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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Jan 17. 2022

침묵의 상상

| 병아리는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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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반겨주는 사람과 꾸중하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에 왔다.




“어머,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너 머리 꼴이 그게….”




오후반 어린이들에 간식을 나눠주던 달님반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하자마자 원장실 문이 열리면서 나를 닮은 얼굴이 나왔다.




“원장 선생님, 그래도 도와주러 오셨는데….”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라 어쩔 수 없지만, 너 지난번처럼 애들한테 이상한 말 하지마. 알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하하….”




차례대로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켜봐 주고 시소에서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낙엽을 손으로 모아서 던지는 아이의 옷을 탁탁 털어주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가 버렸다.


힘주어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체구의 아이들이라서 얼마나 조심했는지 시간이 되어 들여보내고 나니 식은땀이 났다.




“갑자기 오셔서 정신없죠?”

“뭐, 늘 그렇죠.”

“5세 반 아이들은 점잖은 애들이 많아서 괜찮을 거예요.”




다음 타임으로 넘어가자 유치원 뒤뜰 놀이마당에 다른 아이들이 줄을 서 입장한다. 손을 모아 단체로 인사를 하더니 정말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로 각자 알아서 차례를 지키며 놀기 시작했다.


몇 명의 순서를 정해주고 나니 할 일이 사라져 한편에 있는 벤치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까부터 내 옆에서 조용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아이 하나가 옆에 조심스럽게 와서 앉는다.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가 유행인 건지 아니면 이 동네 미용실 원장님이 개성 존중 따위를 모르시는 건지 하나 같이 비슷한 머리스타일인데, 그 와중에 다들 다른 분위기다.


반듯한 갈색머리, 반듯한 까만 머리. 볼이 통통하고 반들반들한 아이는 앉자마자 나를 향해 웃으며 그런다.




“선생님, 너무 예뻐요.”

“선생님 아니고 형. 예쁜 거 아니고 멋있는 거.”

“선생님 아니에요?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여기 원장 선생님이 형 엄마라서.”

“우와, 원장 선생님이 엄마예요? 좋겠다.”

“왜?”




원장 선생님이 엄마라서 좋겠다니. 무슨 일이야.


대꾸해주면서도 눈은 아까부터 개미만 바라보고 있는 갈색머리의 아이와 시소 위에 앉아 사색을 하는지 멍하게 하늘을 보고 있는 아이와 미끄럼틀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두 명의 아이들을 계속 돌아가며 보고 있었다.




“원장 선생님은 내가 오이 안 먹어도 괜찮다고 하세요. 우리 엄마는 오이도 먹어야 한다고, 맨날 잔소리하는데.”

“그래?”




우리 엄마 차별하네. 나한테는 다 큰 놈이 아직 당근도 못 먹는다고 뭐라고 하고서는.




“그리고 또 내가 한솔이 좋아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어요.”

“한솔이는 누구야?”

“저기 쟤요.”




꼼지락거리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니 아까부터 쪼그리고 앉아 개미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갈색머리 아이였다.


남자아이가 같은 성별의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상할 것도 아니지. 아닌가…, 이상한 건가. 아니지. 그런 건 역시 별로다. 역시 열린 사고의 우리 엄마.  




“아,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쟤는 남자애 아니야? 한솔이가 왜 좋아?”

“당연히 한솔이가 제일 예쁘니까.”

“외모만 보네.”

“세현이랑 유진이 보다 한솔이가 눈도 크고, 또 한솔이는 갈색 머리도 예쁘고.”

“그게 다야?”

“그리고, 한솔이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자신이 저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누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그 인물이 생각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새끼.




“한솔이는 영어도 잘해요. 엄마가 외국인이라서.”

“이거 어린 게 벌써 외모 지상주의에 사대주의까지.”

“그게 뭔데요?”

“얼굴만 예쁘고 영어만 잘하면 좋다는 거잖아.”

“아니, 아닌데?”

“맞는데?”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아닌데…, 난 한솔이 정말 좋아하는데.”




볼이 점점 붉어지며 빵빵해지는 걸 보니 조금 더 놀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엄마한테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아니야?”

“…….”

“그렇지. 사실은 네가 한솔이를 좋아하니까 한솔이가 예뻐 보이는 거야.”

“아, 어, 아, 어……. 그런 것 같아요.”



튀어나온 오리주둥이도 들어가고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괜히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를 한번 힘주어 꾹 눌러 주었다. 작은 머리통의 절반이 한 손에 들어왔다.


꾹, 꾹. 귀여워. 꾹꾹.


힘주어 눌러주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는다. 돌아보니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문제의 한솔이가 서 있다.




“선생님.”

“어, 왜?”

“그거 그만해요.”

“아…, 미안.”

“우리 이제 들어가자.”




시계를 볼 줄 아는 건지 사색에 잠겨있던 아이들과 미끄럼틀 위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까지도 어느새 다시 줄을 서 있었다.




“개미 왜 봤어?”

“재밌잖아. 느린데 엄청 부지런하고.”

“키우고 싶은 거야?”

“어제 개미 나오는 만화 봤거든.”




차례대로 들어가며 그런 심도 깊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작은 머리들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개미 이야기에서 갑자기 어제 봤던 만화 이야기로 튀더니, 한솔이는 제 귀를 잡아당기며 그런다.




“스티치 흉내 내줄까?”

“하지 마. 싫어, 그거 무서워.”

“오케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할리우드 배우 같은 액션을 하더니 순순히 받아들인다. 문 앞에서 다시 손 모아 단체로 인사를 하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이제 보니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한걸, 그나마 같은 머리 스타일로 누르고 있는 것 같네.


홀로 남은 뒤뜰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대충 정리하고 손을 씻고 유치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각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또 와요? 다음에 오면 저랑 공놀이 해요.”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는 학부모님들을 기다리는 잠시 동안 몸집에 비해 좀 큰 것 같은 가방을 메고 내게 와 다리에 매달리며 묻는 볼빵빵이.


저절로 앞머리에 손이 간다. 귀여워. 꾹꾹. 귀엽네. 꾹꾹.




“다음에 오면.”

“야, 나랑 하면 되지.”

“넌 공놀이 못하잖아. 맨날 딴 데 보고 있으면서.”




한솔이가 다시 끼어들었지만 볼빵빵이는 나만 보고 있다. 아무래도 확실히 인물을 본다, 너는.

내가 앞으로 안 나타나야 저들의 애정 전선에 이상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웃기만 했다.


결국 볼빵빵이와 나를 번갈아보던 한솔이는 자신을 데리러 온 아빠를 보고 신발을 툭 차고 신는 둥 마는 둥, 손은 잡는 둥 마는 둥 집으로 돌아갔다. 볼빵빵이도 할머니 손을 잡고 해맑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안녕히 가세요, 손 모아 인사, 안녕히 계세요. 내일 또 봐요. 안녕….


그런 말들이 오고 가고 다들 엄마, 아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원을 하고 나니 건물은 순식간에 썰렁해져 버린다.


고생했다, 그 한 마디만 하고는 엄마는 다시 저녁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안쪽 원실로 바쁘게 가버렸다.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보육교사 자격증부터 미리 따라고 닦달한 건 이렇게 사용하려고 그런 건가 싶다.


아들이 요즘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 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래도 계산은 칼 같아서 알바비가 바로 입금된 건 좋다.




“네가 여기 왜 있어?”




건물을 나서자 어스름한 가로등 아래에 익숙한 녀석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막상 내가 나타나니 앞으로 오지도 못한다. 그럴 거면 왜 왔냐.




“아니. 지현이한테 물어보니까, 너 여기 알바 왔다고 해서. 연락은 계속 안 되고…….”

“답답하기는 했어? 넌 어제 새벽 내내 연락도 안 했잖아.”

“미안…. 미안해.”

“됐어. 꼴 보기 싫으니까 오늘은 좀 꺼져.”

“…….”

“꺼지라니까.”





주춤 거리며 정말 뒤로 물러선다. 아, 저 답답이, 이 멍청이. 정말 미쳤나 싶어, 속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선생님!”

“어, 우리 볼빵빵이.”




입가에 뭔가를 잔뜩 묻히고 손에는 먹다만 무언가를 들고 있는 볼빵빵이가 골목에서 나타났다.




“여기 살아?”

“네. 유치원 뒤에 우리 집 있어요.”

“그렇구나.”

“선생님 친구랑 싸워요?”

“아니, 아니야. 그런데 선생님 아니고 형이라니까.”

“선생님 친구도 예쁘네요?”

“그래? 나보다는 좀 못하지.”

“그래도 예뻐요.”




선하게 웃는 볼빵빵이를 보고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딱 그 생각이 들었다.




“부탁이 있는데, 저기 형한테 가서….”




귓속말로 속닥속닥 전달할 말을 짧게 이야기하니, 고개를 크게 끄덕인 볼빵빵이가 녀석에게 다가가 손을 휘젓는다. 어색하게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귀를 내어주니 속닥속닥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큰 속삭임이 내 귀에도 다 들렸다.




“선생님 눈에는 형이 제일 예쁘데요.”

“어, 아….”

“그런데 한 번만 더 술 마시고 개 되면 다시는 안 볼 거래요. 그런데 사람이 개가 될 수 있어요?”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볼빵빵이를 향해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올려줬다.


앞머리를 꾹꾹 가볍게 눌러주고 볼빵빵이를 찾으러 나온 할머니께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구부정한 자세로 있던 녀석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오늘 형이 좋은걸 알려줬네, 볼빵빵이.


맞아. 어제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는데 또 막상 눈앞에 있으니 아직도 예뻐 보이는 걸 보면 나도 쟤를 좋아하는 거겠지.


우리 볼빵빵이도 한솔이랑 계속 사이좋게 지내렴. 형도 최선을 다해 그래 볼게.


화이팅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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