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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스타 May 10. 2024

나의 야근메이트가 되어준

소리들

"오늘은 뭐해요?" 

"야근해요."

© mitchel3uo, 출처 Unsplash


소개팅을 하기로 한 방송국 엔지니어라는 남자. 그를 만나기 전 일주일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아니, 나 매일 야근을 하고 있었다고? 그가 묻지 않았다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회사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회사와 별개라며 자기 세뇌를 해야 살 것 같았으니까.



회사생활 10년간 야근은 내게 필수였다. 처음엔 내가 모자라서 그런 거라며 자기 비하를 하다가, 나중에는 회사를 저주했고, 후에는 그래도 한다면 혼자 야근하길 바랐다.  그나마 혼자 하면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입사초에는 지금의 에어팟, 버즈 같은 무선 이어폰이 출시되기도 전이어서 그런지 여럿이 야근하는데 귀에 기다란 줄을 달고 혼자만의 세계로 가는 것은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그 뒤로 더 과중한 업무를 맡게 된 나는 주로 혼자 야근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빈지노의 아쿠아맨, 로꼬의 감아를 야근하며 처음 접했다. 당시 한창 인기 있던 노골적인 가사의 힙합곡들을 들으며 요즘 애들(?)은 이런 걸 듣는구나 하며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어장 속 물고기가 된 남자의 입장인 아쿠아맨에서는 '너의 얼굴과 몸이 영원할까'라는 가사에 구질구질하고 섬뜩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돌려 들었고, 로꼬의 감아를 들으며 지친 회사원에게는 없는 가상 남자친구의 위로를 받았다.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투개월의 브라운 시티를 들으면서 네모난 건물 속 네모난 모니터 화면만 들여다보며 밤을 지새우는 도시인의 쓸쓸함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옥같은 노래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효의 민들레, 과나의 사람이 되기 싫은 곰 같은 노래는 들으면 감성이 너무 촉촉해져 한곡만 딱 듣고 끊어야 될 정도였다. 


연차가 쌓이고 나의 야근도 무르익어 나중에는 이미 스토리를 다 아는 옛날 시트콤들을 재생시켜 놓으며 어둡고 빈 사무실 구석구석을 방청객들의 가짜 웃음소리로 채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켜놓고 들었다. 질문자의 질문들은 어쩜 그리 내 맘 같은지,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겹겹이 퇴적된 인생의 불안과 고민을 스님의 조각칼 한 번만 스쳐가면  쩍-하고 깨지며 나의 답답함이 갈라져 떨어졌다. 부끄럽지만 한 번씩 오열하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었구만.


긴 야근에 10년의 회사생활 대부분을 '나는 솔로'로 지냈지만 짝이 생겼을 때는 남자친구의 수다를 들으며 야근을 하기도 했다. 모니터에 집중하느라 내가 대화에 집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야 남자친구가 좋아했지만 나중엔 전화 끊고 일이나 하라며 불만이었다. 그렇게 쉽게 될 일이었음 내가 왜 이러고 있겠니.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대학교 1학년, 근처에 있는 명문대 남학생과 술자리를 하는 중이었다. 뭐 썸이니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순수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상대가 대학생이기만 하면  누구 하고나 아무 얘기를 신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가 나왔는데 남자는 진지하게 턱을 괴며 "내 차악은 재즈야."라고 말했다. "차악?" 여고에서는 대부분 아이돌 중 하나에 미쳐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락, 힙합 등 좋아하는 음악을 생명줄로 여기던 10대의 후반을 지나온 터였다. 우리들은 끝없이 노래를 듣고 외웠고 가사 한마디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갓 스무 살이 된 풋내기 남자아이의 입에서 음악 중 차악이라는 소리가 나오니 기가 막혔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는 내가 '차악'의 뜻을 이해 못 한 줄로 알고 손을 휘저으며 더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최악이 있고, 차악이 있는데 나는 음악이 대부분 최악이고…." 라며 서울 남자의 다정하고 샐쭉하며 조금 재수 없는 말투로. 


그게 아니고,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그 후 차악은 재즈라는 말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런 사람도 있구나, 에서 이제는 나도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 levimeirclancy, 출처 Unsplash


처음 나와 소개팅을 했던 방송국 엔지니어는 내가 그렇게 야근을 하는데도 '힘들겠어요.' 한 마디가 없었다. 처음 본 남자에게 위로를 바라던 사회초년생인 나는 결국 그를 칼같이 잘라냈다. 나는 당시 누군가에게 달콤한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가 좋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공허한 밤을 누군가의 '소리'로 채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던 나는 지금 쓴소리를 누구보다 열심히 해주는 남편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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