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의 치앙마이살이
퇴사자의 치앙마이살이
치앙마이 두 달 살이를 끝내고 떠나는 즈음의 일기들.
엄마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두 달 64일을 꽉 채워 치앙마이에 머물고 나니 비로소 떠날 마음이 생겼다. 남들이 치앙마이에서 해본다는 근교 투어들도, 짚라인이나 코끼리 체험도 다 해보지 않았지만 이제 충분하다는 느낌이 왔다. 훨씬 더 오래 머물러도 계속 치앙마이를 새롭게 발견한다는 장기 거주자분들도 계시니까 이건 주관적인 느낌일 것이다.
더 결정적인 계기는 별 것 아니었다. 버스로 1시간 거리인 치앙라이로 짧은 여행을 떠났는데, (치앙마이는 이제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자 내 집 같았다. 치앙라이는 새로운 여행지.) 버스에서 이동하면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이 2년 전 여행했던 스페인의 기차에서 보던 창 밖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자 ‘아 스페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음? 살아보고 싶으면 살아보면 되잖아.’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잠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려고 나 혼자 ‘자발적 방황기’로 명명해버린 기간 아닌가. 어차피 돌아갈 회사도 없고 밥 줄 강아지도 없다. 통장 잔고는... 어떻게 잘해보면 되겠지.
다만 바로 이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서 머문 이 시간과 경험과 생각들이 그냥 이렇게 마구 펼쳐진 채 다른 나라로 간다면, 그 위에 바로 덮여 잊힐 것 같았다. 난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 잠시 멈추고 이 시간을 찬찬히 곱씹어 내 것으로 소화한 다음에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 소화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이렇게 글을 쓴다.
바로 한국행으로 끊지 않고, 태국의 끄라비와 피피섬을 거쳐 푸켓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티켓으로 끊었다. 태국에서 한국인이 머물 수 있는 90일 중 80일을 채워 돌아가게 되었다. 치앙마이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발리나 필리핀에서도 머물다가 돌아갈 줄 알았는데 완전히 태국에서만 머물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만큼 태국 치앙마이가 편안하고 매력 있는 곳이었다는 뜻이겠지. 떠나올 때 수영복만 종류별로 세 세트를 챙겨 왔는데 내내 못쓰다가 드디어 쓸 수 있게 되겠구나. 다시 여행을 떠난다니 설레면서 한 편으로는 치앙마이를 떠나보낼 생각에 조금 슬프다.
내가 다시 치앙마이에 올 일이 있을까? 왠지 빠른 시일 내에는 다시 올 일이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어딘가로 떠날 여유가 또 생긴다면 가보지 않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질 테니까. 그래도... 이 아디락피자 맛은 잊기 힘들 것 같다.
치앙마이의 마지막 3일을 남기고 오늘은 반캉왓의 마하사뭇 도서관에 다시 방문했다. 엄마가 주고 간 아빠의 시화집을 그곳에 두고 나왔다. 내가 치앙마이에 머물렀었다는 작은 증거로 책 앞면에 메모도 끄적여놓았다. 그 책이 계속 거기 놓여있게 될지 어떨지, 혹은 누군가 내 메모를 읽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거기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한국에 돌아갔을 때 치앙마이가 더 가깝게 느껴질 것 같았다.
오로지 책을 두고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반캉왓의 다른 가게들은 둘러보지 않고, 도서관에서만 한참을 머무르며 책들을 읽다가 왔다. 많은 한국인들이 치앙마이를 느끼고, 글을 쓰고, 다시 돌아와 책을 두고 갔더라. 지금은 아빠의 시화집에 적은 내 짧은 메모 정도만 남기고 가지만 만약 나도 나의 글로 책을 만든다면 이 도서관에 두고 싶어서 치앙마이에 다시 올 지도 모르겠다.
오롯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월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은 곳들도 많고 어차피 따로 계획한 일정이 없기 때문에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왠지 태국의 북부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카오소이매싸이에서 마지막 카오소이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고 숙소를 정리했다. 저녁에는 스쿠터를 타고 유일하게 가보지 못한 올드타운 너머 반대편 지역으로 향했다. 지나가다가 근처의 모르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 카페가 알고 보니 아트센터이자 치앙마이 아티스트들의 협업공간을 겸하고 있는 곳이었다. 근처에는 그래피티 작가들이 모여 전시를 열고 오픈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태국의 힙스터들은 다 여기 모여있었다.) 이런 소그룹을 꾸려 이벤트를 열고 소통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고, 부러웠다. 소속이 확실한 회사에서 나와 소속감 없이 자유로운 삶을 즐기다가, 또 다른 커뮤니티의 소속감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물론 약간 다른 소속이긴 하지만.
입구에 있는 스탭에게 전시를 구경해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환영한다며, 혹시 얼마나 지낼 예정이냐고 물어봐주었다. 치앙마이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면 한 달 혹은 두 달, 무엇이든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대답해줄 수 있었을 탠데... 아쉽게도 내일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대화는 끝이 났다.
이제 치앙마이에서 떠나는 당일, 평소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뒹굴거리다가 마지막 식사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위치안부리 로스트 치킨’을 먹었다. 전날 카오소이를 먹었더니 상큼한 쏨땀과 치킨이 끌려서. 치앙마이의 두 달 살이를 마무리하는 메뉴가 치킨이라니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찾게 되는 마성의 치킨. 푹푹 찌는 날씨에 에어컨도 없는 치킨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치앙마이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1층의 숙소 오피스에 들러 같이 방을 점검하고, 디파짓에서 공과금과 딥 클리닝 비용을 뺀 나머지를 돌려받았다. 어차피 태국에서 여행할 계획이라 디파짓을 현금으로 받아도 괜찮았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커피 한 잔을 하며 잠시 일기를 썼다.
치앙마이 두 달의 마무리는 이렇게 별 것 없이, 뭐 사진이나 조촐한 기념도 없이 그냥 일상처럼 지나갔다. 치앙마이도 한국의 한 도시처럼 쉽게 갈 수 있는 곳만 같아서. 그리고 한 달을 지낸 후 느꼈던 그 아쉬움도 남지 않을 만큼 좋은 시간을 보내서.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자발적 방황기를 가치고 있는 디자이너 ‘다섯씨’ 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근근이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치앙마이에서 두 달, 태국에 79일을 머물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지금은 포르투갈에서 살아보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게을러서 브런치 글은 실제보다 아주 천천히 올라옵니다. (언제쯤 브런치도 포르투갈로 올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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