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dcat혜진 Feb 18. 2022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 고요: 한낮의 꿈, 그 속의 너

-  




짧다면 짧은 꿈이었다.


원우는 무언가 불타고 있는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불타고 있는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건 당신이 멈출 수 없는 거야.’라고 말했다.


저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불길 속에 있는 것이 재희라는 것을 알았다. 원우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재희를 구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이 멈출 수 없는 거라고 했잖아. 괜찮아. 걱정 마. 저건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무슨 뜻이냐고 묻기 전에 이미 사라지고, 곧장 침대 위에 누워 자신을 모호하게 바라보던 재희가 있었다.




“다행이야. 오늘 달이 참 밝아서….”




그날이었다. 재희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 서로의 마음이 아직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달이 너무 밝아서 그 달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그날 새벽.




“보고 싶었어. 사실은 아주 많이, 정말 많이….”




자신에게 그 말을 하는 그녀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재희의 반지와 자신의 반지로 매듭 모양의 목걸이를 만들었을 때, 원우는 그 매듭처럼 재희의 모든 일상과 행복, 그리고 불행까지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 마무리되길 빌었다.


시작점도 끝도 없는 반지의 원처럼 맴도는 시간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묶여서 귀결되고 마무리되길…, 재희의 얇은 목에 걸어주던 그때 빌고 또 빌었다.




“생일 축하해.”




불꽃이 허공에 흩어지고,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재희의 시선이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던 그날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원우야’라고 저를 부를 것 같아서 손을 뻗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끝도 없는 높은 곳을 헤매다가 그만큼이나 위험하게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인데, 어떻게든 그녀를 잡아주어야 하는데.




‘너무 감상에 빠지지 마. 어차피…, 지금의 그녀가 아니야.’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한 ‘또 다른 원우’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하지만…, 재희였다. 재희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을까.


자신만 바라보고 저렇게 금방이라도 소리 없는 눈물을 보이며 저에게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인데. 그럼 자신은 안전하게 그녀를 안아주어야 마땅한데…, 그도 아니면 함께 추락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지금 이렇게 누워있을 때가 아닌데.




‘맞아.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인 장면은 달빛 아래 빛나던 하얀 얼굴에 입 맞추던 그날이었다. 자신의 볼끝에 먼저 닿은 손끝은 다행히 따뜻했고…, 맞닿은 입술 끝은 뜨거웠던 기억.


꿈을 꾸는 것 같다는 말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춥기만 한 겨울의 달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자리에 있고 싶었던 그 시간. 너무 행복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던 그 순간.


재희가 보고 싶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 안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또 불안할 것 같았다.


그녀가 또다시 혼자 그 어둠과 슬픔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리도 없는 눈물을 흘리며 또 예전처럼 도망치려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네가 그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던 원우는 무슨 말인지 몰라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자신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렇게라도 무의식에 자꾸 개입하는 이유는 네가 혹시라도 겁낼까 봐. 그런데 이제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원우는 그냥 재희를 그리고 또 그렸다.




‘만약 그녀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마지막의 또 다른 원우는 거울 속의 자신처럼 조금 슬픈 얼굴이었다. 아니, 슬픈 얼굴이 아니라….




“하아…, 뭐야.”




꿈에서 깬 원우는 자신의 링거에서 떨어지는 이름 모를 액체 방울을 멍하게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슬픈 꿈이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재희가 있었다는 것이다.


재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




혜숙은 원우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병원복을 벗고 잠시 휴식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던 원우는 도착하자 현우와 혜숙의 앞에서 두 가지를 말했다.




제가 재희를 많이 좋아해요.

재희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다행이다.


혜숙은 원우의 말을 들었을 때 먼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머물렀으며 좋겠다고, 자신들과 심심한 듯 평화로운 일상을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네 아이야.’




자신의 언니를 잃고, 원우를 품어야 했던 그때. 몇 년 만에 한국으로 와 자신들을 위로했던 제인은 그날 그렇게 말했다. 당황스러워하는 현우의 얼굴과 더 당황하는 자신의 표정을 보고는 한참 소리 죽여 웃다가, 제인은 이내 품 안에서 잠이 든 소녀를 다정하게 다독이며 한 마디를 더 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해줘. 부탁이야.’




혜숙과 현우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아마 그날 나타났던 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소녀는 한 동안 한국에서 원우와 함께 어린 남매처럼 지냈다. 서로가 가진 아픔이 얼마나 큰지 모르던 작은 아이들은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지만 잠이 들 때는 꼭 함께였다. 잠이 든 두 아이를 바라보던 혜숙은 괜히 감동적이어서 사진을 찍고는 했었다.


다시 제인의 손을 잡고 돌아가던 날 마지막으로 돌아보던 소녀의 얼굴에는 아쉬움 같은 표정은 없었지만, 혜숙은 자신이 만들어줬던 작은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던 소녀를 기억했다. 제법 자라서 다시 돌아왔을 때도, 또래 답지 않은 외로움 혹은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혜숙은 알은 채 할 수 없었다.


그 외로움과 슬픔은 재희와 제인의 사이에 일이었다.


혜숙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재희가 먼저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려주는 것. 결국 끝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재희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옆에서 웃어주고, 가끔 연락도 없이 먼 곳에서 오는 그녀를 안아주는 일. 그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재희의 몫으로 정해진 행복의 시간들은 늘 오래가지 않는 것 같았다.


급한 연락을 받고 다시 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던 재희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즐거운 여행을 끝까지 함께 했으면 좋았으련만.


‘순탄하지 않다.’, 라는 말 따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재희의 삶을 천천히 생각해보던 혜숙은 갑자기 한없이 슬퍼져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눈물이 났었다.


순탄하지 않은 것이 인생이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만큼은 특별하다고 생각해도 그런 사람들에게 조차 쉽게 일어나지 않는 불행이 왜 재희에게만은 연달아 일어나는 것인지.


결국 함께 끝내지 못한 짧은 여행처럼 원우가 함께 해주려는 재희의 앞날이 계속 그런 식이라면 어떨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나 염려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기대나 희망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 우리도 그래.”




혜숙은 현우와 시선을 잠깐 주고받고 그저 그렇게 말했다.




우리도 그래.

우리도 재희를 많이 좋아해.

우리도 재희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어느 추운 겨울에 킴의 딸로 태어나 일생을 제인의 아이가 되어 자라왔고, 현우의 딸이라 믿고 살았지만 사실은 누구도 아닌 원우와 특별한 추억을 나눈 소녀가 되었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이가 아닌 자신만의 재능을 꽃피우고, 쉽지 않은 상황들을 받아들이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내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재희….


몇 마디의 말과 몇 분 안 되는 통화 따위로 전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지금 혜숙은 그것만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재희에게 전화를 하고, 통화가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했다. 목소리를 들으면 똑같은 일상의 안부를 묻고, 끼니를 묻고, 기분을 물었다.


그리고 이제 여기 있는 모두는 더 이상 그런 재희를 혼자 둘 수 없었다.




“한국으로 오라고 하자. 아니면 우리가 가도 될 거야.”

“일단 제가 먼저 이야기해 볼게요.”

“그래.”




위태롭게 있는 혼자의 시간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곧 쓸쓸하고 추운 계절이 아니라 화창한 계절을 함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며 혜숙은 오랜만에 공방의 천을 정리하며 새로 만들어줄 재희의 옷을 생각했다.




“어머…, 이런.”




꺼내던 천과 부딪친 것인지 갑자기 탁자에 놓아둔 바늘 상자가 쏟아져 순식간에 바닥이 반짝거렸고, 혜숙은 낭패 섞인 얼굴로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바늘을 정리했다.




-




호텔 복도를 걷는 그의 뒤를 따라서 카메라가 움직이자,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저 따라오시는 거예요?’라고 묻는다. 안경을 쓴 얼굴이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순순히 방문을 열어주고 의자에 앉아 인터뷰를 위한 자세를 잡았다.




“글쎄요. 팬들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저도 궁금하네요. 저를 왜 좋아하시는지.”




첫 질문부터 되돌아오는 질문에 감독은 조금 난감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연습생 때 멤버들과 있었던 이야기와 그가 주로 하는 취미 생활, 그리고 이번 콘서트를 위해 어떤 것들을 준비했는지에 대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멤버들이 가족 다음으로 첫 번째였어요. 그때는…, 멤버들이 없었다면 아마 견디기 어려웠을 거예요.”




잠시 뭔가 생각하던 그는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꿈’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저한테 ‘꿈’은 늘 멀리 있지 않았어요. 항상 보이는 곳에 있었죠. 잡힐 듯 말듯한 딱, 그 정도의 거리. 그래서 더 노력했던 것 같아요. 멤버들과 같이 무대에 서는 그 ‘꿈’이 처음이었고, 또….”

“또?”

“다른 ‘꿈’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는 질문에 그는 그냥 웃었다. ‘그건 너무 개인적인 거라서 말씀드릴 수 없네요.’라고 단호하게 말하여 결국 그 질문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네, 팬분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지금은 컨디션이 아주 좋아요. 어릴 때 종종 한 번씩 아팠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이렇게 한꺼번에 아픈 모양이에요. 게다가 이번 투어 때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아파서 스태프분들이 고생이 많으셨어요.”




이어지는 팬들에 관한 질문과 현재 건강 상태 등을 말하고 앞으로 남은 월드 투어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자신이 쓰는 곡의 가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나니 제법 시간이 지났다.




“경험이라고 하기에는 또래에 비해서 제가 다양한 경험을 한 편은 아니라서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서 여러 가지 감정들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오로지 개인적인 경험을 쓴 가사는 없냐, 는 질문에 한 동안 말이 없던 그는 곧 웃으며 ‘왜 없겠어요. 아, 팬분들이 어떤 곡인지 맞춰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다.


끝으로 이번 투어는 일정상 틈이 좀 생겨서 휴가가 있을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다시 대답 없이 미소만 짓던 그….




“아마…, ‘꿈’을 찾으러 갈 것 같아요.”

“네? 정확히 뭘….”

“말씀드렸잖아요. 개인적인 거라서 말씀드릴 수 없다고. 다만…, 지금 저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아무래도 편집을 하기 전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을지 물었더니 그는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냥 멤버들 이야기와 결을 비슷하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어차피 제 이야기가 아니라 저희 팀 전체의 이야기 중 일부니까. 제 개인적인 ‘꿈’ 이야기는 편집하셔도 됩니다.”




‘편집하셔도 됩니다.’가 ‘편집해 주세요.’로 들려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거뒀다. 천천히 안경을 벗어 셔츠 끝으로 닦던 그는 친절하게 방문을 다시 열어주며 카메라를 철수시키는 스태프들을 도왔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일정 때 뵐게요.”




-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