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 하나도 떠나지 않은 마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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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길이었다. 그냥, 또 지나가던 길에 운동화를 두고 왔던 기억이 나서 잠시 들렀을 뿐이다.
혼자 핑계를 대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정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가서 뭘 확인하고 싶은 건지 이제 자신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도어록 비밀번호가 바뀐 것은 아닐까, 아주 조심스럽게 누르면서 정한은 잠깐 긴장했다.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아서, 승철에게 집에 들러도 되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을까 봐 먼저 겁이 났다. 그래서 몰래 도둑고양이 마냥 이렇게 출근 후의 시간에 온 것인데….
“뭐야.”
현관 앞에 주인이 분명한 구두가 그대로 있었다. 정한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침실 안쪽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콜록’ 거리는 기침소리와 함께 누군가와 잠깐 통화하는 승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가 끝난 건지 곧 다시 조용해지고, 아직도 현관에 서서 나가지도 들어서지도 못한 채 서 있던 정한은 잠시 그대로 멈춰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조용히 나가면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당연한 듯 외투까지 벗어 소파에 두고, 식탁 위에 너부러진 약봉투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손을 씻은 뒤 주방을 뒤져 언젠가 쟁여둔 크림수프 봉지 하나와 냄비를 꺼내고…….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프가 눌어붙지 않게 한 참 젓고 있는데,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둔탁하게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에 기어이 주방까지 걸어 나온 승철을 보고 정한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대비도 못하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제 거의 다 된 수프를 보고 불을 줄였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니 아픈 얼굴이 보인다. 막상 돌아서 보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들었다.
“운동화 가지러 왔다가. 너 아픈 것 같아서.”
“…….”
“이것만 해 주고 갈게.”
“…….”
“약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지.”
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있었던 건지 따지고 싶었고, 화가 났다.
밥도 제때 안 먹은 건지 야윈 얼굴에 눈은 빨갛게 퉁퉁 부어있고, 대충 껴입은 잠옷은 목덜미가 얼마나 휑한지 여며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다된 수프만 몇 번 더 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승철은 이상하게도 아무 말이 없다.
“많이 아파? 들어가서 누워있어.”
“꿈…, 인가.”
한껏 잠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 승철의 말에 정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같이 있을 때는 자신이 더 자주 아팠지만, 아주 가끔 승철이 아플 때는 지독하게 앓아서 저를 고생시켰던 기억이 난다. 매 순간 자신보다 저를 더 챙겨주던 승철도 아플 때만큼은 아이처럼 굴며 유독 떨어지기 싫어했었다.
“맞아, 꿈이야. 그러니까, 더 자.”
“정한아…, 나 아파.”
선채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더니 이제는 비틀거리기까지 해서 정한은 젓던 주걱을 내려두고 얼른 다가가 승철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리도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어보았다.
저에게 힘없이 기대어 오는 승철의 고개가 어깨에 떨궈지고, ‘쌕쌕’ 거리는 가쁜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정한은 잠시 그대로 승철을 안아주며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속이 상하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자신이 이렇게 만든 주제에…. 속 상할 자격도 없다.
겨우 침실로 승철을 데려가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떠난 후에도 변함없는 공간. 자신만 있으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었다.
수프를 작은 그릇에 담고, 한 김 식혔다. 마시기 편하게 물 잔에 물도 담고, 약봉지를 뒤져 쟁반에 함께 챙겨서 침실로 가져갔다.
“일어나 봐, 이거 조금만 먹자.”
“으…….”
“어지러우면 눈 감고 있어.”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가자 조금씩 먹기는 한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에 너무 뜨거운 것이 닿아서 불편할까 봐, 정한은 계속 작게 수프를 떠서 후후 불어 식혀주었다. 겨우 반 그릇을 먹고 더는 못 먹겠다고 고개를 저어, 물 한 모금을 마시게 하고 다시 눕혀주었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가슴이 천천히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옆에 앉아있던 정한은 제법 시간이 흐른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옷장 앞에 널부러 있는 옷가지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아프지 말지, 나도 없는데 왜 혼자 아프냐, 그렇게 튼튼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하필이면 이럴 때 아프고…. 속마음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런 것들인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막상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승철은 쌔근쌔근 잠이 들었는데 여전히 비염 때문에 숨 쉬는 건 어려운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먼저 보였다.
승철이 잠이 든 채 누워있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이마를 짚어주고 아주 익숙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약봉지를 잘 보이게 옆에 두고, 먹다 만 수프 그릇도 덮어두었다. 더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시계를 보다가 정한은 승철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작게 속삭이며 일어났다.
“푹 자. 갈게.”
“어디가….”
“…….”
“가지 마.”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제 손목을 꼭 잡고 있는 따뜻한 손, 말랑한 감촉 끝에는 평소와 달리 힘이 하나도 없었다.
“…….”
“정한아, 가지마.”
“…….”
“아파, 나 너무…, 아프다.”
네가 아픈 건 끝나지 않은 마음인 걸까, 아니면 흔하디 흔한 이별 후의 몸살인 걸까. 후자일 것 같아서 겁이 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다시 이마를 짚어주는 정한의 손 아래로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없는 승철의 모습이, 지금 연약해져 버린 둘 사이의 관계 같았다.
“나 아픈데…, 그러니까 가지 마.”
“알았어. 열 내릴 때까지 있을게. 빨리 자”
그럼에도 쉽게 뿌리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붙잡고 싶은, 아니면 못 이긴 척 붙잡혀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다. 정말, 나 지금 뭐하냐….
“안 잘래. 안 잘 거야….”
“알았어. 옆에 있을 거야.”
“… 같이 있어줘.”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다시 내미는 다른 손이 정한을 잡아당겼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가물거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약기운에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지금은 아프잖아.
그렇게 정한은 자신을 설득하고 또 자신에게 설득 당해 버린다.
정한은 승철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한 손을 꼭 잡은 채 바짝 붙어오는 뜨거운 체온에 다정한 손 끝으로 다독여주었다.
어떻게든 눈을 가까이 맞추고 누워있던 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버석거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얕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깜빡이던 눈이 드디어 감겼다. 유독 긴 승철의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어둡고 깊게 내려앉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눈 감은 승철’ 이 정말 오랜만에 가까이 있었다.
“정한아….”
“응.”
“정한아.”
“응. 여기 있어.”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눈 감은 승철’이 버석거리는 입술로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나 아파.”
“알아.”
“많이 아프네.”
“알았어.”
“진짜…, 많이 아프다.”
“…….”
“너무 아파서…, 힘들어.”
“…….”
“넌…, 아니야?”
“…….”
대답할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던져버렸던 어떤 행복을 돌려달라고, 돌아가자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그 보다 이기적인 이런 자신이 마른 입술로도 끝까지 사랑을 말해주는 이런 사람의 곁에 또다시 있어도 되는 건가.
“나만…, 아픈 모양이네.”
“… 그만 말하고 얼른 자.”
“정한아.”
“힘들 거야. 우리…, 아니, 네가.”
무언가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던 긴 속눈썹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감겨있던 눈이 젖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천천히 저를 마주한다.
“다시 해.”
“그만 말하라니까.”
“다시 하면 되지. 그냥…, 다시 해, 우리….”
눈동자와 달리 버석해진 입술, 그 위로 내리는 첫눈처럼 가볍게 대답이 돌아왔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
‘다시’가 아니라 사실은 ‘여전한’ 무언가가. 대답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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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둔 데워둔 한약이 그대로 있어서 얼른 현관문 앞으로 들고 갔다.
“야, 50만 원짜리야. 왜 자꾸 안 먹어.”
“써, 쓰다고!”
인상을 ‘팍’ 구기면서 떼쓰는 아기처럼 소리를 지르는 정한의 모습에도 승철은 양보할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먹기 싫었던지 외투도 걸치다 말고 뛰어 나가려다 걸린 모양새지만 승철은 ‘씁!’하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단호하게 컵을 내밀었다.
결국 세상의 쓴 건 혼자 다 먹는 얼굴로 기어이 컵을 비우는 정한에게 얼른 사탕을 내밀자, 입만 ‘아’하고 벌리는데도 자연스럽게 아기새에게 먹이를 주듯이 승철이 포장을 까서 넣어주었다.
“왜 나만 먹어. 다음에는 네 것도 같이 지어 와. 고통 분담하게.”
“너 자꾸 끼니도 거르고 다니고, 이명도 들린다며.”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
“안 그래도 잠 많이 못 자는데, 요즘 예민해져서 더 못 자고.”
“예민한 애인 옆에서 누가 자꾸 코 골잖아.”
“그건 미안하지만….”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야. 너도 오랜만에 쉬는 건데, 오늘 좀 자. 내 몫까지.”
입다 말았던 외투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정한이 아직 남아있는 한약 맛을 지우려고 입안에서 사탕을 이리저리 열심히 굴리다가 아쉬운 얼굴로 서 있는 승철과 눈을 맞췄다.
“나 오랜만에 휴일인데, 넌 일 나가고.”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나도 아쉽긴 하다.”
“언제 와?”
“오후는 돼야 될걸? 전화할게. 휴일인데 괜히 나 때문에 일찍 깨 버렸네, 우리 승철이”
“…….”
아침 일찍 촬영이라 조용히 나가려고 한 건데, 굳이 정한을 따라 일어나더니 좀비처럼 주방으로 가 한약을 데워주고, 지금은 까치집을 한 머리와 잠옷 차림으로 선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조금 뚱한 얼굴인데, 졸림과 불만 반, 또 그런 내색을 안 하려고 꾹 참고 있는 표정이…, 좀 귀여워서 정한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뭐야. 그런 얼굴로 나 보낼 거야? 나 오늘 하루 종일 신경 쓰이게?”
“나도 같이 가면 안 되지?”
“뭐어? 촬영장에 같이 간다고?”
“그냥 해 본 말이야.”
“난 좋은데…, 근데 넌 거기 가면 재미없어. 내가 너 회사 따라가서 있으면 넌 신경 안 쓰일 것 같아?”
“하긴…, 그렇겠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까지 하는 걸 보니 정말 보내기 싫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었는데, 정한도 승철의 말에 진짜 가기 싫어진다.
점점 아랫입술이 부르퉁퉁해지는 걸 보던 정한은 승철의 목덜미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잡아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당연한 듯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과 동시에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한약 냄새난다. 할아버지 같아.”
“와, 누구 때문에 먹은 건데. 할아버지 같다니. 그래서 싫어?”
“아~니. 진짜 한약 냄새나는 할아버지 된다고 해도 안 싫어.”
“거짓말.”
“진짜.”
“어쩔 수 없네.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려면 할아버지 될 때까지 옆에 있어야겠다.”
“그러자, 그럼.”
입안의 사탕이 거의 사라질 때쯤, 승철은 정한의 귓불을 만져보고, 정한은 승철의 까치집 머리를 손으로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박자를 타며 제자리에서 춤을 추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진짜 같이 갈래? 너 매니저라고 소개하고. 내 옆에서 밥도 먹고, 나 피곤하면 비타민도 챙겨주고, 토닥거려주고.”
“그러다가 몰래 뽀뽀도 하고.”
“그러다가 걸리면 나 백수 되고.”
“데뷔한 지 6개월도 안 된 신인 모델은 그대로 사라지는 거고.”
“완벽하네.”
“얼른 가.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끝내고 와.”
아쉬움을 담아 엉덩이를 토닥거리자, 정한은 승철을 꼭 한 번 힘주어 끌어안고 마지막 뽀뽀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두어 번의 입맞춤이 더 있었지만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문 너로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 승철을 향해 손키스를 한 번 더 날려주었다.
“들어가, 자기. 내가 돈 많~이 벌어 올게.”
“응. 자기. 돈 많~이 벌어오세요.”
장난처럼 속삭이듯이 키득거리던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그렇게 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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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계속 먹었던 한약이 효과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몇 번 더 먹였으면 좋았을걸. 맛은 없어도 예전보다 잠은 잘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래도 너무 쓰다고 엄청 싫어했을 거야.
그날, 우리. 같이 웃었네. 서로를 끌어안고 거실을 빙글빙글 함께 돌면서.
그날도 난 널 보내기 싫어했는데…, 그날의 넌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데. 지금도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
가지 말지…, 가지 마라.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손 잡으면 난 또 그냥 그날처럼 웃어 줄텐데.
…, 그런 생각이 눈을 뜨자마자 승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나하고 옆을 봤지만, 빈자리만 있었다. 긴 한숨을 쉬려는데,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마음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윽’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혹시라도 또 자신이 모르는 사이 사라질까 봐, 급히 문을 열고 주방 쪽으로 가보니 뭔가를 식탁 위에 차리고 있는 정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깼어?”
“응….”
“이것만 차려주고 가려고 했는데, 시끄러웠나 보네.”
“…, 가?”
되묻는 승철의 질문에 정한의 손이 잠시 ‘멈칫’ 했지만,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볼 뿐이다. 그에 비해 승철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얼굴이다.
“정한아….”
“일어났으면 일단 먹자.”
“…, 같이 먹어.”
“그래. 알았어.”
급한 일정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프로필 사진 변경이 있어서 촬영이 잡혀있었지만,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해서 다음으로 미루었다. 결국, ‘조금만 더 있다가, 잠들 때까지만 있다가 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자신에게 여전히 내미는 그 진심이 너무 무거워서, 대답이랍시고 회피하듯 가볍게 맞닿은 입술은 예상보다 너무 그리웠던 순간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순간이 여러 해 동안 함께 했던 감정들을 다시 헤집어 놓더니, 보기 좋게 울리기까지 했다.
드문드문 열에 들떠서 말을 이어가던 승철이 까무룩 다시 잠에 들었을 때, 정한은 어떻게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보다 시작했던 감정의 시작은 기억도 안 날 만큼 까마득한데, 그 보다 더 까마득한 건 앞으로 남은 날들에 이 순간들이 영원히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해, 다시. 우리 사랑….
드문드문 들렸던 승철의 그 말 끝에, 영원은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시작은 있지 않을까.
정한은 염치도 없는 자신의 마음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보다 남은 날들에 있을 ‘승철의 부재’ 그리고 ‘계속 반복될 과거의 순간’들이 그려져 염치없는 자신의 마음을 접어 저 멀리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 이별을 시작한 건 자신이었으니 이별을 끝내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자신이 내던져둔 사랑에 대한 책임.
“사과할게.”
“…….”
“내 멋대로 헤어지자고, 그만두자고 한 거.”
밥알을 세고 있던 승철을 향해 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꾹꾹 눌러 담은 마음처럼 좀처럼 다시 퍼 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제든 와.”
“어?”
“당장은 아니라도. 언제든. 네가 편할 때.”
“…….”
“난 계속 있을 테니까.”
“…….”
“여기 ‘우리 집’에.”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자신보다 더 무언가를 많이 눌러 담은 마음으로 하는 말일 것이 분명했다. 정한은 순간 이상하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메어왔다.
넌 늘 이런 식이었다.
제가 겨우 하나를 내어주면, 승철은 열을 주고도 모자란 듯 아쉬워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정한은 승철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하면 기억했지만, 승철은 정한이 ‘맛있겠다.’라고 지나가듯 던진 말을 더 잘 기억했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네 생각이 났다.’는 말을 더 좋아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고 서운해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면 당연한 듯 저를 먼저 안아 주었다.
“네가 온다고… 만, 하면.”
“…….”
“돌아온다고만 해 주면…, 난 괜찮아.”
“…….”
“네가 할아버지가 돼서 오더라도, 난 여기 있을 테니까.”
“…….”
“넌 다시 해. 난 어차피….”
“…….”
“지금도, 앞으로도. 나한테 너는 늘 같을 테니까.”
네가 없어, 우리가 없어. 그런 말들이나 내뱉었는데. 여전히, 승철은 ‘우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은 ‘가지 말라’는 말보다 더 정한을 꼭 붙잡았다.
그래도,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못된 마음 따위는 정리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고, 염치도 없는 자신을 충분히 적당히 반성할 여유도 필요했다.
정한이 차려둔 걸 먹은 후 승철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떼서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면 결국 다시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들 것 같은 자신 때문에. ‘약 챙겨 먹어.’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현관문 소리가 나더니 다시 정적.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그저 방문만 닫은 채 그 앞에 주저앉아있던 승철은 긴 한숨을 두어 번 내 쉬었다.
기어이 다시 가버렸다. 그래도 몇 달 동안 제대로 실감하지 못해서 못 다했던 말을 이번에는 끝까지 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붙잡지도 못했던 시간이 후회가 되었는데, 이제 그 시간마저 채웠다. 아니다. 충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정한의 다리라도 붙잡고 끝까지 매달렸어야 했을까.
조금 후 나와 본 거실은 다시 누가 다녀간 흔적도 없어 꿈인가 싶었다. 식탁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둔 약봉지, 걸어둔 고무장갑에서 ‘똑똑’ 거리면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누군가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누군가가 조금 전 사라진 현관문을 멍하게 바라보던 승철은 천천히 그 앞으로 가서 서 있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잠시 안도했다.
상표가 민트 색으로 두드러진 운동화 하나. 자신의 운동화는 같은 모델의 갈색 운동화였다. 예전에 가까운 산이나 한강으로 산책을 가거나 근교로 드라이브를 갈 때 늘 둘이 함께 챙겨 신었던 운동화였다.
‘운동화 가지러 왔다가. 너 아픈 것 같아서.’
현관에 내 둔 정한의 그 운동화가 그대로 있었다. 분명히 가지러 왔던 운동화가, 마치 마지막으로 챙겨가려 했던 정한의 마음 같아서 승철은 그 존재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떠나지 않은 ‘우리’라는 마음 한 조각이 현관 앞에 그대로 있었다.
돌아온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은 두고 간 그 마음 한 조각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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