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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Feb 14. 2022

침묵의 상상

| 일상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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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축구공을 따라서 달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광경에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프 타임인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발소리,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제 앞에서 땀 흘리며 서 있는 저 ‘운동 덕후’이자 제 룸메이트인 ‘멍청이’.




“정한아, 진짜 안 뛸 거야? 너 있어야 재미있는데.”

“못 뛰어. 좀 있다가 수업 가야 해.”




얇은 니트 카디건을 여미고 읽지 않고 있던 책을 가방 속으로 넣으며 대꾸했다.




“아, 금요일이지. 오늘 점심 같이 먹자, 그럼.”

“너랑? 싫어.”

“싫어? 왜?”

“약속 있어.”

“근데 왜 싫은 건데? 약속 있다고 하면 되지.”




짙고 검은 눈썹이 미간 쪽으로 휙 좁아지는 것을 보니, 조짐이 딱 삐질 타이밍이다.


저건 꼭 동아리 안에서는 회장처럼 근엄하게 굴면서 내 앞에서만 왜 저렇게 잘 삐지는 거야. 꼬투리는 귀신 같이 잘 잡아요. 삐지면 괜히 피곤해진다.




“알았어, 말이 헛나온거야. 미안해. 아무튼 오늘은 같이 밥 못 먹어.”

“누구랑 먹는데?”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하게. 빨리 가서 공이나 차. 너 부르잖아.”

“아, 아! 갈게, 가요!”




저를 부르는 부원들과 정한이 있는 높은 벤치에 사이 어정쩡하게 서 있더니 결국은 골대 쪽으로 열심히 뛰어간다. 가방을 메면서 다시 시작된 경기를 잠시 보니 물 만난 고기처럼 정말 열심히 한다. 누가 보면 국가대표라도 되는 줄 알겠다.




“저기, 정한 선배. 혹시 잠깐 시간 되세요?”

“어, 이제 수업 가려는 중이었어. 왜?”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뭔데?”

“승철 오빠랑, 많이 친하시죠?”




룸메이트가 된지는 3년 차, 군대까지 다녀온 거 포함하면 친구로 지낸 지 3년은 훨씬 넘었지만 실제 룸메로 지낸 시간을 따져보니 그 정도인 것 같다. 그동안 왜 이런 일이 없었겠는가.


근데, 왜 자기는 ‘선배’이고, 승철이는 ‘오빠’인가. 자신은 같은 과라서 그런가. 하긴, 체육교육과 ’오빠’랑 유아교육과 ‘선배’는 다르지. 잠깐 간과했네.




“뭐…, 친하다면 친하지. 물어볼게 뭐야?”




그러고 보니 온갖 다양한 과의 여자들이 저를 찾아와 이런 질문을 했었는데, 같은 과 후배가 이런 질문을 하는 상황은 처음이기는 하다.

 

자신의 등 뒤로 갑자기 ‘야! 최승철! 뭐해?!’라고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운동장 쪽을 바라보고 서 있던 후배들의 표정이 잠시 의아하게 변하는데, 정한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멍청이가 또 멍청한 짓을 했다 보다, 생각하는 편이 낫지.




“그럼 가면서 이야기할까? 너희도 수업 가야 하잖아.”

“어, 네, 네.”




정한은 선글라스를 올리며 어쩌다 한 번씩 보이는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어 주었다. 세 명의 후배들이 정한을 둘러싸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한 번 더 ‘최승철! 뭐 하냐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저 멍청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충 알지만, 정한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형?”

“네!”




셋이 동시에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얼마 전에 유치원에 대타 뛰러 갔을 때 봤던 병아리들이 떠오른다. 짹짹짹, 거리는 폼이나 한 마음 한 뜻으로 뭔가를 바라는 그 간절함이라던가….




“글쎄, 그런 건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는데.”

“그럼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음, 그런 건…, 공짜로 알려주면 좀 그렇지 않나?”




정한이 빙그레 웃으며 턱을 괴자 셋의 입이 뻐끔거리다가 바로 앞자리와 옆자리에 앉으며 ‘커피?’, ‘술?, ‘밥?’을 한 명씩 외쳤다.




“농담이야. 우리 후배님들이 알고 싶은 건 알려드려야지. 일단은 승철이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가 ‘길고 검은 생머리’를 끝으로 정한은 조금 굽실거리는 자신의 금발을 매만졌다.


어찌 보면 한 번도 자신과는 관련 없는 단어들, 승철이 아니었다면 생각도 안 할 모습의 상상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실체도 모를 존재에 대한 알기 싫은 감정들이 떠올라, 정한은 태블릿 위로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아, 오늘 강의 내용 중요하다고 했는데. 망했네, 최승철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점심도 안 먹었다는 걸 알았다.




“괜히 밥도 못 먹고. 배고파.”




‘너랑 안 먹는다.’고 ‘약속 있다.’고 했던 자신의 거짓말이 이제와 보니 조금 우스웠다. 제 주변을 서성거리는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그 멍청이가 꼴 보기 싫어서 했던 거짓말이었지만, 제 발등을 찍었다.


뭔가 먹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굶는 것도 싫어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니 최승철은 아직이다. 오늘은 아마 늦지 않을까.


실행력 갑인 후배님들이 오늘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서 자리를 함께 할 계획을 세우는 걸 들었으니까.

 



“맛 더럽게 없네.”




빵도 촉촉한 편이고, 토마토의 두께도 적당했다. 치즈도 적당한 염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맛이 없었다.




“맛도 없고, 최승철도 없고.”




괜히 그런 정보들을 알려 줬나 싶다가, 문득 그 자리에 가서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을 최승철의 표정이 떠올라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먹던 샌드위치를 대충 접어두고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해가 저물었고, 어둑한 밖을 보다가 불도 켜지 않은 걸 알았다. 거실의 스탠드라도 켜 둬야 하는데, 자신의 동거인은 불 꺼진 집을 싫어하는데.


그러다가 ‘내가 왜?’라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소파에서 주르륵 슬라임처럼 바닥으로 내려와 탁자에 엎드려 버린다. 한 팔을 베고 밖을 바라보다가 ‘정말 늦게 들어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끝으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그네를 밀어주는 자신과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는 승철이 있었다. 꿈이라는 걸 아는데도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콱,  떨어져 버리라고 더 세게 미는데, ‘정한아, 무서워.’라는 소리에 그만 또 마음이 약해진다.




‘정한아, 나하고 밥 먹자.’,

‘정한아, 나랑 영화 보러 가자.’,

‘정한아, 배드민턴 치러 가자?’

‘정한아, 정한아….’


…, 멍청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 멍청이.”

“어?”




눈을 뜨니 같은 포즈로 마주 보고 있는 승철이 보였다. 흠칫 놀랄 뻔했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정한은 다시 말했다.




“못 들었어? 멍청이.”

“내가 왜? 왜? 왜?”

“언제 왔어?”

“방금. 내가 왜 멍청이야?”

“똑똑이는 아니지. 오늘 늦는 줄 알았더니. 약속 없었어?”




어기적 거리면서 일어나 주방 식탁 위에 놓아둔 샌드위치를 찾는데, 역시나 없다. 돌아보니 승철이 여전히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자신을 보며 손을 까딱거린다.




“어떻게 알았어? 오늘 동아리 전체 모임. 너네과 애들도 많이 왔던데, 알겠네.”

“근데. 왜 일찍 왔어?”

“그냥. 재미없어서.”

“여자애들도 있고, 너 좋아하는 후배들도 있는데 왜 재미가 없어. 배가 불렀네.”

“그런가. 그냥 재미가 없었어. 너도 없고.”




마지막에 붙은 말이 이상하게 익숙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씻고, 자라.”




계속 까딱거리던 손짓이 멈추더니 문득 생각난 듯, 승철이 그런다.




“우동 먹으러 갈래?”

“갑자기?”

“너 점심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저녁도 안 먹었고.”

안 땡겨.

“그런데 왜 거짓말했어.”

“…….”

“약속 있다고 했잖아.”




마시던 물컵을 내려두고 정한이 말없이 승철을 바라보았다. 꿈에서 쟁쟁하게 들리던 ‘정한아!’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취소했어. 입 맛이 없어서.”

“누구랑 약속했는데?”




멍청이가 아주 가끔씩 똑똑하게 굴면 답이 없다. 저렇게 캐물을 때 보면 또 거저 학교 들어온 것 같지도 않고, 동아리 회장이 그냥 된 것도 아닌 건 맞는 모양이다.




“몰라도 될 것 같은데.”

“알아야 될 것 같은데.”

“왜.”

“길고 검은 생머리에 생크림 케이크라니. 최악이었어.”

“…….”

“너지?”




짙은 눈썹 아래 커다란 눈동자가 저만 보고 있으니 더 이상의 거짓말은 글러먹은 것 같다.


승철이 어릴 때 귀신의 집에서 봤던 처녀귀신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길고 검은 생머리는 질색하고, 생크림 케이크는 빵만 파서 먹을 정도로 생크림은 극단적 불호라는 사실을 정한 은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아서, 남들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왜 자꾸 거짓말하는데?”

“…….”

“넌 그게 재미있냐? 난 하나도 재미없어.”

“난 재미있으니까.”

“뭐?”

“너한테 목메는 여자애들 내가 전부 커트시키는 거야.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반듯하게 선이 예쁜 자신의 얼굴이 유리창에 비춰졌다. 염색이 잘 된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은 별로다. 이 모습이 얼마나 추해 보일까 생각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정한은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나 너한테 안 미안해. 못 된 놈이라고 욕해도 안 미안해.”




될 대로 되라지. 잠이 덜 깨서인지 아니면 거의 공복인 채로 하루를 보내서인지, 정한은 지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시간 동안 그저 시선만 마주한 채 있었다.


저는 맨날 새벽에 불러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며 할 말 안 할 말 다하는 주제에…, 나는 왜 못해? 아니, 그래 놓고 또 다른 날에는 까맣게 잊는 주제에. 까맣게 잊는 건지 잊는 척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며 앙냥냥 중얼거리는 소리를 승철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다.




“… 그게 이유야?”

“응. 그게 이유야.”

“그럼 이제부터는 거짓말하지 마.”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쉬면서 그런다.




“그냥 다음부터는 누가 물어보면 나 애인 있다고 해. 나도 그렇게 말할게.”

“그것도 거짓말이잖아.”

“이제 거짓말 아닌데?”

“너 애인…, 생겼어?”

“응.”

“언제?”

“방금.”

“어?”

“방금. 지금 생겼어.”

“어?”

“생겼다니까. 그러니까 우동 먹으러 가자. 나도 배고파.”

“…….”




멍청이가 가끔 눈치 빠르게 굴면 답이 없다. 아니다. 사실은 눈치가 없는 건가.


정한은 흐트러뜨렸던 머리를 천천히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역시 공복에 잠이 덜 깬 상태는 힘들다.




“가서 일단 먹고 생각해.”

“…….”

“배고프잖아.”




입술을 꼭 다물고 있던 정한을 향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승철이 갑자기 싱긋 웃는다.




“가자, 애인.”

“뭐래. 미친놈이.”

“배고프다고. 가서 우동에 소주나 마시자고.”




자신의 겉옷을 덮어 씌우듯 입히더니 손을 잡는 승철을 보던 정한이 탁, 하고 손을 뺐다.




“왜 이래.”

“나 때문에 네가 거짓말하는 건 싫으니까.”

“그래서? 사귀는 척이라도 하자고?”

“그럼 또 거짓말이잖아. 나 때문에 너 거짓말하는 거 싫다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자신의 살짝 주름진 미간을 콕 찍으며 승철이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또 그 잘생긴 웃음에 따라서 웃을 뻔한 것도 사실이다.


멍청이가 쓸데없이 잘 생겼다.




“난 너랑 밥 먹는 거 좋아. 너랑 배드민턴 치는 것도 좋고. 너랑 영화 보는 것도 좋아.”

“그래서.”

“네가 나랑 밥 안 먹으면 궁금하고, 누구랑 있는지도 궁금하고…, 모르는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면…, 묘하게 불편하고.”




정한은 승철이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팔짱을 끼고 들어주었다.




“민수가 애인이랑 하는 거, 그거 전부다 내가 너랑 하는 거더라.”

“뭐래.”

“근데 나쁘지 않아. 오히려…, 난 좋아.”

“…….”

“애인 하자, 우리.”



하!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이렇게 쉽게 관계를 변화시키자고? 지는 며칠 동안을 새벽마다 사람 불러내 고생시키더니…. 지금 저 잘생긴 멍청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제 앞에 있지만 도저히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같이 우동 먹으러 가자고.”

“결론이 왜…, 하, 씨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정한은 순식간에 승철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허리를 감싸 안은 건 승철이었다.




“애인, 싫어?”

“어, 싫어.”

“왜? 왜 싫은데?”




허리를 잡고 있는 힘 있는 손과 달리 제 앞에 있는 승철의 표정은 팔자 눈썹으로 변해 또 울상이 되기 직전이었다. 삐지면 한참을 가겠지만, 또 우울한 표정으로 한동안 있을 생각을 하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좋지 않다.




“왜 싫어? 나 싫어?”

“어, 싫어.”

“진짜? 진짜 싫어?”

“…….”

“정말? 진짜? 애인…, 하기 싫어?”




당연히 ‘예스’라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건가.


‘싫다’는 대답이 뭐가 억울한 건지 여러 번 되묻다가 마지막 말은 아예 또렷하지도 않다. 우물거림을 가장한 칭얼거림이 저음으로 들리니 묘하다.


아, 젠장. 정한은 거리두기에 실패한 자신을 탓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얼굴, 보통의 여자보다 긴 속눈썹이 너무 자세히 보일 정도로 가깝다.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깜박이는 동그란 눈동자는 너무 크고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한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자 마지막까지 버티려고 했던 마음들이 무너지는 순간이 왔다.




“우동 먹으러가.”

“어? 대답은?”

“배고프다며, 나도 배고파. 일단 먹고 난 다음에.”




조금은 새침할 필요가 있었다. 여전히 자신은 이 잘생긴 멍청이에게 많이 아까운 인물이고, 저를 붙잡고 있는 이 인간도 그걸 잘 알 테니까.


너무 허무할 정도로 쉽게, 그렇지만 가볍지는 않게 관계는 변했다. 관계는 변했지만 또 다를 바 없이 외투를 걸치고 투닥거리면서도 신나게 우동을 먹으러 가는 발걸음은 빠르고 가벼웠다.




“닭발도 먹자.”

“당연하지.”




외투 주머니 안에서 마주 잡은 손은 두 사람의 거리가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 이제 누군가는 귀찮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지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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