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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Mar 14. 2024

어른을 위한 동화

<긴긴밤>

제목: 긴긴밤

지은이: 루리



출처: 교보문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그래서 브런치에 올리는 책 대부분은 영어 원서로 읽는다. 이번에 한국에 사는 친구가 고맙게도 이 책을 보내줘서 읽게 됐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한글로 된 책을 읽을 때는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이렇게 신날 데가!



내용은 너무 감동적이다


이 책은 무려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탄 작품이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책이 좋을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이야기의 기본 뼈대는 단순하다. 흰뿔코뿔소와 펭귄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점박이 알을 지켜내서 결국 아기 펭귄이 태어난 이야기. 그 펭귄이 마지막엔 혼자서 바다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


지나치게 내용을 압축했지만, 서로 다른 동물의 연대와 사랑 이야기를 읽다 보면 따스하고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힘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코뿔소에게 존경심도 들고, 알을 지키기 위한 펭귄의 노력이 고맙고, 혼자서 바다로 떠나는 아기 펭귄을 응원하게 된다. 그때마다 자기 인생에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런데, 읽으면서 살짝 아쉽기도 했다. 물론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거다. 아래에서 지적할 부분은 그저 한 개인의 의견으로만 봐 주시길.



어른을 위한 동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다. 어른이 읽어도 울컥한다. 그래서 아쉬웠다.


어린이문학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닌가 싶어서. 물론 아이들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거기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른에게 더 맞는 책 같다. 혼자서 용감하게 길을 나서는 아기 펭귄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기 펭귄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애를 쓴 코뿔소와 어른 펭귄의 노력을 다룬 이야기 같아서. 다음 세대를 위해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 같아서.


"애들이 이런 거 읽으면 재미있어 하겠지?"하고 아이들의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니라 "애들한테 이런 내용을 들려주면 정말 좋겠다"하고 어른의 시각으로 판단한 책 같아서.


이야기가 틀에 얽매이듯 교훈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이건 우리나라 동화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책 안에 "자, 이게 교훈이야. 봤지?"하며 교훈을 들이민다. 제목은 물론이요 첫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이 책은 감동적일 거고,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거야, 하며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이건 개인의 취향이니 그러려니 해 주시길. 그저 재미있어서 신나게 읽다가 나중에 더듬어 보면 "아, 그랬구나."하고 깨닫는 동화 스타일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나도 프로 불편러인가


책을 읽으면서 또 한가지 아쉬웠던 건 작가의 문체였다. 처음 책을 읽을 때 이 책이 원서의 번역본인 줄 알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왜 그런 느낌이 든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등장인물들 이름이 노든, 앙가부, 치쿠 같은 외국 이름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요 등장인물이 한국 토종 동물이 아니라 흰뿔코뿔소와 펭귄이니, 외국 이름이 있는 건 당연하다.


코뿔소 노든이 자신의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하면서도 아기 펭귄이 그를 "아빠"나 "아버지"라고 안 부르고, 심지어는 "아저씨"라고도 안 하고 "노든" 하고 이름을 불러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동화에서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수는 없다.


그럼 나는 왜 이 책을 읽으며 원작이 아닌 원서의 번역본 같다는 생각을 한 걸까? 그건 바로 문체 때문이었다. 전반적으로 문장이나 문체가 원서를 번역한 번역체느낌이 난다. 아니, 문어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p. 15)


할머니 코끼리의 대사다. 현실에서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었다. 마치 It was lucky for us to have met you를 번역해 놓은 듯한 문장이다.


어쩌면 동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부러 현실적인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를 쓴 것일 수도 있다. 약간 먼 나라 이야기, 환상적인 다른 동네 이야기처럼 들리게 하려고.


그렇다면 성공이긴 한데. 그래도 자꾸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국 작가가 쓴 한글 소설인데 왜 계속 외국책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며 내 문체도 번역투에 많이 물들어 있지는 않은지 반성 많이 했다.)


어쨌든, 책은 형식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기에 (그리고 저자의 문장이 번역체 같다고 느낀 건 나만의 생각일 수 있기에) 책의 장점을 가릴 큰 단점은 아니라고 본다.


나부터도 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힐 생각이니까.






내가 사랑한 문장


1.

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p. 9)


2.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3.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p.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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