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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Feb 11. 2022

침묵의 상상

| 오늘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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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와.”

“술 마셨으면 곱게 들어와서 그냥 좀 자라.”

“나오라고!”




또 시작이다. 이러니까 내가 네 전화받기 전에 고민하지.


잠이 들 뻔했던 정한은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며 트레이닝 복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신었다.


놀이터에 가니 우울한 검은 머리통 하나가 그네에 기댄 채 매달려 앉아 있다. 뒷모습도 세상 끝난 듯 처량하게 보여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네 밀어달라고 불렀어?”

“야, 내가 말이야.”

“…….”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모기 물려. 빨리 들어가.”




그네를 흔들면서 승철은 작은 발을 꼼지락 거리더니 의미 없이 바닥을 긁는다. 오늘도 제 발보다 조금 큰 치수를 신어서 운동화가 헐거워 보인다.




“야, 나는 여자 좋아한다.”

“그래. 알지.”

“미연이는 손도 예쁘고 그 예쁜 손이 손재주도 좋아서 지난번 내 생일에…….”




자신의 작은 발이 싫어서 늘 한 치수 크게 신는 운동화는 지난 생일에 정한이 골라준 것이다. 선물은 아니었다. 그냥 쇼핑할 때 같이 가 준 것뿐이었다. 선택 장애가 있는 승철을 잘 알고 있으니까. 신어보고 맞는 치수로 사라고 했는데, 기어이 한 치수를 크게 샀던 기억이 난다.




“그래, 손재주 좋은 미연이는 네 생일에 꽃다발 직접 만들어서 줬지. 목소리 좋은 예진이도 학교 라디오 방송으로 ‘승철 선배, 좋아해요.’라고 고백하고. 또 누가 있더라. 성격 좋고 얼굴도 예쁜 수연이는 딱 네 타입인데, 걔도 너 좋아하고. 그래서 오늘 수연이 만나러 간 거잖아. 사귀기로 한 거야?”

“너, 너 어떻게 다 알아?”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승철을 보고 있자니, 정한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된다.




“어떻게 아냐고? 그거야 네가 두 번이나 나 불러내서 똑같은…. 하아…, 말을 말자.”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다. 승철만큼 정한도 학교에서 인기가 없지는 않다. 그런 자기 자랑을 이렇게 새벽에 불러내서 한 번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하고 있는 건 모두….




“맞아, 나 좋다고 하는 여자애들 되게 많아. 나도 여자 좋아하고….”

“계속 헛소리 할 거면 나 먼저 들어가고.”

“…, 나 여자 좋아해.”

“알겠다고.”

“여자 정말 좋아해. 진짜 여자 좋아한다고.”

“알겠어, 알겠다고. 안다고 말했다.”

“…….”

“진짜 안 들어가? 야, 너 때문에 모기 물리겠어.”

“여자 좋아하는데, 근데 그만큼….”

“…….”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네가 좋아.”

“…….”




저거 때문이다. 머리색과 같이 탈색한 정한의 하얀 눈썹이 순간 미세하게 휙,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윤정한이 좋다고.”




저 말 한마디 때문에 이 한 밤중에 술을 저렇게 퍼마시고 밑밥을 저만큼 까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부분에서는 똑똑한 것 같지 않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할 말은 아닌데. 그냥 해도 될 말을 왜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하는 거냐고, 한 두 번도 아니고.




“나 정말 어떡하냐…. 응?”

“뭘 어떻게 해. 그냥 지금처럼 계속 좋아해.”

“뭐?”

“좋아하는 감정을 뭘 어쩌겠어.”

“…….”




충격받은 얼굴인데, 저 표정도 벌써 세 번째다. 정한은 같은 하루를 여러 번 반복하는 영화라도 찍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놀랐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실망했고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도 살짝 기대 아닌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번에는 그래서 오히려 담담하게 되어 버렸다.




“그게 어떻게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고.”

“그…, 그런가?”

“그렇지. 그냥 계속 좋아해.”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뭐?”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며.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그네에 매달려 앉아있던 승철은 정한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뿌옇게 흔들리던 그 시선이 한순간 정신을 차린 듯 갑자기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넷줄을 밀치듯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혹시…, 너도 좋아하는 사람 있냐?”

“하아…. 야, 나 진짜 모기 물렸잖아, 너 때문에. 먼저 들어간다.”

“왜 대답 안 해? 어? 있어? 있는 거야?”

“시끄러워. 고성방가로 신고당하고 싶냐.”

“야, 야! 같이 가. 근데 진짜 있어? 누군데?”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는 승철을 뒤로 두고 정한은 한 숨을 내 쉬며 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해는 뜨고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되면, 늘 같은 듯 하지만 다른 패턴의 하루가 시작된다.




“일어났으면 밥 먹어.”

“… 어, 어.”

“술 좀 작작 마셔. 그러다가 훅 간다. 언제까지 20대인 줄 알아?”




문을 열고 생사를 확인한 정한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승철을 깨웠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승철이 시선을 피하다가 겨우 대답하자, 또 한 번 정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다가 묻는다.





“어제 어떻게 들어온 건지 기억은 나?”

“… 아니.”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일이나 대화는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꺼내지 않은 둘 만의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 다행이네. 개처럼 네 발로 들어온 거 기억 안 나서.”

“야, 그건 아니지, 어제 분명히….”

“기억 안 난다며.”

“아…, 어.”




승철이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제 머리를 세게 때린 건지 ‘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식탁 위에 국그릇을 놓으며 정한은 중얼거렸다.




“아휴, 저 똥멍청이. 또 시작이네.”




‘기억 못 하는 척하는 취중고백’과 ‘이미 알고 있지만 못 들은 척하는 고백’ 중 뭐가 더 오래갈까.


아무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오늘도 그냥 이렇게 넘어가기로 한다.


그냥, 같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학점과 시험을 걱정하는 오늘을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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