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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Mar 07. 2024

번역가를 위한 등대 같은 책

<번역의 탄생>

제목: 번역의 탄생

지은이: 이희재



출처: 교보문고


번역가라면,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나는 본디 '~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느니,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여행지'라느니 하는 걸 싫어한다. 도대체 네가 뭔데 나한테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을 들이미느냐 싶어서. 그렇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이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번역을 진지하게 업으로 삼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으라고. 수험생이 성문 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끼고 살듯이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무릇 책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고.


수년간 번역가로 활동해 온 저자는 번역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간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출발어(영어나 일본어 등 원서가 적힌 언어)를 우대하고 출발어 중심의 번역을 해 왔기 때문에 도착어인 우리글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거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글의 특징을 잘 살린 번역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한국인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글, 문턱이 낮은 글, 술술 읽히는 글. 무엇보다 한국어의 글맛을 살린 글.


한국 독서 시장 전체에서 번역서가 차지하고 있는 크기를 생각해 볼 때, 과장 좀 보태서 번역가의 글쓰기는 한국인의 독해 및 글쓰기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글맛을 살리는 글쓰기


번역은 단순히 뜻만 통하게 옮기는 일이 아니다. 흔히 AI가 상용화되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직업으로 번역가를 꼽는다. 이미 AI 번역은 꽤 정확해졌고, 웬만한 번역은 인터넷과 AI 프로그램으로 해결 가능한 시점에 와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전문 번역가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단순히 '뜻'만 통하는 일차원적 번역이 아니라 우리말의 '글맛을 살리는' 멋진 번역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말과 글은 이미 오랫동안 일본어와 영어의 번역체에 침식당했다. 외국과 교류가 생기면서 새로운 외래어가 들어오거나 기존의 말이 변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말은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별다른 고민도 없이 외국어와 외래어, 번역어를 무작위로 받아들였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우리말 지키기를 시작해야 하며, 그 선봉에 서야 하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을 보자. 책 본문에 나오는 문장을 각각 다음, 네이버, 구글에 있는 자동 번역기로 번역해 봤다.


* I doubt if that is what she told. (p. 171)

=> 카카오 번역: 나는 그녀가 그렇게 말했는지 의심스럽다.

=> 파파고 번역: 그녀가 그렇게 말했는지 의심스럽다.

=> 구글 번역: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상한 문장은 없다. 뜻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뿐더러 문장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문장이 소설 속 대사라고 생각해 보면, 저 문장은 굉장히 어색하다. 실제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저자는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설마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했을라고.


같은 뜻이지만 훨씬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됐다. 소설 속 대사로도 어색함이 없다.

내친김에 하나만 더 보자.


* I am made of flesh and blood. (p. 272)

=> 카카오 번역: 나는 피와 살로 만들어졌다.

=> 파파고 번역: 나는 육체와 피로 이루어져 있다.

=> 구글 번역: 나는 살과 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번역이 잘 되었다. 오역도 없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문장을 어떻게 옮겼을까.


나는 목석이 아니다.


나는 나무나 돌이 아닌 피와 살로 만들어진 사람이다,라는 말을 저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이렇게 번역을 하려면 이 문장이 나온 배경이나 문맥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오역이 없게 번역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맥이나 더 나아가서는 책의 주제까지 모두 꿰뚫고 있어야 뜻도 정확하면서 글맛을 살리는 번역을 할 수 있다.


분초를 다투는 급한 일이거나 정확하게 뜻만 옮기는 게 중요한 간단한 번역이라면 AI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현재의 AI 번역은 '오역을 없애고 정확한 번역을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 거기엔 성공했다. 하지만 글맛을 살리는 건 사람 몫이다.


'글맛을 살리는' 번역이란 허세가 가득하거나 멋 부리는 문장이 아니다. 우리말의 특징이 잘 살아있으면서도 읽기 쉽고, 이해도 쉬운 글이다.



영어 교육이 글쓰기를 망쳤다


번역서를 읽다 보면 굉장히 어색한 문장이 많다.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출발어(영어) 중심의 번역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거기에 더해 한국의 영어 교육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문장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뒤에 나오는 문장이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이지만, 학교나 학원에서는 앞 문장처럼 번역하라고 가르친다.


It's too soon to tell.

너무 일러서 말하지 못한다 vs. 아직 판단하기엔 일러


영어 선생님이 이 문제를 낸 출제 의도는 학생이 too ~to 구문을 알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거니까. "너무 ~해서 ~하지 못하다"라고 정확히 적어야 한다.


He said he'd come, too.

그도 역시 올 거라고 말했다 vs. 걔도 올 거래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said와 too도 콕 집어서 해석해 줘야 하고, 'd가 사실 would의 축약형이기 때문에 미래를 나타내는 뜻이라는 걸 보여 줘야 한다. 즉, 학생이 해당 문장의 모든 단어를 알고 있으며, 전부 맞게 번역을 했다는 걸 보여 줘야 하는 거다.


이런 영어 교육을 12년 넘게 받으면서도 글쓰기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영어 원서를 번역하는 번역가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우리말의 글맛을 살린 문장보다 영어의 모든 단어를 직역한 번역체에 익숙해진 것 아닐까. 급기야 한글로 적힌 책을 읽는데 머릿속엔 원문이었을 영어 문장이 고스란히 떠오를 정도로.


적어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만큼 내 문장은 번역체에 오염되어 갔다.



번역가뿐만 아니라 글 쓰는 사람 모두를 위한 책


위에서 기술한 이유로, 이 책은 번역가뿐 아니라 글 쓰는 이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요새는 종이책을 낸 작가가 아니더라도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직업과 관련한 전문 서적을 출간하는 사람들도 많다. 만일 자신의 문체가 번역체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이 크게 도움 될 것이다.


<번역의 탄생>번역가뿐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내 지난 글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를 읽고 쓴 독후감에서 아래와 같이 아쉬운 점을 토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번역가'를 위한 내용과 '작가'를 위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번역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두 가지를 모두 가르쳐 준다는 게 나쁜 건 아니다. 꼭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그 두 가지가 구분 없이 섞여 있다 보니 읽는 독자 입장에서 는 불편했다.
인터넷에서 읽은 어느 독자평에서는 번역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오히려 제목에 '번역가'를 넣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이 좋은 책을 못 읽는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그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나는 번역을 공부하고 싶어서 책을 펼쳤는데 다른 내용이 있네'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때와 지금은 왜 말이 다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에서는 번역 이야기를 하다가, 적절한 번역 예시 없이 갑자기 우리말을 잘 쓰는 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독자 입장에서는 너무 뜬금없고 불필요한, 혹은 주제와 무관한 내용처럼 느껴진다.


고양시에 있는 한 도서관을 예로 들면서, 계단 아래에 붙어 있는 '발걸음은 사뿐사뿐'이라는 문구와 균형을 맞추려면 계단 위에도 '기대지 마시오'라는 문구 대신 '기대면 휘청휘청'을 써 붙이라는 말이 어떻게 번역과 연관이 있겠는가. 한참 번역 얘기를 하다가 왜 느닷없이 안내 문구 잘 쓰는 법을 설명하느냔 말이다.


반면, <번역의 탄생>에서는 영어 문장을 제시하고 그 문장을 아무 생각 없이 번역체로 옮겼을 경우와 글맛을 살려서 번역한 경우를 서로 비교해서 보여준다. 같은 문장이라도 글쓴이에 따라 글이 얼마나 맛깔나게 변하는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로 얼마나 번역체에 물들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번역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마도 잘못된 영어 교육 때문에) 작가들의 글이 번역투에 물들어 가고 있다. 자신의 문장이 역투에 물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번역가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사랑한 문장


원래 독후감을 적으면 항상 '내가 사랑한 문장'을 적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그게 없다. 내가 사랑한 문장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아무리 책이 좋다기로 책 한 권을 통째로 옮겨 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그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번역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항상 옆에 끼고 틈틈이 살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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