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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씨 Jun 14. 2019

퇴사자의 한 달

디자인하는 회사원의 퇴사 기록


인턴부터 시작해서 신입으로 들어가 5년 5개월을 몸담은 회사를 퇴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뭐 대단한 걸 적으려는 건 아니고, 지금 내 기분이나 드는 생각들을 기록해놓기로 했다. 회사원일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순간의 기록을 남겨보기.




일기를 쓰고 있다.

메모 앱 Notion으로 매일매일의 일기를 조금씩 텍스트로 남기고 있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들의 진행 순서로 내 시간들이 정의되었는데, (3월은 무슨무슨 앱 2차 기능 추가 건 시작, 5월은 무슨무슨 서비스 출시, 7월은...) 지금은 그런 기준점이 없으니 하루를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의미 없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리고 Notion은 회사 다닐 때도 사람들에게 영업하고 다녔지만, 기록용으로 너무 좋은 툴이다. 쉽고 깔끔하고.


그림일기도 그리고 있다.

이건 퇴사와 상관없이 아이패드가 생기고부터 1월부터 그려왔던 건데, 일기라고 매일 그리는 건 아니고 가끔 생각날 때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잊고 (나의 미래, 내 계획과 무계획, 고민을 하는 것을 고민하는 그런 것들) 온전히 그림의 구도나 색감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원래 그림 스타일이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그리다 보니 그림일기는 일정한 패턴이 생겼다. 문제는 그리기만 하고 막상 그 흔한 인스타그램에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과연 SNS 알레르기는 언제 고쳐질 것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말인데 퇴사자에게 SNS는 좀 할 필요가 있다.

SNS의 단점이야 그동안 수많은 미디어에서 다뤘고 직접 느껴온 바들이 있으니 알고는 있지만, 퇴사자에게 SNS는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회사에서는 싫어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게 되는데 퇴사해서는 아무리 혼자 여러 작업을 한다고 해도 보여줄 사람이 없다. 작업물은 공유해야 가치가 있으니 어딘가에는 올려야 한다. 그러기에 SNS처럼 쉽고 저렴하고 재미있는 자기 PR 창구도 없다. 나는 SNS에 게시글을 올리지는 않고 남들이 올린 걸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염탐러인데, 따로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SNS를 통해 계속해서 안부를 접하면 나도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고 더 긍정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안 할 이유가 없다.

귀찮은 것 빼고. 휴.


'할 일 리스트'는 의미 없다. '스케줄링'이 필요하다.

Notion에 체크박스 리스트를 생성해서 할 일 리스트를 적고 아무리 체크를 해봤자, 그냥 리스트를 해치워나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냥 '건강검진받기' '은행 계좌 정리하기' 정도야 그럴 수 있지만 내가 이번 기회를 통해 더 성장하고 싶다면 시간에 대한 계획이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단순히 목표 일정을 세우라는 게 아니라, '삶'은 결국 '=시간'이니까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쓰면서도 결국엔 목표일정 세우라는 것 같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 2019.10.25 에 문득 추가

“나는 이제 나의 ‘자리’가 궁금하지 않다. ‘되고 싶은’ 어떤 자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런 자리라는 것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목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나를 인정하며 지내는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결과’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김현우, 건너오다




그리고 가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는 것들을 이것저것 하고 있다.

사실 그게 무엇이든 가치가 없을 수 있을까? 결국 모두 가치가 있겠지. 아무튼 이것저것 하고 있다.


첫 번째는 도자기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갤러리에 따라가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도자기는 그림 그리는 것보다 입체적이고 (바로 만질 수 있는!) 촉감적이어서 (흙을 만지고 다듬고 자르고 뭉개는 그 느낌들) 재미있고, 손끝에 집중하기 때문에 더 머릿속을 비우고 차분해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디지털 디자인은 내가 원하는 대로 결과물을 컨트롤하는 느낌이지만 도자기는 흙이 자기가 되고 싶은 대로 점점 만들어지는, 내가 이것에게 컨트롤당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화병을 만들려고 쌓다 보니 다른 형태가 돼버리는 그런 것? (디지털 디자인은 전문가지만 도자기는 미숙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완벽히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두 번째는 타향살이 계획 중

퇴사 전에 회사 책임님의 조언처럼, 순간의 '여행'이 목적인 소모성이 아니라 나에게 남는 게 있는 여행을 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문제는 원래 해외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사알짝 줄었다는 점. 직장인일 때는 잠깐만 쉬는 시간이 생겨도 영혼까지 연차를 끌어모아 득달같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갔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퇴사하면 바로 나가버릴 줄 았았다. 그런데 막상 퇴사하고 나니 좀처럼 그쪽으로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역시 여행은 일상(=회사) 탈피가 주목적이었나 보다. 사는 집 근처의 공원들도 전시들도 모두 여행처럼 즐길거리로 보인다. 5월이라 날씨가 좋아서 그런 것일 수도.

음.

계획을 하자 계획을 계획...


온라인 스터디 커리큘럼을 짜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지 않는 삶을 하면서, 나도 성장하지만 약간의 용돈벌이가 될 수 있는 그런 것.


그리고 또또또

브런치를 쓰고, 카톡 이모티콘을 하루 만에 그려서 제출했다가 광탈당해보고, 유기견 봉사활동을 가고, 아트페어 지킴이 (갤러리스트라기에는 정말 지킴이 정도의 가벼운 역할로) 일을 하고 연락이 오면 디자인 일을 조금씩 하고 있다.





그래서 요새의 기분


사실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변화는 없다. 퇴사 전과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살고 있다. 카페로 나만의 출근을 하고 나만의 숙제를 하고 나만의 퇴근을 한다. 다만 다른 건 원래는 침대에서 일어날 마음이 1도 없는데 억지로 끌려가듯 나갔다면, 지금은 알아서 일찍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직장인일 땐 주말에는 1시에 눈뜨고 3시에 겨우 침대에서 나왔던 게으름뱅이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다는 게 다르구나. 나중에 다른 직장을 다닐 때에도 지금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일어나고 싶은 그런 일을 하면 좋겠다.


스트레스도 여전하다. 나 자신과 내 미래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15% 정도 깔린 채 살고 있으니까. 약간 초조한 마음도 있다. 다른 점은 회사 다닐 때는 기분 좋을 때와 나쁠 때의 감정 그래프가 훨씬 크게 움직였다면, (일이 잘 됐을 때의 상향 그래프, 화나는 사건이 있을 때의 하향 그래프) 지금은 둘 다 더 잔잔해졌다는 것. 그리고 고민의 주제가 전에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으악!!’과 같이 공격적이고 쓸모없는 욕욕욕 이었다면, 지금은 내 인생이나 미래, 꿈처럼 고차원적이고 답이 없어졌다는 것?



그런데 약간 설렌다.


뭐가 설레냐면... 내일을 예상할 수 없어서 설렌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 조금 설렌다.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꼭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목적지 없는 모험 길에 오른 것 같다! 동화처럼 모험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덤... 덤벼라 사악한 괴물아 흑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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