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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Oct 11. 2022

내게도 황금빛 해바라기를 보여줘


Dear. 마담 베흐



너무도 영롱해서 가까이할 수 없는 당신에게 편지를 써 본다. 내게는 가끔 꺼내 보는 자산들이 있다. 종이 위에서 연필이 헛돌기만 할 땐 더더욱 자주 꺼내 보곤 한다. 혹시 뭐라도 글감이 될 만한 재료가 있을까 해서 말이야. 26,928장. 지금 내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의 장수. 오래된 사진들 대부분은 클라우드에 옮겨 놓았고, 한 달 전 23,912장에서 금세 이만큼이 되었네. 한 장당 가격을 매긴다면 내 자산은 얼마인 걸까. 화면 상단을 한 번 탭 하여 오래된 순으로 사진들을 천천히 내려보는 거야. 근데 그거 알까? 해가 더해 질수록 사진 한 장의 가치도 지난해보다 더 높아진다는 걸. 과거의 순간들을 이렇게 톺아볼 때마다, 언젠가 또다시 값진 순간들이 찾아올까 싶어서 더 오래 살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하지.


9년 전, 첫 유럽 배낭여행의 순간들. 어쩌면 그때 가득 부풀어 오른 심장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몇 달 전, 그때 갔던 피렌체를 다시 갈 수 있었어.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 그때 사진을 찍었던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각도로 사진을 찍었어. 그리고 9년이라는 시간의 틈을 두고 가장 설레었던 순간과 가장 벅차오르는 순간을 나란히 보았지.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생각을 근래 들어 처음으로 한 것 같다.


두 손가락으로 사진첩 화면을 늘렸다가 줄였다가를 반복해 본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가 없어 사라져버린 순간들이 사진과 사진 사이 까만 틈에 공기 분자로 존재하고 있을까. 어쩌면 진짜 나의 자산들은 이 틈바구니에 껴 있을지도 몰라. 아무리 최대로 늘려 보아도 까만 틈은 더 벌어지지도, 더 채워지지도 않는다. 열심히 살다가도 공허함에 취해 마음을 가누지 못할 땐, '채우지 못한 삶의 유격이 너무 많아서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The Absinthe Drinker’, Viktor Oliva, 1901
Madame Verte: 초록빛 부인(여성에 대한 경칭). 불어에서 압생트는 여성 명사이며, 당시 그림에서 초록색 여성의 환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당신에게 편지를 핑계 삼아 푸념을 놓는 이유는, 내 사진첩에 저장된 사진을 보고 당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011년 5월 14일.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이날 저장했던 모양이야. 가끔 꺼내 보는 나의 자산 같은 영화지. 주인공 ‘길’이 자신이 가장 동경하던 황금시대 파리의 밤 골목을 걷고 있어. 여인 ‘아드리아나’와 나란히. 그리고 그때 알았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에드가 드가,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황금시대의 예술가들이 중독적으로 사랑했다는 초록빛 여인. 당신의 이름, ‘Absinthe(압생트)’.


사실 나는 당신을 잘 모른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자 몰락이었던 당신. 오스카 와일드는 당신을 만나고 바닥에서 튤립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고, 랭보는 당신이 가져다주는 취기가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말했지. 그리고, 반 고흐는 황홀하게 빛나는 황금빛 해바라기를 보기 위해 당신에게 지독하리만큼 집착했어. 고독하고 옹색했던 그의 삶에서 당신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만약 그때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빈곤한 예술을 유미하고 있을지 도 모른다.


사람들은 당신을 즐기기 위해 쓰디쓴 초록빛 원액에 각설탕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달콤 쌉싸래한 균형감을 찾는다. 아무리 희석을 한다고 해도, 위스키 한두 모금에 온 혈관이 확장되는 나는 평생 당신을 느껴볼 수 없을 테야. 당신을 대체할 수 있는 촉매제가 있다면 알려 주겠나. 아, 물론 탐닉에 빠지고 싶지는 않아. 그저 내가 머무르고 있는 시간이 오래토록 빛나는 자산이 되길 바라건만, 지금은 어쩐지 그 빛이 희미하거든. 과거에도 미래에도 아닌, 오직 지금 내 눈앞에만 존재하는 황금빛 해바라기를 보고 싶은데. 부디.



Sincerely, 오에리



'Still Life with Absinthe', Vincent van Gogh,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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