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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Mar 21. 2024

번역가를 위한 모둠 접시

<여백을 번역하라 by 조영학>

제목: 여백을 번역하라

지은이: 조영학






출처: 교보문고



번역가의 삶이 궁금하다면, 번역 공부를 배우고 싶다면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가 관련 서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번역 실전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 번역 노하우나 용어 등을 배울 수 있는 책. 또 하나는 번역가는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번역가는 어떻게 사는지, 어디에서 일감을 얻고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알려 주는 에세이 같은 책.


<여백을 번역하라>는 영리하게도 그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하고 있다. 마치 번역가를 위한 모둠 접시처럼.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는 앞부분에서는 번역가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뒷부분에서는 번역 실전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막 번역에 입문하려는 사람 혹은 '번역가'의 삶이 궁금한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다.



의문점이 들었던 부분


책을 읽으면서 살짝 의아했던 부분이 있다. 번역가는 책의 내용을 모두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그렇기에 책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안 되는데. 때로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문장이 애매모호해서 혹은 그 나라의 관습이나 문화를 잘 알지 못해서 이해하는 데 애를 먹을 수도 있다.


전자가 이유라면 어찌 됐건 번역가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실력을 늘리는 수밖에 없지만, 후자일 경우는 답이 없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거나 여기저기 정보를 찾아보는 수밖에.


책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책의 원저자다. 따라서 가끔은 번역가가 원저자에게 책 내용을 물어볼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확실하게 답을 줄 상대는 저자이리라. 실제로 번역가 A은 저자와 이메일 교신으로 도움을 많이 얻는다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한 번도 답장을 받아본 적이 없다. 스티븐 킹, 데니스 루헤인, 버나드 콘웰 등 이메일 주소를 검색해서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p. 62)


책 번역을 맡은 번역가인데 원저자와 교신할 방법이 없다니. 원저자의 출판사에 문의하면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든 아니면 자기들이 질문을 대신 전달해 주든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번역가가 원저자의 이메일 주소를 '검색'해야 했다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번역은 원저자나 그쪽 출판사와 일절 소통도 없이 이루어졌던 걸까?


설마. 모두 이러진 않겠지?

설마. 지금도 이러진 않겠지?



공감이 갔던 부분


<긴긴밤> 독후감을 올리면서 작가의 문체에 대한 얘기를 했다.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번역투가 느껴졌다고. 다른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게 좀 아쉬웠다고. 책을 읽다가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아서 반가웠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색한 번역 투가 꼭 필요한가? (p. 86)


또한 저자는 번역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 주고 있는데. 내가 이미 읽은 책을 권하고 있어서 괜히 더 반가웠다.


<<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면 무엇보다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을 권한다. 지금껏 실용서가 적잖이 나왔지만 대부분 번역가가 '경전'으로 여기는 책이며 당연히 나도 크게 도움을 받았다. 윤영삼의 <갈등하는 번역>도 그런 점에서 훌륭한 실용서다. 조금은 내용이 어렵고 문체가 딱딱하긴 해도 저자가 본격적으로 번역학을 공부한 터라 번역과 번역 방법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p. 122) >>






내가 사랑한 문장


1.

소설은 소설답게 번역하라. (p. 36)


소설이냐 인문서냐 과학교양서냐에 따라 문체나 표현이 달라져야 한다. 공감이 가는 부분.


2.

다시 강조하지만 "What are you talking about?"의 의미가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에서 "병신, 지랄하고 자빠졌네"까지 확대될 수 있으며, 또 그런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할 때만 역자들의 자연스러운 비속어 구사가 가능해진다. (p. 41)


비속어라면 나도 지지 않는데.


3.

우스갯소리지만 남의 나라 말은 어렵고 출판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p. 55)


어려운 외국어와 마감 기한은 번역가의 애환이다. 여기에 박한 급여까지 더하면, 번역가의 3대 고충되시겠다.


4.

번역가의 최대 적은 무지가 아니라 게으름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자. 검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p. 60)


넵!


5.

나는 '입말'이 가장 좋은 '글'이라는 이오덕, 유시민의 주장에 동의한다. "언어는 말과 글이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입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글말)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p. 133)


나도 동의한다.


6.

다만 번역을 하다 보면 우리말 규칙의 잣대가 작가보다 오히려 번역가에게 엄격하다는 사실 정도는 지적하고 싶다. 작가가 번역투를 사용하면 '독특한 스타일'이겠으나 번역가의 경우는 '번역가가 우리말도 모르냐'는 식의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p. 151)


<광마회귀>라는 웹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그것이 나다."라는 독특한 말투를 쓴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나중에는 이 말투에 정이 들어서 언제 또 나오나 기다리게 된다. 현실에서 친구나 가족에게 "그것이 나다"라는 말을 써먹었다는 댓글도 많이 달릴 정도. 작가가 그만큼 글을 잘 쓰기도 했거니와, 번역투이긴 하지만 주인공의 독특한 성격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번역가가 "그것이 나다."라는 말을 썼다면. 아마 나부터도 '왜 말을 이렇게 이상하게 하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작가와 번역가의 차이. 작가와 번역가를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지점이었다.


7.

외국어 문장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려 하지 말고 외국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한 뒤 그에 걸맞은 우리말 시스템과 입말을 찾아주자. (p. 154)


8.

번역은 표현 싸움이다. (p. 166)


9.

"여백을 번역하라"는 제목은 외국어를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다시 쓰는 것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이 책에 끌어들였다. (p.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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