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한국과의 틀린그림찾기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서프러제트(SuffraGETte)들의 투쟁을 그린 <서프러제트>를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차라리 픽션을 가미한 역사다큐에 가까웠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역사적 사실을 자막으로 처리하고, 끝부분에는 아예 당시 운동할 때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실제 역사에 깊이 뿌리박은 만큼, 갈등 구도나 플롯은 다소 예측 가능했다. 그리고 내용 역시도 재미 자체보다는 메시지에 더 초점을 맞춘 느낌이었다. 하기사 주제 자체의 무거움, 진지함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다. 확실히 우중충한 런던 뒷골목, 자본가가 굴리는 세탁공장의 비인간성 같은 데에는 일말의 유머도 들어차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크게 재미있다 느끼지 못한 이유는, 100년 전 영국의 모습이 지금 여기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이 쌓아올린 법, 언론, 정치에 여성은 없었다.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고, 남성보다 적은 임금으로 일하며, 그마저도 작업 중에 공공연한 조롱/성추행을 당해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이자 아내라는 의무에 묶여야 하지만 친자의 소유권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이성과 합리를 표방하는 그 근대의 세계에서 몇백 년 동안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견고한 벽이라면 물리적으로 부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프러제트는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을 터뜨리는 등 공공기물을 파손하며 싸웠다. 이 과정에서 서프러제트들은 일종의 반동분자, 폭도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 부덕한 아내/어머니가 되었다.
영화에서 내내 주인공인 모드를 압박하는 경찰은 일부 서프러제트의 폭력적인 행태를 지적하며 '명분'을 들먹인다.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면 당신들이 외치는 명분은 어디로 가냐?' 그렇게 소리치며 묻던 경찰은 여성들의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것을 깨끗이 묵인한 사람이다. 결국 영화 말미에서 그 '전략적인 명분'을 위해 누군가는 경마장에 뛰어들어 국왕의 말에 치인다. 그러니까 서프러제트의 선택지란, 구조(혹은 세계, 혹은 오빠)가 허락하는 조용한 저항, 구조의 명분 및 인정을 포기하고 맞서는 폭력적 저항, 그것도 아니면 깨끗하고 전략적으로 순수한 명분을 위해 스스로의 기표(몸)를 제거하고 철저한 희생양이 되어 저지르는 순교밖에 없었다. 순교의 결과로 이어진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세계가 그 장례식을 주목했다. 이후로도 서프러제트 운동은 계속되었고, 1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여성이 온전한 참정권을 얻은 것은 영화의 배경인 1912년으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나서였다.
오늘날 한국은 어떤가? 물론 여성은 투표할 수 있다. 그러니까 'suffrage(참정권)'는 주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남성보다 35%가량 임금을 덜 받고, 일상 속에서 공기 같은 혐오와 차별과 조롱을 받으며, 개념녀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다. 교복 회사에서는 허리 라인을 조여 주는 '코르셋' 재킷을 교복이랍시고 판다. 수많은 성 범죄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고하는 순간 '당할 짓을 했다'는 논리를 마주한다. 언론은 이런 성범죄 사건에 하나같이 '~녀'로 제목을 붙여 기사를 작성하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앞길이 창창한지를 논하며 그를 두둔한다. 특히나 데이트 폭력의 경우에는 '사랑싸움'으로 포장되어 제대로 된 공권력이 기능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정신병자의 범죄마저 성별을 묻고 발생한다.
앞서 <서프러제트>와 지금 여기가 크게 차이가 없다고 했다. 조금 있는 차이점이라면 이것이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투표권과 친자에 대한 소유권 등을 가지고 싸웠다. 지금 여기서는 제도적인 부분이 아니라, 강간하지 말고, 몰카 찍지 말고, 2차 가해 하지 말고, 때리거나 죽이지 말아달라고 외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미러링이 시작되었다. 나는 미러링으로 깨진 유리창이나 터진 우체통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는 불과 1년만에 빠른 속도로 페미나치, 테러리스트, 일베와 같은 혐오종자가 되었다. 너도 '서프러제트'냐고, 꼭 사상을 검증하듯 묻던 100년 전 영국처럼, 지금 여기서는 너도 '메퇘지'냐고 묻는다.
경마장에서 죽은 에밀리의 장례식 이후로도 1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했다. 참정권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이다. 강남역에서 죽은 여성을 추모하며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은 어떤가? 단순 정신병자의 일탈이라고 성실하고 굳건히 결론내린 언론 및 사회 구조, '순수한 추모'에 대한 요구,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주최하였으므로 이 추모 움직임은 악하다는 주장, 포스트잇 붙이는 인간들을 다시 몰카 찍어 신상을 털자는 계획, '여자라서 죽었다' 한 마디 문장에서 양성 갈등(혐오)을 신기할 정도로 먼저 읽어내어 남녀대결 구도를 만들고는 그런 구도를 만들지 말라 외치는 상상력 및 자아분열, '천하제일 추모대회'라는 조롱, 모든 커뮤니티가 합작하여 보내는 비난, 여성'혐오'는 전략적으로 좋지 않은 단어라는 훈수까지. 이쯤 되면 <서프러제트>는 현재 한국의 평행세계다. 아니, 아주 흐릿한 미러링이다. 현실은 더욱 뚜렷이 끔찍하다. 말하자면 이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역사화(historification)를 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시대 다른 공간으로 옮겨 보게 함으로써 사안에서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하는 소외 효과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지금 여기에서 젠더 이슈를 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안에 깊이 이입해서 말하면 '폭력적인 일부 페미나치, 메퇘지' 소리를 듣고, 소외 효과를 통하여 말하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여성 투표도 보장받는 남녀평등 시대고, 오히려 여성전용 지하철칸까지 생기는 여성 상위 시대이지 않냐는 반응을 예상해본다. 애초에 근대화 프로젝트, 국가주의적 군사주의로 인한 군사화 등을 거치며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인권감수성이나 상상력 같은걸 교육받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세계에서 자라온 세대 아닌가. 공감 같은건 어렵고, 할 필요도 없다. 그런 삶이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른 '비효율적'인 목소리는 다물어야 했던 세계. 그러니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에도 공감이 아닌 효율성을 먼저 언급하지 않는가. 정말이지 갈 길이 멀다. 앞으로 이어질 1000명의 투옥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며, 이후의 몇 년은 과연 몇 년에까지 닿아 있을까? 아득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 있는 길도 아니다. 뭔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만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