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ppleLee Jun 11. 2021

그대 뒤에서,
그렇게, 묵묵히 있을 수 있기를...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그녀가 말을 시작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오른쪽 머리가 아니 정확히 두개골이 콕콕 찌르듯이 아파온다. 편두통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아, 처음부터였다. 

그녀를 만났던 처음부터 나는 만만치 않은 내담자를 만났구나 싶었다. 

내가 하는 무슨 이야기든 부정적으로 바꿔버리는 전무후무한 마술적 능력과 감각을 겸비한 그녀.

힘이 빠지고 맥이 빠지고 기운이 쪽쪽 빠지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 사랑하기 정말 힘들다...

그만 왔으면 좋겠다. 



상담을 하면서 마음을 주기 힘든 내담자를 만나고 마주 대하는 일은 생각보다 빈번하다. 그래도 그들의 언어와 몸짓 속에 아주 자그마한 희망과도 같은 가능성을 보며 마음을 다잡다 보면 어느새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전공 용어로 라포 형성이라고 한다. 보통 내담자들과는 일고여덟 번의 만남을 갖고 나면 라포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와는 도통 라포 형성이 쉽지 않다. 오히려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더욱 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 때마다 온갖 부정적 얘기를 전쟁터에 쉬지 않고 쏟아내는 포탄들처럼 쏘아대니 오죽하겠는가. 온갖 역전이와 투사적 동일시를 일으키며 나에게 자기애적 손상을 입히는 그녀를 마주한 지 3개월을 넘어가고 있던 때였다. 


상담 전부터 마음 상태를 준비시킨다. 포탄을 맞아야 하니 방탄복을 입는 것이다. 그녀가 쏟아내는 부정적 기운 속 그래도 살아내고자 하는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한 의지를 발견하고 일깨울 수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아니나 다를까 또 시작이다. 세상 모두 잘난 사람들뿐이고 보통이고 평범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자신은 세상 바보이고 모지리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고요하게 듣고만 있는다. 이내 말이 멈춘다. 힐끔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선생님은 저의 무단결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상에, 그녀가 질문을 한다. 어떻게 답해야 할까, 저 질문을 왜 하는 걸까 온갖 생각들이 마음속을 표류한다. 전에 순수하게 답을 했다가 그녀의 낚시질(?)에 걸려 말씨름을 한 적이 있어 더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제일 좋은 것은 정공법이다. 



'듣고 싶은 대답이 있나요?'



'아뇨. 그냥 선생님의 답이 듣고 싶어요.'



늘 저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놓고 내가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정해버렸고 내 원래 뜻을 왜곡시켜버렸다. 그녀 마음의 병증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다시 한번 내 마음속 떠도는 생각을 말로 정직하게 담아낸다. 



'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뭐 중요한가요.. 00 씨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냥 보통 사람들은 그걸 나쁘게 생각하잖아요.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실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



항상 타인의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그녀였다. 나는 그 지점이 그녀 아픔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제 생각에는 00 씨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무엇을 하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00 씨가 그것을 원했느냐 그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무단결근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00 씨가 원한 거 같던데.. 그렇지 않나요?'



'네. 제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학교가 싫어도 계속 갔었죠. 하지만 그날만큼은 출근을 할 수 없었어요. 모든 게 엉망이었고,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혀서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만약 그때 출근을 했다면 숨이 막혀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요.'



'살려고 한 거였네요.'



'네...'




'오기 전에 몸에 열이 나고 더웠어요. 답답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상담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몸이 덥지 않아요. 편안해진 거 같아요. 모두가 다 저에게 무단결근했다고 욕하고 난리였는데, 선생님하고 얘기하고 나니까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감사해요.'




거의 처음 듣는 그녀의 긍정적 반응이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 표현한 내 반응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일상 속 어느 한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다던, 긴장을 긴장으로 덮기 위해 공포영화를 보며 과각성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만 살아낼 수 있다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내게 편안함을 이야기하며 상담실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10년을 공부했고, 10년을 몸담았고, 8년 동안 수련과 분석때마다 받았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내담자를 믿고 따라가라. 앞서 가지 말라. 사진 찍듯 증상을 관찰하고 되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내담자는 나아질 수 있다. 그들은 상담실 문을 연 그 순간부터 그들 스스로 나아질 방법을 갖고 치료사를 찾아온다. 그러니, 뭔가 하려 하지 말라. 그저 그들이 하는 대로 뒤 따라가라.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