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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Mar 28. 2024

작가에게 퇴고란

더 나은 글을 위한 여정

낯선 책에서 익숙함이 느껴진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를 읽었다. 1981년에 출간된 것이니 무려 40년 전 책이다. 단편소설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카버의 대표작 중 하나이고, 간결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라 영어 글쓰기 공부도 할 겸 읽게 됐다. 그런데 수록된 글 중 <The Bath>라는 글을 읽다가 갸우뚱했다.


어라? 이거 뭔가 익숙한데?

몇 년 전에 읽었던 그의 단편소설집 <<Cathedral>>에 수록되었던 <A Small, Good Thing>과 내용이 너무도 흡사했다.


하지만 문체가 조금씩 달랐고, 무엇보다 제목이 달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같은 소재'로 글을 쓴 거겠거니 하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나 곧 역시 둘이 같은 소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같은 소재였을 뿐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과 전개가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조사를 해보기 시작했다.


<The Bath>는 1981년에 출간됐고, 내가 같은 소설이라고 생각한 <A Small, Good Thing>은 1983년에 출간됐다. 알고 보니 저자가 이전 작품을 수정해서 <<Cathedral(대성당)>>이라는 단편 소설집에 재수록한 것이었다. 대개 소설은 한번 출간하면 끝이지만, 단편 소설의 경우는 내용이 수정되거나 뒷얘기가 더 덧붙여지는 경우도 있다.


출처: 교보문고



책의 줄거리와 결말 (스포 포함)


<스포 주의> 이 글에서는 두 소설의 차이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결말을 포함한 줄거리를 모두 적었다. 책을 읽으실 분, 결말을 미리 아는 게 싫으신 분은 밑의 "끝까지 고민하고 수정하라"로 바로 넘어가시길.


두 책의 기본 줄거리는 같다. 우선 첫 번째 책 <The Bath>의 줄거리와 결말이다.


곧 스카티의 생일이 다가온다. 엄마는 아들 스카티를 위해 제과점에 특별 맞춤 생일 케이크를 주문한다. 그런데 생일날 아침 스카티는 그만 차에 치이고 만다. 외상은 없었지만 머리를 크게 부딪힌 스카티. 병원에 이송된 그는 다른 모든 징후가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잃고 계속 누워만 있다.
노심초사하며 아이 곁을 지키느라 녹초가 된 엄마는 기운도 차릴 겸, 불안도 떨쳐낼 겸,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잠시 집으로 향한다. 목욕이라도 하며 정신을 차린 후 되돌아올 심산이었다. (그래서 제목이 bath인가.) 그런데 집에 오자 전화벨이 울린다. 스카티가 드디어 깨어났나? 엄마는 황급히 수화기를 든다.
사실 전화를 건 사람은 케이크를 주문받았지만 아이 엄마가 케이크를 찾으러 오지 않아서 화가 난 제과점 주인이었다. 사실은 진상 고객이 아니라 아들의 사고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잊은 거였지만. 스카티의 사고 소식을 모르니 그는 짜증이 났을 수밖에.
수화기를 든 두 사람.
주문한 케이크를 안 찾아가서 화가 난 제과점 주인. 병원에서 온 전화인가, 혹시 자신이 집에 온 사이에 아들이 깨어났을까 기대에 찬 엄마.
엄마는 수화기에 대고 묻는다.
"아, 혹시 스카티 일로 전화하신 건가요?"
"네. 스카티에 대한 겁니다."


과연 저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긴장감이 높아지는 순간에 소설은 끝난다.






그런데 <A Small, Good Thing>에서는 이 이후에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 아래는 <A Small, Good Thing>의 결말이다.


의식을 잃고 있던 아들 스카티는 결국 사망하고, 부부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때 또다시 걸려온 제과점 주인의 전화. 이에 감정이 폭발해 버린 부부는 이른 새벽 제과점을 찾아가게 되는데...


주문만 하고 찾아가지 않은 케이크 때문에 짜증이 나서 자꾸 전화를 해댔던 제빵사. 아들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과 슬픔을 터뜨려버리고 싶은 부부.

뭔가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날 것 같지만, 사실 새벽녘의 제과점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을 알게 된 제빵사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이들 부부에게 갓 구워낸 빵을 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빵은 이들의 허기뿐 아니라 구멍 난 가슴까지 채워준다.






영어 제목은 <A small, good thing>인데 우리말 제목은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책을 직접 읽어보면 진짜로 별것 아닌 것 같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걸 알 수 있고, 그래서 꽤나 감동적이다.



끝까지 고민하고 퇴고하라


두 소설은 소재가 같고 출발이 같지만 그 분위기나 결말은 매우 다르다. <The bath>는 음울하고 슬프지만 <A small, good thing>은 따뜻하고 기운이 난다. 만일 작가가 첫 번째 글 <The Bath>를 쓴 후에 그냥 놔뒀다면 어땠을까? 더군다나 이미 출간까지 마친 책이니까 조금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냥 놔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다시 수정하고 재출간했기 때문에 <A small, good thing>이라는 더 멋진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최후의 순간까지 고민하고 퇴고하라는 큰 교훈이기도 하다. 글은 완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퇴고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나도 이 점을 꼭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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