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토록 찬란한 삶, 혹은 죽음에 대해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했다.’
6월의 어느 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파티를 열기로 계획한다. 파티를 위한 꽃을 직접 사겠다며 시작하는 문장은, 그녀가 문을 나서는 상쾌한 아침에 활짝 열린 대기를 마주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기압에 따라 공기가 움직이고 흘러가듯이, 그녀의 의식 속에서 스쳐가는 생의 찬란한 반짝임이 속속들이 글에 담긴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더없이 누추한 여인들, 남의 집 문간에 앉아 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 (자신의 몰락을 마시는 거지) 마찬가지야. 저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바로 그 때문에 의회 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의 눈 속에, 경쾌한, 묵직한, 터벅대는 발걸음 속에, 아우성과 소란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지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샌드위치맨, 관악대, 손풍금 속에, 승리의 함성과 찌르릉 소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게 높은 여음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삶이, 런던이, 유월의 이 순간이.’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 보여준다. 딱 하루, 바로 그 날을, 인생의 전부처럼.'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50대에 접어들었다. 최근에 독감을 크게 앓았고, 그 이후로 꽤 노쇠해졌다. 30년 전 부어턴의 파티에서 강렬하게 빛나던 젊은 클라리사는 어느덧 어여쁜 딸을 둔 집안의 천사, 댈러웨이 부인이 되었다. 자연적으로(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동성간의 설레는 감정에 미묘한 키스를 나눈 적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에게 마법처럼 빠져들어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런 부어턴의 한때는 파티를 준비하는 그녀의 하루 속에서 맴돌며 그 짧은 시간 속에 깊이를 더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내각에는 들어가지 못할) 정치인인 리처드 댈러웨이의 아내, 댈러웨이 부인일 뿐이다.
6월의 그 하루, 그녀의 연인이었으나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겪은 피터 월시도 마침 인도에서 돌아와 불쑥 클라리사를 찾아간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부어턴’이라는 단어로 둘 사이에는 과거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피터는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의 고만고만한 결혼 생활, 클라리사와의 짧은 재회, 새로운 사랑, 이혼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 외의 숱한 감상, 감상이 이어진다. 여자관계와 더불어 그의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은 그 돌연한 감상들 말이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그리고 그럴 것을 꿰뚫어본 클라리사는 피터가 아닌 리처드를 선택했다. 피터는 풀렸다 생각하나 동시에 풀리지 않은 과거의 매듭을 떠올리며 클라리사의 파티에 가기로 한다.
저 한편에는 조랑말처럼 자유롭고 도발적이었던 샐리가 있다. 꽃을 한 송이 꺾어 들고는 갑작스럽게 클라리사와 키스하던 그녀다. ‘선물을 받았는데, 꽁꽁 포장한 선물을 들여다보지 말고 그냥 가지고 있어,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이아몬드나 뭔가 무한히 소중한 것이 겹겹이 싸여 있었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동안 클라리사는 살짝 그것을 열어 보았던가, 아니면 그 타는 듯한 광채가, 계시가, 종교적인 감정이, 뚫고 나왔던가!’ 그 옛날이 무색하게도 샐리는 부르주아의 아내이자 아이를 다섯 가진 어머니, 레이디 로시터가 되었다.
반짝이고 통통 튀던 그 날, 그 꿈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쇠락한 삶과 일상만 가득한 오늘이 남았을 뿐이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클라리사가 아닌 댈러웨이 부인으로 사는 것은? 그녀는 왜 그렇게 파티를 열려 하나? ‘피터와 리처드, 두 사람 모두가 그녀를 부당하게 비판하고 부당하게 비웃는 것이다 (......) 그들은, 적어도 피터는 그녀가 자신을 내세우기를 즐긴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유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 모으기를 좋아한다고. 명사들을. 한마디로 속물이라고. 뭐, 피터는 그렇게 생각하라지. 리처드는 그녀가 흥분하는 것이 심장에 좋지 않은데 파티를 연다고 해서 걱정하는 것뿐이다.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틀렸다. 그녀는 단지 삶을 사랑할 뿐이었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클라리사는 삶을 향해 소리 내어 말한다.
‘난 샹들리에에서 샹들리에로 이리저리 흔들릴거야’
Sia의 <Chandelier>는 파티걸의 노래다. 하나 둘 셋 마시고, 하나 둘 셋 마시지. 상처 받지도, 느끼지도 않고, 모든 것을 삭여내. 전화벨과 초인종에서 사랑을 느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고, 밤을 지나는 새처럼, 눈물이 마를 때까지 날아다니지. 삶을 버티고 있잖아, 아래는 보지 않아. 눈을 꼭 감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잔을 붙들고, 오늘 밤을 견뎌내. 뮤직비디오에서는 살색 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이드처럼 날뛴다. 흔들리는 샹들리에처럼, 그 커다랗고 무거운 키치, 가장 영롱하게 반짝이는 허구처럼. 잠과, 죽음과, 밤의 어둠과 싸우듯 뛰어다닌다. 그리고는 한껏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귀부인처럼 정중히 인사한다. 글쎄, 삶이 이런 것이라면 왜 굳이 버티는 걸까. 스스로는 빛날 수 없이, 난반사로 페르소나를 만들어내는 샹들리에처럼 살아가면서. 하지만 그런 삶이라도 버티고, 바람에 맞서는 새처럼 부딪치고 견디려 한다. 그 천진한 절박함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주인공을 죽일까 했는데......’
영화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구상한다. 역시 여주인공은 자살하는 편이 낫다. 아주 사소한 일로 죽는 것이다. 그녀,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죽는다. 죽으니까, 죽는 거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 버지니아는 죽은 새의 무덤 옆에 누워 자신과 새와 댈러웨이 부인을 같은 선상에 놓는다. 소설에서 내일이란 보이지 않는다. 깊고 먼 과거와 오늘이 있을 뿐이다. 내일이 없는 파티와 샹들리에 같은 허위로 둘러싸인 예절들. 삶을 위해 파티를 연다고 하였지만, 이런 파티라니. 이래서야 삶과 다를 것이 뭔가. 쇠락은 공기처럼 만연하다. 시간을 석면처럼 들이쉬며, 살고, 늙는다. ‘하루가 지나면 또 하루가 올 것이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 그 후에는, 죽음이란 얼마나 믿어지지 않는지! 죽음이 끝이라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 모든 것을, 모든 순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음을 바꿨어.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야겠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셉티머스는 1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젊은이다. 전쟁의 충격으로 PTSD를 앓는 그의 정신은 온전치 못하다. 죽은 친구 에번스의 망령이 계속 나타난다. 세계는 괜찮은 듯하다가 이지러지기를 반복한다. 그에게 가해지는 의사들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처방은 그를 오히려 옥죌 뿐이다. 홈스 의사는 그에게 ‘인간 본성’이다. ‘홈스가 오고 있었다 (......) 남은 것은 창문뿐이었다 (......)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보자.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햇볕이 쨍쨍했다. 다만 인간들이-대체 그들은 뭘 원하나? (......) 홈스가 문 앞에 왔다.’ 한시도 마주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을 피하여, 결국 그는 창 밖으로 몸을 날리고, 철책에 몸이 뚫려 죽음을 맞는다.
‘왜 누군가 죽어야만 하지? -남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파티의 중간에서 클라리사는 젊은이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내 파티 한복판에 죽음이라니, 그녀는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겠지. 우리는 늙어 갈 거야. (......)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그녀는 두렵다. 인생이라는 것을 끝까지, 평온히 지니고 살아내야 한다는 무력감. 그 공허, 비존재, 죽음 충동 말이다. 하지만 그 청년은 자살했다. 삶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자살. 기꺼이 죽는 것과 기어이 사는 것. 클라리사가 선택한 것은 삶이었다.
‘어떤 즐거움도, 하고 그녀는 의자들을 바로 놓고 책 한 권을 서가에 꽂으며 생각했다. 어떤 즐거움도 젊은 날의 승리들과 결별하고 살아가는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가 가끔 기쁨에 떨면서 해가 뜨는 것을, 날이 저무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는 비할 수 없었다.’ 클라리사는 부어턴에서 대화로 분주한 도중 그랬던 것처럼, 창가로, 테라스로, 하늘로 나아간다. 바람이, 막 지는 장엄한 하늘이, 맞은편 방의 노부인이, 시계의 종소리가, 계속되는 모든 것이, 밤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를 감싼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다. 그 용감한 젊은이. 그러나 클라리사는, 그래도 삶을 사랑한다. 그래도 살아간다. 살아가 보기로 한다. 흔들리는 샹들리에는 아직 꺼지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거기 그녀가 와 있었다.’
소설은 파티장에서 피터의 눈 앞에 클라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 후에 부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셉티머스의 죽음에서 삶을 본 댈러웨이 부인 말이다. 샹들리에의 촛불, 사람들, 삶들이 모인 파티는 봉헌이다. 삶을 향한 찬란한 찬가이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30년 전의 젊음에서부터 끌어와 허망한 오늘을 살아간다. 직접 꽃을 사러 간 댈러웨이 부인은 거기, 생의 문 앞에 이미 와 있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는 주머니에 돌을 채우고 강에 몸을 담갔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꺼지고, 천장에서 떨어지고, 술잔을 든 채 깊은 밤 속에 잠이 든 파티걸. 셉티머스가 되어버린 댈러웨이 부인.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다만......’
붙잡아 믿고 싶었던 소설적 진실과 누추한 현실이 여기에 있다. 죽음에서 떨어져 나온 삶이란 정말이지 보잘것없다.
사진 출처: 영화 <디 아워스>
<댈러웨이 부인> 본문 출처: 열린책들 세계문학 008 <댈러웨이 부인>, 최애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