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dcat혜진 Feb 05. 2022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 열병: 아픈 소나기가 지나고 나면  

-



매듭이 풀어져 있었다.


불안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징조처럼.


무대 위에 올라가기 전에 의상을 확인하던 중 묶어 두었던 셔츠 앞섶의 매듭이 풀어진 것을 멍하게 보고  있던 원우는 스태프가 묶어줄 때 까지도 그대로 망부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뭐야, 왜 이래? 정신이 빠졌네? 긴장되는 거야?”




시호가 어깨를 툭 치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매듭이 다시 풀어지면 어쩌지.”

“다시 묶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렇지. 다시 묶으면….”

“너무 격하게 추지 마. 끊어져.”

“…, 끊어질 수도 있겠네.”

“…….”

“그러면 안 되는데.”




시호는 원우의 혼잣말을 듣고 있다가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무슨 생각인지,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다 말해 줄 수 없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옆에서 봐도 가끔은 속을 알 수 없는 원우였지만, 확실한 건 언제든 제자리를 찾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돌아올 그 제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자신이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올라갈 시간이야.”

“응.”




오늘따라 짙은 보랏빛의 의상과 그에 맞춘 메이크업이 이상할 정도로 슬퍼 보였다.


치명적이고 뇌쇄적인 곡에 맞춘 것일 뿐인데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주는 원우의 몸짓은 슬픔이 묻어났다. 견딜 수 없는 처참할 정도의 슬픔, 감정의 물결이 무대 아래 팬들의 흔드는 응원봉의 빛과 함께 떠돌아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듯했다.


결국 그날 무대를 끝내자마자 원우는 갑작스러운 고열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원우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뒤늦은 열병이었다.


너무 늦은 호된 신고식처럼 제법 오랜 시간 지속된 열병은 원우를 힘들게 만들었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마치,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이, 원우를 애타게 필요로 하는 그 누군가에게 그의 연락이 닿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런 것 마냥…….





-




뭘 고를까 하다가 결국 장미를 샀다.


일본 공연 이후로 재희와 가끔씩 연락을 했지만, 역시 원거리의 연락은 쉽지 않았다. 시호는 미국 공연만 기다렸고, 이제야 그날이 왔다. 이상하게도 원우는 병원에서 퇴원 후 말수가 줄었고, 재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꺼리는 것 같아서 꺼낼 수 없었다.


오늘도 공연이 끝난 후 드디어 멤버들 모두 휴가를 얻었지만 재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사실 미국으로 넘어온 후 시호는 매일 재희에게 연락을 했었다.




- 미안해. 해야 할 작업이 많아서 이번 공연에는 못 갈 것 같아.




짧은 문장에 미안함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보았지만 시호는 애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재희가 못 온다면, 자신이 가면 될 일이다.


재희의 주소를 혜숙에게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우와 함께 가는 줄 알았는지, 혜숙은 시호에게 재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다.




“그동안 재희한테 안 좋은 일이 좀 있었어. 너희라도 가서 재희를 만난다면 다행이야.”




원우에게도 말했지만, 원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나중에 보러 갈 거라는 말만 했다. 그게 전부였다.


하얀 담장, 덩굴이 엉킨 담장,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던 울타리, 넓은 정원이 보이는 동네였다. 조금 높은 언덕 위의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다가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꽃다발로 얼굴을 가린 채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그 몇 분이 처음 무대 위로 올라가던 그날 같았다.


드디어 대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꽃다발을 내리자, 눈앞에 재희가 서 있었다. 환한 웃음은 그대로였고, 긴 머리는 짧게 잘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환하던 웃음이 흔들리고 기어이 사라졌을 때, 그때서야 시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많이, 잘 못 되었다. 그건 확실했다.


맑은 날씨였다. 시호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재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았다. 분명히 이곳은 비가 잘 내리지 않는 동네라고 했는데, 지금 시호의 마음속은 온통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잎 하나가 떨어진 건지 재희의 머리카락 위로 올라갔다가 바람에 날려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재희가 눈물을 닦으며 ‘미안해’라는 말을 하자, 시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그 얇은 어깨를 당겨 안아주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났는지는   없지만, 지금은 그저 눈앞의 ‘소나기 그쳤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뿐이었다. 갑자기 원우가 매듭 이야기를 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한 참이나 아팠던 그날의 원우가.


병원에 실려가던 친구의 곁에서 안타까움만으로 가득했던 그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시호는 재희를 다독이며 화창한 오늘의 날씨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닦아내는 눈물 대신 재희의 갈색 머리카락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자신이 영원히 기억할 첫사랑의 모습은 늘 오늘의 날씨처럼 화창하겠지…….


천천히 눈물을 닦아내는 재희를 보며 시호는 괜히 싱긋 웃어주었다.


지금의 이 화창함이 그녀의 소나기를 거둬가 주길, 자신의 싱거운 웃음이 그녀의 알 수 없는 슬픔을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

.

.

.



 

엄연히 말해, 고통과 공포는 다른 겁니다.


/ [재앙] 과 6 대리 님의 기획안이 상신되었습니다.

[본사] 대리의 [직능 권한]에 의한 [긴급 결재권]사용으로 윗선의 결재 없이 [본사] 직속으로 업무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먼저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관련 지부를 선택해 주시고 병렬 협조 요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6 대리님의 성공적인 업무 수행을 기원합니다./


여전히 작동하는 기능들을 보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걱정이 되네요.


그분이 정말 자리를 비운 것 같아서 말이죠.


예전이었다면 벌써 쇠사슬의 진동으로 제 다리가 남아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고통과 공포는 완전히 다른 분야입니다.


4 대리가 얼마 전 상신한 내용을 보니 한동안 쇠사슬이 절그렁거린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신이 났던 거겠죠. 그분이 그토록 원했던 것을 준 대리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다시 또 잠잠해진 것을 보면 되돌아서 몰려오는 고통의 크기를 감당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탄생 때부터 그런 존재였으니까요.


고통은 고통으로, 불안은 불안으로,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공포는 공포로. 늘 피드백, 아니 그 이상으로 페이백 되었죠.


인간 세계에 무슨 일인가를 벌이기 전에 항상 신중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만든 거라는 건 잘 알지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질문을 했었죠.


인간 세계에 우리가 끼치는 영향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그럼 차라리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그러자 0 번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때로는 고통과 공포를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하거든.”

“그럼 조금 더 자유를 주세요.”

“그건 안돼. 더 나은 저 세계를 위해서는 너희는 분명히 필요한 존재지만, 그렇게 준 고통과 공포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것인지 너희는 알아야 해. 그래야 적절한 선을 조절하겠지.”

“따지고 보면 인간과 우리는 다를 바가 없군요.”

“내가 늘 말하잖아.”




너희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탄생했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말인데 말이죠. 이제는 진짜 지겹기도 했어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그가 담당하는 것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지겨웠던 시간을 견딘 건 우리만이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분은 존재했고 아주 오랫동안 혼자였는데 말이죠.


1번이 탄생하고 우리가 존재할 때까지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오롯이 혼자 감당했을 테니까요.


크게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들의 모든 시간 속 고통과 공포, 슬픔, 두려움, 불안까지도 그분은 모두 다 느꼈을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4 대리와 내가 받았던 페이백을 그분은 혼자서 감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는 인간 세계를 위해 그분은 그러고도 남았을 겁니다. 차라리 같이 고통받고, 같은 공포를 느끼는 쪽을 선택했을 겁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조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아끼는 인간 세계에 직접 가셨는데, 굳이 고통에 이어 공포까지 안겨줘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요.


처음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서 자꾸 새어버리는군요. 고통과 공포는 엄연히 다르다는 말을 벌써 세 번째 하네요.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차가운 물속, 30분만 더 있으면 저체온증으로 사망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온몸이 차가운 물속에 있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구조대가 오는 중이기는 하지만 제 시간 안에 도착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당신에게 선택을 하라고 합니다. 딱 하나만 선택할 수 있죠.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없애 주길 원합니까?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없애주길 원합니까?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과연, 고통이 더 클까요? 아니면 공포가 더 클까요?


공포는 그런 겁니다. 당장의 고통은 마음도 몸도 상하게 만들고 실체를 드러내며 존재하지만, 공포는 슬며시 다가와 당신을 갉아먹을 겁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불안, 그다음은 조마조마한 두려움,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공포를 깨달았을 때는 실체도 없는 그것에 먹히고 난 다음일 겁니다.


저는 존재 자체가 그것을 위해 있는 대리입니다. 그리고 제 일을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제게도 똑같이 돌아오는 것이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도 하죠.


시대는 변했고, 인간 세계도 예전과는 분명히 다르니까요.


자, 이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0 번이 있는 인간 세계에 대체 어떤 공포를 주어야 할까요? 살펴보니 이미 충분히 고통받고 있기는 합니다만….


왜 그렇게 변변치 않은 인간으로 그곳에 간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인간을 살펴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그분의 주변에 있는 인간들에게 자그마한 공포만 선사해도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말입니다. 조금 더 고민을 해볼까요.


어쩌면 0 번은 정말 지루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여다보는 일만 하는 건 지쳤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직접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건지도…….

 

이런…, 제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1 번이 눈치챈 모양입니다.


이 쇠사슬은 정말 별로라니까요. 제 말끔한 슈트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정말이지. 쯧….





-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와 세계, 마리아의 시간 -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