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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Apr 05. 2016

존 시나

지지 않는 미국식 영웅

* 본 글은 아래 동영상을 보고 읽으면 더 이해가 빠릅니다.

https://youtu.be/n5WU5a2vNRU


친구 집에서 놀다가 웃긴 동영상을 찾아 보았다. 그러다 그 이름이 걸렸다. 존 시나. 나야 그가 WWE 레슬링선수라는 건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레슬링을 보지 않으니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 그의 이름을 다시접한 계기는 한 라디오 방송의 장난전화에서였다. 진행자는 남편의 신청에 따라 아내 혼자 있는 집에 몇번씩 전화를 건다. 거친 남자가 ‘존 시나!’ 를 외치는 목소리와 아내의 표현처럼 ‘사이렌 같은’ 나팔소리로 이루어진 요란스러운 광고는 확실히 모르는 데서 걸려온 전화로 듣기에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는 데서 온 전화로 들어도 마찬가지겠지만. 우스운 포인트는 이것이었다. 다른 사람, 다른 용건인 척하면서 결국 존시나를 연호하는 광고로 이어지는 존시나 엑스 마키나, 전화를 거듭하면서 점점 격앙되는 여자의 목소리, 속을 때마다 확실히 배가되는 여자의 분노, 그런데도 연신 전화가 올 때마다 굳이 전화를 받는 행동까지. 그냥 안 받으면 되지 않을까. 라디오 방송 입장에서는 난처한 해프닝이겠지만, 정신건강을 생각한다면 그런 편이 나을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 여자는 어째서인지, 심지어 장난전화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슨 어류나 조류처럼 까맣게 잊은듯이 전화를 받아젖혔다.


여튼 그걸 시작으로 해서 존 시나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알고보니 이 장난전화는 생각보다 훨씬 유행하는 밈이었다. 그 시끄러운 음악과 존 시나의 울퉁불퉁한 몸은 스탠리큐브릭의 <샤이닝> 명장면에서, 포켓몬에서, 심지어 스폰지밥에서까지, 정말 시도때도 없이 나왔다. 존 시나 밈 시리즈를 보는 건 독특한 경험이다. 나는 이미 존 시나 밈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웃긴지를 알고, 그것이 언제 등장할지도 너무나 투명하게 안다. 그런데도 존 시나가 나오면 웃기다. 웃는 것이다. 확실히 웃음이란 건 그렇다. 개연성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대체로 그냥 웃기기 때문에 웃는데, 굳이 거기에 이유를 붙이려 하면 오히려 어색해진다. 하긴, 그렇긴 하지. 나는 근심걱정 없이 거칠게 웃어젖혔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이번에는 존 시나의 밈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대해 찾아보았다. WWE 최고의아이콘, 무적의 선역. 경기력 측정기. 반칙을 안 쓰는 정정당당한 영웅. Never Give Up. 그는 소위 말하는 세계관 최강자 캐릭터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그 지점에 이르러 깨달았다. 그렇다. 존 시나는 곧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낙관주의에 대한 은유다. 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긴다. 자잘하고 작은 실패들과 안티들의 야유도 그에게는 단지 추진력을 위해 잠시 무릎 꿇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등장이든 난입이든지간에 그는 어떻게든 나타나 최후까지 살아남는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모든 드라마는 헐리우드 영화의 주류를 차지하는 해피엔딩처럼 존 시나 엔딩으로 귀결된다. 외계인이나 괴물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무능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미군으로 상징되듯, 그의 승패는 정의의 척도가 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미 공군폭격기가 등장하여 정의의 쑥대밭을 만들듯 존 시나가 등장하여 공의의 강물을 흘려보내리라 예상한다. 그러면 그는 정말로 틀림없이, 하지만 그게 무슨 반전이기라도 한 것처럼 등장하고, 스릴의 불안정한 묘미보다는 재인식의 안정적 통쾌함을 선사한다. 예의 그 나팔 같은 음악이 울려퍼짐은 물론이다. 전직 해병대 출신의 이 캡틴은 사악한 악동들에게 핵꿀밤을 선사하여서는 결국 때려눕힌다.


이 과정에서 Never Give Up 역시 빠질 수 없다. 철저한 포기, 실패를 그 언어부터 용납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모든 것은 ‘다음’의 ‘한번 더’를 위한 ‘도전’이된다. 포기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포기할 이유가 없다. 어쨌거나 결론은 성공, 승리, 깨끗한 해피엔드일텐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Give Up은 부정형은 아니지만 부정적이다. 그 포기를 Never로 다시금 부정함으로써 존 시나로 상징되는 미국의 낙관주의는 무한과 영원에 바벨탑처럼 맞닿는다. 존 시나는 포기할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는 포기하지 않을 이유까지 확실히 있다. 결국 WWE에서 밀어주는 기믹은 존 시나이지 않은가? 전체적인 각본은 존 시나의 득세를 중심을 짜여졌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그저 이기는 그 캐릭터가 정정당당을 외치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 존 시나는 마냥 투명할 정도로 정정당당한 불굴의 영웅을 표방하지만, 시스템 내에서 아무리 투명해도 시스템 자체가 그렇지 않다면 소용이 없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모든 억압을 벗어던진 ‘자유’의 이름을 한 채, 불공평한 출발선과 승부조건을 묵인한다. 사다리, 벨트 등 모든 것이 용인된다는 레슬링 페스티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기는 건 실력이 아니라 시나리오다.



이미지 출처: 역시 나무위키

이기는 조건을 갖춘 채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국 꿈 같은 권선징악 속에서 행복해지리라는 세계관은 이렇게 존 시나-WWE-신자유주의-미국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곧 군수산업과 주식놀음, 원자재 가격 조작 등을 통한 초국가적 군사/경제 억압으로 쌓아올린 그들만의 디즈니랜드다. 일정량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는, 그러므로 일견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 더없이 유아적이고도 순진한 WWE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이 디즈니랜드에서 다시, 처음의 장난전화로 돌아와 보자. 여자는 왜 장난전화인 줄 알면서도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녀가 그저 틀어놓은 존 시나 광고음악에 대고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 효력도 없으며, 오히려 더 큰 맥락 속에서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을 욕설을 퍼붓는 것밖에 없다. 결국 한 번 더 놀아나 버리는 처참함 대신에 말이다. 이건 꼭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에 찌들어 초고도비만이 되어버린 뱃살을 한 대 치고 그 댓가로 뼈를 한 대씩 얻어맞는 격이다. 미국에 신세를 져 버리고, 그 때문에 더 큰 신세를 갚는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 말이다. 그러고 보면 집 밖 남편과 집 안의 아내라는 권력구도마저도 이를 방증하는 것 같다.


존 시나에서 시작해서 미국의 시뮬라시옹까지 실체 없는 이 담론의 마침표를 찍어 보자. 저 라디오 장난전화 방송도 실은 대본을 정해 놓고 연기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사이렌인지 나팔소리인지 모르는 존 시나 배경음악이다. 꽤 시끌벅적하고 요란하니 이걸로 모닝콜이라도 맞춰놓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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