중일 때) 이 조직에 있으면서 너보다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들 대부분 나중에 돌아오고 싶어 했어서, 안 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고, 퇴사를 결정하고 나서) 생각을 많이 해봤다. 아침엔 퇴사를 응원하다가도 저녁엔 또 말리고 싶어 지더라. 나도 결국엔 정답을 모르는 거고 인생은 다 다른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네가 생각하는 ‘성공’의 정의가 단순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UX의 전문가가 되어서, 유명한 회사에 들어가고, 연봉을 올리고, 세미나를 하고, 유명해지는 것? 그게 우리같이 ‘무언가 창조하는 사람’ (디자이너라는 단어는 한정적이니까, ‘무언가 창조하는 사람’으로 바꾸자)의 성공이 아닌 것 같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했는데, 사람들이 그걸 좋아해 주는 것. 그게 ‘창조하는 사람’의 성공인 것 같다. 이 시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걸 찾아나갔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문득 궁금하다.

나중에 내 후배가 나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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