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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고 싶어요

영어를 잘한다는 건 무엇일까

by 불이삭금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면 부러워하고, 몇 년을 공부해도 늘지 않는 영어실력에 비관하기도 한다. 영어 책이나 학원에 쏟아부은 돈만 해도 꽤 될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할까?


아니, 질문이 잘못됐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를 잘하는 건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영어를 잘하면 성적도 잘 받고, 취직도 잘 되고, 세계 어디를 가든 큰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못해도, 든든한 발판이나 도약판이 되어줄 수 있으니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여기에서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바로 이거다. '영어를 잘한다'는 게 과연 뭘까?


일단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사람은 제외해 보자. 한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나 영어 잘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토익 시험을 900점 이상 받아도 막상 외국인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인과 무리 없이 영어를 하면서도 발음이 토종 한국식이면 역시 영어를 못 한다고 생각한다. 발음은 유창한 버터 발음인데, 문법엔 영 젬병이어서 시험영어에서 늘 낙방을 하면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영어를 잘한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자,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나왔다. 바로 '기준'이다.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영어가 필요한 기준이 있을 것이고, 그 기준만 만족시키면 영어를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회화, 문법, 독해, 발음 등에 있어서 한치도 틀리지 않는 완벽한 영어'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우리 모두가 이런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건 마치 달리기를 하려면 모두 42.195km를 뛰어야 하고, 헬스클럽에 다니면 모두 애플 힙과 식스팩을 가져야 하고, 집에서 칼국수를 한번 해 먹으려면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을 가졌다는 30년 전통 칼국수집만큼의 맛을 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다. 모두의 기준이 같을 수는 없다. 모두의 기준이 이렇게 높을 필요도 없다.


모두의 기준이 같을 수는 없다. 모두의 기준이 이렇게 높을 필요도 없다.


예전에는 나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해야 영어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발음도 원어민처럼 해야 하고, 문법도 다 맞아야 하고, 외국인 앞에서도 떨지 않고 쏼라쏼라 해야 영어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가 원어민이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각자 자신에 맞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가는 것이 영어를 잘하는 거라 생각한다.


외국에 여행 나갔을 때 불편함 없이 호텔 예약을 하고 싶은 사람, 생활회화를 익히고 싶은 사람, 외국에 유학을 가서 두꺼운 전공서적을 원서로 읽고 영어로 리포트 쓸 일이 많은 사람, 영화를 좋아해서 외국의 영화 사이트를 영어로 읽어보고 싶은 사람. 각자의 목표와 기준에 맞춰 영어를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그 기준에 도달했다면 그 사람은 영어를 잘하는 것이다.


자신이 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하는지, 왜 영어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라.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당신은 영어를 잘하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영어 교재를 3권 출간했다. 유명한 작가의 영어책을 대필한 적도 있고, 영어 교재에 이름은 걸지 않은 채 집필진으로 참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고백하건대, 내 영어는 완벽하지 않다. 몇 시간에 걸쳐 영어로 글을 쓰고 퇴고를 해도 다음날 살펴보면 문법적 오류가 눈에 띄기도 하고, 외국인과 얘기를 할 때 단어가 생각이 안 나 버벅거리기도 하고 콩글리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어로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뭐야! 문법이 틀렸잖아!"하고 태클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큰 불편 없이 생활하기" 기준으로 보자면 난 영어를 잘한다. 영어로 된 공문도 별 무리 없이 해석하고, 학교 선생님과 면담하는 일도 걱정 없다. 은행이건, DMV에서 운전면허를 갱신하는 일이건 큰 스트레스 없이 해결할 수 있고, 병원이나 보험회사와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전화영어를 하는 것도 문제없다. 가끔 문법에 안 맞는 표현도 쓰고, 상대방 말을 못 알아들어서 "Pardon?"을 주기적으로 쓰기도 하고, "어.. 음.." 하며 다음 단어와 문장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려 애쓰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큰 불편 없이 생활하기" 기준에서는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영어로 동시통역하기"나 에릭 남처럼 "영어로 인터뷰하기"가 기준이라면 난 영어를 못한다. 영어로 들은 문장을 그 자리에서 매끄럽게 우리말로 푸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또한 돌발상황이 많은 인터뷰를 영어로 진행하는 것도 내게는 힘든 일이다. 내 꿈인 "영어로 소설 쓰기" 기준으로 보더라도 내 영어는 아직 좀 모자라다. 그러나 "내가 아는 영어를 재미있게 글로 풀어쓰기" 기준이라면 난 영어를 잘한다. 아무래도 글로 쓸 때는 여러 번 퇴고도 거치고, 모르는 정보도 더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내 약점을 줄이고, 글을 잘 쓰는 장점을 더욱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래를 잘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고음이 높이 올라가야 하고, 음정이 정확해야 하고, 감정 전달이 확실해야 하고, 리듬을 잘 타야 하고... 이 모든 조건을 다 충족해야만 노래를 잘하는 거라면, 그런 사람만 노래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가수가 되어야 한다면 얼마나 우중충하고 슬픈 세상이 되겠는가. 국카스텐의 하현우, 김연우, 타이거 JK, 다이내믹 듀오, 루시드 폴, 장범준. 저마다 각자의 기준에서, 자기만의 분야에서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다. 누구는 고음이 기가 막히고, 누구는 읊조리듯 말하듯 부르는 노래가 가슴을 울리고, 누구는 신명 나는 랩으로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다. 그런데도 어느 한 가지 기준만 획일적으로 들이대며 나머지 가수들은 노래를 못 한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영어도 마찬가지다. 발음, 문법, 회화, 독해 모든 분야에 걸쳐 완벽한 원어민이 되려고 하고, 그러지 못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은 너무도 무모하다. 당신의 목표와 기준은 무엇인가? 무조건 "영어를 잘하고 싶어요"하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좌절하고, 영어가 안 들리면 슬퍼하고, 말문이 막히면 "난 안 되나 봐"하며 머리를 쥐어뜯지 말고 스스로의 목표와 기준을 세우자. 온 국민이 다 원어민이 될 필요는 없다.


앞으로 이 브런치북에서는 영어를 공부하며 내가 느낀 점들, 내가 공부했던 방법들 등 내가 좋아하는 영어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영어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영어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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