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근원적인 싫증이 나면, 모든 사람과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를 꿈꾸곤 한다. 마치 항상 비슷한 거리를 유지하며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지구와 달 같은 관계. 타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골치 아플 필요 없이 모든 인간사를 쉽게 쉽게 만들어 주는 쉬운 답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사람이란 본래 외롭고 항상 곁이 필요한 존재이기에, 하루하루 살다 보면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기 마련이고 그렇게 의도치 않은 관계들이 생겨난다. 나는 네 얼굴을 안다 수준의 아는 사람, 즉 지인으로 시작해 함께한 시간과 경험을 곁들이면 우리는 슬슬 친구라는 거창한 칭호를 그에게 부여한다. 그 너머 아주 약간의 우연들과 호감이 덧붙여진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수준에 이윽고 다다르게 되고, 우리 사회는 이 관계를 보통 연인이라 명명한다.
관계가 형성되고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는 각각의 관계에 따른 묵시적인 R&R을 부여받는다. 지인, 친구, 연인의 단계에 따라 맡은 역할이 다르고, 그 역할에 맞지 않는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혼란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친구가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생일 0시 정각에 맞춰 전화해 노래를 불러준다면 그 저의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생일날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기프티콘만 하나 보내온다면 우리는 그것 나름대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게 훤하다.
모든 관계는 쌍방과실에 가깝기에 부여받은 R&R 만큼이나 서로에게 새 기대를 품기 마련이다. 무용한 타인이 내 사람이 되면 과거엔 기대하지 않았을 다양한 바람들을 꿈꾼다. 말하기 힘든 비밀을 공유해주길, 내가 울 때 함께 울어주길, 내가 노할 때 함께 욕해주길.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서로의 희망 사항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는 것은 판타지에 가까운 일이고, 그렇게 저기 마음 한편 표현 못 할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가곤 한다. 시나브로 쌓인 아쉬움 들은 어느샌가 서운함이라는 감정으로 변모하는데, 이즈음이면 서로에 대한 기대는 어느새 서로에 대한 의무로 바뀌어져 있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그 의무에 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실망은 더더욱 커지고, 아쉬움은 서운함을 넘어 분노의 단계까지 다다르기도 한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저 아는 사람이었다면 기대조차 하지 않을 것들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마침내 분노하게 되는 그 사실이. 심지어 종종 우리는 더 가까웠기에 더 큰 서운함과 분노를 느끼고 그 화를 이기지 못해 결국 서로를 밀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밀쳐진 관계는 되려 지인보다도 못한 관계로 추락하기도 하는데, 이쯤 되면 이러려고 그 긴 시간을 들여 친해졌던 건가 하는 회의가 일기도 한다. 되려 그간 함께한 시간이 없었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것을.
그렇다고 해서 그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 누군가를 멀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모두 적든 많든 항상 내 사람이 필요하고, 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모두에게 완전한 타인이 될 뿐이다. 어찌 보면 산다는 게 가까워지면 한없이 뜨겁고 멀어지면 한없이 차가워지는 화롯가 주위를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방황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쯤 끝없는 배회를 멈춰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