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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r 19. 2024

엄마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어느 수요일 오전 진료가 끝난 오후의 일이다. 그날은 왕진도 없고 막내 학교에서 교사 연수가 있어 학교도 하루 쉬는 날이었다.

주말도 아닌데 평일 오후에 주말 같은 분위기가 되어 가족끼리 뭘 하며 보내나 내심 설레었다.

날씨가 푸근해지고 있으니 식구들 봄 옷도 필요하고 시내에 나가 볼까? 얼마 전에 막내가 킹크랩이 먹고 싶다 했으니 함께 대형 마트를 가볼까? 아님 정원에 심을 꽃 둘러보러 꽃상가를 갈까? 그도 아니면 오랜만에 온천 수영장을 갈까?

어쩌다 맞이하는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가족들과 어떻게 보내면 재밌게 보냈다 소문이 날려나? 해가며 나름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눔의 아빠와 아들이 도무지 협조를 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남편은 너튜브로 매일 그게 그것 같은 들으면 화딱지만 나는 정치판 이야기를 듣느라 넋이 빠졌고..

사춘기의 시크한 막내는 엄마 아빠와 좀처럼 어딜 가고 싶어 하지를 않는다.

그게 당연한 것이기는 한데.. 그럼에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두 아이는 각기 다른 곳에 있어 한동안 얼굴도 못 보았고 집에 달랑 하나 남은 막내는 친구들 약속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오분 만에 뛰어 나갈 판인데 엄마가 어딜 가자면 조금 있다가... 나 씻어야 돼... 이것만 하고... 저것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이라 모르겠다 느그들이 그리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혼자 어디던 간다

하고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데 어라? 막내는 핸드폰 들고 침대에 자빠져서 지네 엄마가 나가든 말든 쳐다도 안 보고..

건조대에 널어둔 지가 좋아라 하는 바지가 아직 안 말랐네 어쨌네 불평이나 하고 있고.남편은 마누라가 츄니닝 벗어던지고 안 하던 화장까지 쳐발 쳐발 하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건만 어디 가냐 묻지도 않는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나 혼자 어디를 가지? 하며 의기충천하던 것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갱년기 아줌마 쫀심이 있지 기왕 나갈 채비를 했는데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하다 못해 동네 한 바퀴 돌고 커피라도 한잔 사 들고 오지 뭐 하며

일단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렇게 씩씩 거리며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시내로 가는 전차 정류장 앞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 아비와 아들은 집에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밖에 나갔는지.. 어쨌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전화 한 통 없었다.

텅 빈 통화 목록을 보며 갑자기 깊은 빡침이 일면서 ‘그래 나도 혼자서 잘 놀아 이거 왜 이래!’

하는 마음으로 때마침 들어오는 3번 전차를 날름 집어 탔다.


그런데..

막상 전차를 타고 보니 갈 때가 없었다.

약속을 하고 나온 게 아니라 만날 사람도 딱히 없고..

독일에서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 가능한 날 시간 약속을 하고 만나야지 갑자기 불현듯 네 생각이 나더라 나와라 언니가 커피 한잔 쏜다 이런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전 국민이 바쁘게 사는 한국도 매한가지이겠지만 말이다.


또.. 무작정 어딘가를 가려니 갈 곳도 마땅치가 않은 거다.

시내에서 볼일을 보러 다닐 때는 은행, 관공서, 백화점 할 것 없이 시간을 쪼개어 다닐 때가 많은데..

자유로운 영혼으로 그냥 무작정 나와 봤어 하고 나오니 딱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 옷이나 사러 갈까? 하다가 사실 늘어난 옷사이즈로 계속 사다 놔봐야 나중에 살 빠지면 또 못 입게 될 텐데..

그냥 살 빼서 예전 것 입는 게 돈 버는 거다 싶고.. 물론 그 생각으로 살 빠짐없이 몇 년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럼 일단 영화나 보러 가자 하고 평일 오후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영화관으로 갔다.

요즘 무슨 영화가 상영되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가면 볼거이 있겠지.. 하고 말이다.

연극이나 음악회 오페라 등은 주로 저녁 시간에 공연이 있고 이것도 미리 티켓 예매를 해야 한다.

그에 비해 영화관은 인터넷…넷플릭스 등의 활발함으로 전석 매진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

뭐가 되었던 그중에 내가 볼 것 하나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물론 맞아떨어지는 시간대 찾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다.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 영화관에 상영 시간이 다양하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안되면 영화관 안에서 기다리며 팝콘이나 먹지 뭐 하는 생각으로 영화관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원래 독일은 아침 일찍 상영하는 영화 조조할인 이런 것도 없는 동네다.

아침 시간에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관마다 그리고 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평일 에는 오후 2시가 넘어가야 영화상영 을 시작 한다.

방학 때나 주말에는 애들 만화 영화가 1시 30분쯤 상영하는 곳도 더러 있지만

학기 중에 평일에는 찾기 어렵다.


다행히 두시가 넘어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 어중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2시 45분에 상영할 영화들이 제법 눈이 띄었다.

"인터넷으로 티겟 구매 하셨나요?"라고 친절히 묻는 직원에게 나는

상냥하게 "아니요 2시 45분  4시 45분 상영하는 영화 중에 상영 시간 가장 긴 걸로 주세요!" 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주문이라 픽 하고 웃음이 터졌다.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에 등장하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속버스 터미널 창구에서 "여기서 제일 먼 곳으로 한 장 주세요!" 하던 장면 말이다.  


나는 "갑자기 영화를 보러 오게 돼서 그래요!"라고 덧붙였고 친절한 직원은 아~라며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리고는 "그럼 이것 어떠세요!"  라며 2시 45분에 상영하는 Dune 2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직원에게 재미있나요?라고 물었고 직원은 영화 러닝타임 이 2시간 40분이라고 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영화 티켓을 받아 들고는 사뿐히 팝콘을 사러 갔다.


평일 오후라 텅 비어 있다시피 한 영화관 안 스낵코너에서 줄도 서지 않고 바로 팝콘과 맥주를 받았다.

영화 보며 혼자 팝콘 먹기에는 왠지 콜라 보다 맥주가 폼나 보였기 때문이다

팝콘과 맥주를 손에 나눠 들고 10번 상영관으로 갔다.

어두침침한 상영관 안에서는 예의 그 광고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맨 뒷줄에 대학생 들로 보이는 젊은이 몇과 초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 데리고 온 가족이 한 팀 있었다


계단마다 조그맣게 켜져 있는 작은 불과 이런저런 광고를 하느라 번쩍 대는 스크린을 의지해서 자리를 찾았다.

내 자리는 E 번 줄 7번째.., 스크린 정가운데 있는 자리였고 그 줄도 그리고 앞줄 뒷줄 할 것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이쯤 되면 뭐 상영관 하나 통째로 쓰는 거나 다를 바 없지 않나

제벌이 뭐 별 건가..내가 비운건 아니다만

자발적으로 비워져 사방 그 어디에도 근처에 사람이 없으니 그 큰 상영관에 나 혼자 차지한 기분이 들었다


제벌이 등장하는 미니시리즈 에는 영화관 하나 비워서 남녀 주인공 둘이

서로 신경 쓰느라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팝콘 통에서 팝콘 꺼내다 손이 스치고

콜라 들다 어깨 살짝 스쳐서 서로 멜로 눈깔로 보라는 스크린은 안 보고 마주 보는

장면 단골로 나오지 않나..


나는 짧은 다리를 있는 힘껏 길게 펴고 자빠지듯 앉아 병째 받은 맥주 들고

홀짝이며 팝콘을 씹어 먹었다

낮부터 우아하게 맥주 병나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기다리던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그만 좌불안석이 되어 버렸다

무슨 장르 인지 묻지도 않고 시간 길다는 말에 덥석 끊고 들어 왔는데 이거이 스타워즈 같은 미래 우주 판타지 SF였던 것이었다

내가 제일 재미없어하고 취약한 장르다. 로맨스, 코미디, 액션 르와르, 추리 스릴러, 히어로, 좀비 오컬트 공포까지 피를 보던 무섭던 오글 거리던 소름 끼치던 모든 장르를 다 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SF는 아니다.

게다가 2다 첫 번째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뜩이나 난감하고 난해한데 앞편을 못 보았으니 뭔 내용인지 통 알 길이 없었다


커다란 화면을 뚫어져라 보며 "워매 이게 뭐여?” 소리가 절로 났다. 이걸  2시간 40분 봐야 하는구나 싶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아무리 귀엽게 생긴 티모시 샬라메가 나온다 해도 내 취향이 아닌 장르의 영화를 보고 있자니 환장하겠는 거다.그것도 꼽빼기로..


독일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거의 모든 영화를 독일어로 더빙을 한다. 심한 경우는 뮤지컬 또는 디즈니 영화 안에 삽입되는 노래도 독일말로 더빙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영화는 독일어 더빙에 외계인어 더빙도 들어 있었다.

아~! 된쟝~! 뭐라 뭐라 씨부려 쌌는말 밑에 독일어 자막이 주르륵 달리는데 그걸 계속 읽으려니 눈알이 빠지게 생긴 거다.

아~내 돈 16유로! (2D 영화티켓 값이 한화로 약 2만 3천 원 한다.)


게다가 10유로 주고 산 팝콘에 맥주가 아까워 남김없이 먹고 마신 덕분에 빈틈없이

빵빵해진 배와 그 포만감을 얹은 2시간 40분을 버텨야 하는 나의 안타까운 방광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정말이지 으스스한 오컬트를 볼 때 보다 손에 땀이 쥐어졌고 오글 거리는 로맨스 영화 볼때 보다 손가락과 다리가 꼬여 왔다.

2시간 40분이 이렇게 긴 줄 처음 알았다.

길고 긴 영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깐따라 삐야 염병하네 외계어는 계속 쏟아졌으며..

자꾸만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누구 하나 묻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기다리고 기다리던 엔딩 크레딧이 내려왔고

나는 바람 같이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내 생애 가장 길게 본 영화였다. 실제 러닝 타임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아 그때의 그 해방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어쨌거나 기분 전환은 확실하게 되었다. 비록 혼자 삐지고 혼자 섭섭해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 거지만

가끔 엄마도 이렇게 혼자 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홀로 영화 감상도 괜찮은 것 같다.

단 앞으로는 장르는 꼭 확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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