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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화가 났었는데 웃음이 터졌다

by 김중희

몇 초 상간에 전차를 놓쳤다.

눈앞에서 집으로 가는 전차가 사라져 가는 것을 허망한 눈빛으로 쫓았다.

짐을 들고뛰었건만 간발의 차이로 차를 놓쳐버렸다

독일 전차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문이 열리도록 누르는 버튼이 달려 있다.

전차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나면 내릴 사람들도 타려고 기다리던 사람들도 모두 그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버튼은 기사 아저씨가 출발하려고 문을 닫는 순간 아무리 눌러봐야 꿈쩍도 안 한다.

그 문은 기사 아저씨 또는 기사 아주머니 가열이 줘야 열리기 때문이다.


전차가 아무리 출발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해도..

아무리 숨을 헐떡이며 뛰어온 사람이 문을 애타게 두드린다 해도 코앞에서

냉정하게 문을 닫아 버리고 차 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기다리다 포기하고

옆으로 물러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갈길을 가련다 하고 쌩 하니 내 빼 버리는 야박한 전차 기사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의 장애자와 노약자를 위한 선진국 적인 것으로 한국에서도

자주 소개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대중교통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전차나 버스를 기다리면 그를 태워 주기 위해 전차나 버스 기사들이 직접 내려서 올라갈 수 있는 보행 보조 판을 하나하나 펴서 깔아 준다

그리고 그 판을 밟고 안전하게 타는 것을 확인하고 출발한다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리든 말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생각이 가끔 든다.

사회 전반에 깔린 시스템이 선진국 적인 것은 맞는데...

법 적으로 매뉴얼 대로 그렇게 해야 돼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지

그게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고 배려가 깊고 인정이 넘쳐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 말이다.


뛰었던 탓에 숨을 헐떡이며 에이씨 욕지기가 저절로 뱉어진다.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찻길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전차 정류장마다 설치되어 있는 전광판을 눈으로 훑는다.

판 위에는 그 정류장을 통과하는 전차들의 번호와 도착 시간들이

시시각각 바뀌면 반짝이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 동네로 가는 전차는 1번 다음 차는 14분 후에 도착 예정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바로 앞에서 차를 놓치고 짐보따리를 들고 14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약이 바짝 올랐다.

그것들 들고 여기저기 구경 다닐 때는 몇십 분이 흘러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젠장이네 와 기사 아저씨 욜라 못됐어 뛰어온 사람을 보고도 어떻게 그냥 가냐!"

어라? 누구지? 누가 내 맘의 소리를 들었나? 싶었다.

한치에 오차도 없이 좀 전에 내 생각을 그대로 읊어 줬기 때문이다.

순간 나의 떴나 감았나 분간도 잘 가지 않는 눈이 두 배는 커졌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옆쪽에는..

내가 짐보따리와 체중을 들고 쿵쿵 대며 욜라리 뛰어 와서 차를 놓친 생생한 현장을

라이브로 목격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 두 명이 주먹을 불끈 지고 서있었다.



나는 그 말 내게 하는 거냐는 뜻의 네?를 했고 자매인지 친구인지 알 수 없으나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다르게 생긴 두 처자들이

초롱 초롱한 눈으로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중 키가 조금 더 크고 회색의 점퍼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내게 말했다.

"아니 전차 출발도 안 했고 타려고 버튼 눌렀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고요

사람이 뻔히 보였을 텐데 말이죠!"

평소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독일에서도 유난한 사람들은 더러 있다.

우리로 하면 부녀 회장 또는 동네 반장 아줌마 스타일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남의 일에 관심 많고 사회적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보이던 그녀들이 딱 그랬다.

이번엔 그녀 중에 조금 더 키가 작고 머리가 긴 여성이 지나가는 전차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차라리 저 차를 타고 그다음 정류장에 먼저 가서 기다려요 그리고 보란 듯이 그 차로 갈아타고 가세요!"


자기 일도 아닌데 대신 분통을 터뜨리며 이야기해 주는 그녀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에

"그거 정말 굿아이디어인데요!" 라며 엄지 척을 했고 푸푸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가리킨 차는 우리 동네와 옆동네까지 연결된 특행 전차다.

그걸 타면 정류장마다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 상으로는 아까 내가 놓쳤던 차를 앞질러 갈 수가 있다

그러니 한참 앞선 정거장에 먼저 가서 기다렸다 복수 라도 하듯 아까 놓친

그 차를 타라는 이야기였다.

웃음과 하품은 전염성이 강하다고 했던가?...

우리는 생각할수록 기발한 그녀의 아이디어에 누구랄 것 없이 함께 푸하하 박장대소했다.

키 크고 마른 편의 중년 아줌마 한 명과 보통키의 몸매가 다부진 아줌마 한 명 그리고

지구는 둥그니까를 몸소 보여 주고 있는 짧은 아줌마 한 명..

비주얼도 각각이고 얼핏 보아서는 어느 것 하나도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지만

멀리서 보면...

우린 마치 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고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 듯 길에 서서 화기애애 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사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머리 위로는 어느새 짙은 회색의 먹구름이 한정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거 이러다 곧 비오겠는데... 싶도록 말이다.

아까였다면 일기예보 에는 비 올 확률이 낮았는데..로 시작 해서

전차 기사 아저씨 겁나 야박하네 어차피 바로 출발할 것도 아니면서

짐 들고 도착한 사람 차 문도 안 열어 주고....

아까 키오스크 아주머니가 버스표 빨리 계산해 줬으면 그 차 탔겠네.

(* 여기서 키오스크 란 주문하는 키오스크 아니고요 ㅎㅎ 신문, 전차 버스표, 사탕, 껌, 담배 등을 파는 작은 상점을 말합니다. 우리도 예전 편의점 없던 시절 버스정류장 앞에서 공중전화 카드, 음료수, 껌, 복권, 버스회수권, 신문, 잡지 팔던 작은 상점과 비슷해요)

등등 짜증 메들리를 한바탕 했을 텐데...

괜스레 웃음이 비죽 비죽 새어 나왔다.


이름도 모르는 그녀들이 모르는 낯선 사람인 내 상황에 함께 공감해 주고 시원스레 욕도 해 주고 대신 복수의 칼날을 갈며 상상의 나래를 펴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상황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짜증스럽던 마음이 바뀌었다


덕분에 때문에 로 점철 되었을 자리에 까짓 거를 넣게 되었고..

까짓 거 10여분 더 기다리지 뭐

까짓 거 비 오면 대충 맞지 뭐.. 까짓 거...

까짓 거로 바꾸다 보니 맘속에 평온이 깃든다.

모두 이름도 모르는 그녀들 덕분이다.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만일


남의 일에 애써 함께 화내주고 대책?을 세워 주려 했던 고마운 참견쟁이 그녀들 말이다.

누군가 그랬다.

우산을 내밀어 주는 것보다 더한 위로는 비를 같이 맞아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 서로 에게 작게 고개 끄덕여 주는 것만큼

큰 것은 없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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