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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비 Oct 19. 2024

앙티브 세계 재즈 페스티벌과 툴루즈의 박사님

결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




사람마다 타고나길 유독 민감한 감각이 있다는데 나에게는 청각이 그러하다.


나는 어떤 장면을 본 기억은 금방 잊고 만다. 잠시 본 누군가의 얼굴을 쉽게 못 외우는 탓에 길거리에서 얼핏 아는 것 같은 얼굴을 만나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고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릴 적에는 이별 후 일 년 동안이나 힘들어할 만큼 그토록 좋아했던 첫사랑이 얼굴만은 금방 바래져서 자꾸만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봐야 했다.



그런데 나는 누가 나에게 말한 말이나, 함께 나눈 대화는 잘 잊혀지지 않는다. 어떨 때는 한 마디의 말이 마음 속에 오래오래 남아서 계속해서 그 말과 그 사람이 하나의 인상으로 남는다. 어릴 적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할 정도로 외국어를 좋아했던 것도, 국어 시간에 대사 읽기를 즐겼던 것도 내가 청각형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렇다.



후각과 미각이 발달한 사람과 바닷가를 걸을 때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서 짠 맛이 느껴진다고 했다.

‘엥? 냄새인데 짠 맛이 느껴져?’

‘응, 마치 지금 짠 음식을 먹는 것 같아.’



말과 글 뿐만 아니라 청각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하나 더 있다. 바로 음악이다.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내가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이 좋았다. 나는 초등학교 이전 유아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잊어 버렸는데, 티비 광고에서 피아노 연주를 멋지게 치는 연주자와 흘러나오는 그 음악에 완전히 압도된 기억은 난다.



“나 피아노 배우고 싶어. 나중에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라고 엄마에게 선언했을 때는 다섯살 즈음 이었다.

피아노를 치기에는 아직 손이 작다고 해 일이년 후에 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산에서 나를 잠시 키워주신 외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음악가가 될래요’ 노래를 맨날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피아니스트를, 스무살 무렵까지는 가수를 하고 싶어했으니 나는 음악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아니지, 사실 지금도 음악에 빠져있다.


음악에는 미묘한 정서가 담겨있는 데 나는 그것도 잘 알아내는 편이다.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이루마의 피아노 곡인데 이상하게 여성스럽지, 싶었는데 여성이 연주했던 거다. 대학 가요제를 보면 누가 우승할 지도 맞힐 수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티비를 같이 보던 가족이 물어본다. 그러면 대답한다. 딱 들어보면 알잖아, 훨씬 잘하는 걸.


10대 때는 팝과 뮤지컬만 알았고, 20대 초반에는 인디음악을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 여러 음악을 접하면서 점점 음악에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현재 내가 가장 즐겨듣는 음악 장르는 두 가지다. 힙합과 재즈.



둘은 상반된 느낌이 있다. 그런데 사실 공통점도 많다. 둘 다 미국에서 탄생한 현대의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흑인들의 주도하에 발달한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자유롭다는 것.


힙합이 내 자유와 신념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에너지를 랩 가사와 비트로 표현한다.

재즈는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변주해 자유로운 즉흥연주로 표현한다. 음악적 변주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자유다. 그리고 참, 섹시하다는 거?
 

사실 재즈 Jazz 라는 단어는 처음에 우리나라의 속된말 야스와 비스무리하게 성적 활동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재즈 연주는 늘어지고- 어딘가 풀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살짝의 비틀어짐, 너무 반듯하지 않음이 재즈의 매력이다.



힙합 음악은 훅도 많고 따라하기에 쉽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다른 대중음악처럼 길이도 3분 내외로 적당하다. 한편, 재즈는 쉽지 않다. 꽤나 어려운 음악이다. 일단 러닝타임이 5분 이상으로 긴 경우도 꽤 된다. 클래식처럼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지 않을 때도 있으면서 팝처럼 따라가기도 어렵다. 음악 자체가 조금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점이 바로 재즈의 매력이다. 나를 적당히 느슨하게 할 정도로 편안하지만 감정을 자극할 정도로는 비뚤어져 있으면서, 섬세하고 어려우며 깊다. 그래서 재즈는 마치 와인처럼 깊게 알아가는 매력이 있다.



나는 처음에 듀크 엘링턴, 빌 에반스와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를 듣는 것으로 시작해 쳇 베이커, 엘라 피츠제럴드와 같은 재즈 보컬리스트들을 거쳐 키스 자렛과 브레드 멜다우와 같은 현재 음악과 가까운 재즈 음악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왜 소수의 취향일까.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빈티지 옷들을 구경하며 즐거워했다. 십년 전만해도 한국에서 재즈는 소수의 취향이어서 몇 안되는 재즈바를 찾으러 다녔다. 유럽에 와보니 빈티지 옷이나 재즈바는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꽤나 메이저 문화다.



나는 매 년 앙티브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에 가보기로 했다. 정확한 페스티벌 이름은 주앙래팽 재즈 페스티벌. 이 재즈 축제는 1960년에 시작해 벌써 60년이 넘은 역사가 깊은 축제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글로벌 재즈 페스티벌이다. 그동안 마일스 데이비스(트럼펫 연주자)를 비롯해 엘라 피츠제럴드(보컬리스트), 존 콜트레인(색소폰 연주자)과 같은 아티스트들이 연주한 곳이다. 매년 7월에 앙티브의 주앙래팽 바다 바로 앞에 설치된 공연장에서 전 세계의 재즈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들을 수 있다.





———


마르세유에서 앙티브로



마르세유에서 앙티브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밥을 해먹으며 외식비를 줄여봐도, 호기롭게 기차로 인근 다른 도시들을 자주 여행다니며 풍족한 문화생활을 즐기던 이 여행자는 현실의 심각성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행 3주가 채 되지 않아 통장 잔고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숙소비도 만만치 않다. 저녁이 되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호기심있게 탐색할 열정이 없어진 이십대 후반부터는 도저히 게스트하우스는 못쓰겠더라. ‘아휴 밤에는 푹 쉬자’는 지론과 주변 환경에 민감한 성격이 더해져 방은 꼭 개인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세 달 여행의 기간이 줄어들게 생겼다. 머리 속에서 빨간 알람이 울렸다. 공연 관람비도 들텐데. 유럽 여행은 처음인 주제에 숙소는 2주치 밖에 끊지 않은 자가 페스티벌이 한창인 기간에 앙티브에 간다는 것은 숙소의 선택 여지가 적다는 뜻을 의미한다는 걸 그제서 인지했다. 그리하야 5일 간의 앙티브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로 정해졌다.


거기다가 또 경비를 줄이고자 기차 대신 버스를 타봤다. 마르세유에서 앙티브까지. 여기는 블라블라카와 플릭스 버스 두 개의 저가형 버스가 도시를 오간다. 버스는 가끔씩 찌는 여름에도 제로 에어컨을 제공하며, 종종 번화가가 아닌 역과 꽤나 떨어진 길거리에 내려 준다는 사실을 꽤나 진득하게 몸으로 체험했다.

캐리어와 가방을 이끌고 찌는 더위에 버스에서 내렸을 때 나는 번화가와 먼 윗동네에 있었다. 구글맵이 가리키는 것과 달리 존재하지 않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는 생존의 열정으로 프랑스 어머님에게  숙소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물어봤다. 어머님께서는 열심히 버스를 찾아 따라오라고 말씀해주셨다. 안타깝게도 내 미비한 프랑스어 지식은 세월에 따라 희미해졌기에 스마트폰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대화를 나눴다. 번역기 너 참 좋더라…



같은 버스에서 내려 같은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던 길고 큰 배낭을 맨 아일랜드 여자애는 도와준 나나 프랑스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말하지도 않고 먼저 여기에 내리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님께 연신 메흑씨 Merci (감사합니다) 를 외치며 감사하지만 여기서 내려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장장 15분을 넘게 걸었다. 그리고 둘 다 같은 여자 5인실에 배정되었다. 다른 서양 친구들에게는 말도 잘 걸더니 나를 보면 입술을 다물던 그 여자애는 이튿날 바에 갔다가 핸드폰 도난을 당했다. 혼자 장기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조금 안타까웠지만 솔직한 마음은 꼬수웠다.


다행히도 그 친구를 빼고 다른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은 열려있었다. 나는 거기서 스웨덴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인 친구를 사귀어 같이 피카소 미술관에 가고, 독일과 싱가포르 여자애와 같이 칸에 놀러도 갔다. 공용 테이블에서 자꾸 마주치던 칠레인 과학 선생님에게서는 ‘피카플로르’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새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요리의 번잡함을 줄이기 위해 파스타와 샐러드를 대량 생산해두는 법도.



앙티브의 항구 풍경
주앙래팽의 길



우리나라는 외국에 나가도 여행자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대형 온라인 카페가 있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갈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여행할 사람을 구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앙티브에서 따로 동행을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여기서 최고로 안맞는 동행을 만나거든.




———


그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인으로 툴루즈에 잠시 파견 연구 학생으로 왔다고 한다. 니스 공항으로 도착한다고 했는데, 여행일정이 일박 이일 정도로 빠듯했다. 내 숙소가 앙티브라는 것을 듣고는 본인도 니스 말고 그냥 앙티브쪽으로 잡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주로 니스를 찾지 앙티브는 잘 모르고, 그곳의 재즈 공연에 참여하자는 제안에 반응한다는 것은 더욱이 드문 일이었다. 그는 앙티브 재즈 공연을 같이 보러가자는 나의 게시글을 읽고 연락을 해 온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좁디 좁았다. 나는 쾌적한 한국의 게스트하우스만 접해보다가 세면대가 반쪽만해 손을 씻어도 바닥 타일에 물이 떨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다섯 개의 베드에 침대폭도 안되어 보이는 좁은 통로, 가장자리에 미국 고등학교 사물함 같이 긴 철제 서랍장이 끝인 곳이었다. 이것이 내가 유럽에서 처음 접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여기 꽤 만족해! 라고 말하는 독일 친구 말을 듣고 유럽은 원래 이렇게 열악한가 오해할 뻔했다. 나중에 온 다른 친구가 그렇지 않다며 여기는 너무 좁고 불편하다고 말을 꺼냈다. 그리곤 자신이 겪은 최악의 게스트하우스는 로마에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오래되었는데 한 번도 고치지 않아 보였다고 했다.


‘역시 로마라 보존을 잘 하나보다~’

그녀는 나의 시니컬한 농담이 맘에 들었는지 깔깔 웃었다.


‘너 내일 뭐 해?’

그녀가 나와 놀고 싶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내일이 공연날이라 나는 동행이 있다고 얘기해야만 했다.



첫 날에 기침을 쿨럭쿨럭 대면서 커튼도 치지 않고 본인 침대등에 불을 켜두고 나간 한 방친구는 다음날 일어나보니 비어있던 내 윗자리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이튿날부터 열이 오르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다음날에는 숙소 밖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로 어지러웠고 콧물이 나왔다.

이틀 뒤에는 동행과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나를 따라 숙소도 앙티브에 잡은 사람이 있으니 마음에 책임감이 느껴졌다. 쉬이 취소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하루는 카드로 온라인 결제가 계속 안되는 사이트 때문에 주앙래팽에 직접 가서 알아보러 가고, 전날은 온전히 쉬었다.



메인 축제는 바다 앞 뻥 뚫린 야외 공간에서 이루어져서 사실 티켓을 끊지 않아도 그 앞에 있는 삐네드 공원에 앉아 음감회를 할 수 있다. 삐네드 공원에서는 저녁 무렵 무료 공연도 열린다. 티켓을 알아볼 겸 공연시간 즈음 그곳을 찾아가 공연을 들었다. 유명하지는 않아도 훌륭한 재즈 밴드의 공연이었다. 한 시간이 흘렀을 때, 따가운 태양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삐네드 공원 앞 무료 야외 공연
Ville D'antibes 앙티브 마을이 새겨져 있는 귀여운 좌석들




‘어디세요?’

찌는 더위에 전시관을 들어갔다, 감기 때문에 코를 풀며 밖으로 다시 나가기를 반복하기를 벌써 한 시간 째다. 삐네드 공원 건너편에 있는 전시관에서는 재즈의 역사에 대한 소개판넬이 전시되어 있었고 공연 굿즈를 판매하고 있었다. 티켓을 사면 본 공연 전 타이밍에 전시관에서 하는 무료 공연을 볼 수 있는데 곧 온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다 입장시간이 지나가버렸다. 공원으로 넘어가 저녁 먹을 장소를 찾고, 한시간 반 정도를 기다린 후에야 그는 진짜로 다 왔다.


‘그 전 공연 하나 더 볼 수 있었는데 놓쳤네요.

아 앙티브로 오는 버스를 타셨다는 말이었구나. 저는 거의 다 오신 줄 알고, 제가 착각했나봐요.’


‘성격이 진짜 좋으신 것 같아요.’


그는 그 날 이 말을 몇 번을 반복해 얘기했다.

나는 왠지 그 말이 모범생처럼 생겼다는 칭찬을 듣는 것처럼 은근히 캥겼다.


‘뭐 사회생활하면 다 이 정도는 하지 않나요?’


어제 사 둔 티켓은 공중 분해 되고. 프랑스의 짧은 여행을 앙티브가 되게 했다는 책임감에 몸을 이끌고 나왔는데. 이렇게 한 시간 반을 날렸다는 사실에 마음은 끓었지만 차분히 얘기해야지 뭐 어쩌겠나.



감기에는 뜨거운 국물요리지. 공원 코앞의 베트남 쌀국수집에 들어가 똠얌 쌀국수를 앞에 두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그가 공부를 하고 있는 툴루즈는 항공과학이 발달한 도시다. 그는 졸업 후 미국에서 석사를 공부하고 우리나라에서 항공과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지도 교수님의 프로젝트 중 하나가 툴루즈 대학의 교수님과 이루어져서 연구차 보내졌다고 한다. 여행은 커녕 밤낮을 거의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럼 졸업하면 어디로 가는 거에요?’

‘삼성 가려고요. 취업 되는대로 가야죠.’

‘삼성이 항공우주 관련 산업을 했었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 항공우주쪽도 과학이라 꼭 항공쪽을 하지는 않아도 되요.’


우리나라에서 전공 따라가는 사람은 없다지만 박사까지 밟을 정도로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그 분야로 나아가지 않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깝기도 하고. 특정 업무 분야도 아니고 그냥 삼성이라니.



저녁을 먹은 뒤 티켓을 끊고 공연에 들어갔다. 공연 라인업은 아디 오아시스와 핑크 마티니.


‘아티스트 잘 모르시죠? 저도 그런데, 핑크 마티니는 노래 들으시면 바로 아실걸요?

주 느 브 빠 트라~바이예’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프랑스 어머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노래를 같이 따라불렀다. 눈을 마주친 어머님과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역시 노래로 하나되는 군~



‘저는 처음 듣는 노래네요.’


Aㅏ…

이 유명한 노래를 모르다니. 한 살 차이라고 했는데?



오늘의 공연이 시작되고 여성 보컬리스트 아디 오아시스가 나왔다. 그녀는 가죽바지에 긴 드레드 머리를 하고 일렉 기타를 메고 있었다. 베이스, 드럼, 피아노 그리고 기타를 든 보컬리스트가 멋지게 내뱉는 고음 소리가 어우러져 주앙래팽 바다를 가득 채웠다.

축제에 런닝 차림을 하고 마치 앞집을 편안하게 나온듯한 드러머도 인상적이었다. 노래는 소울풀한 알앤비 느낌의 현대적인 곡들이었다. 아디가 카리스마 있는 노래를 내뱉을 때, 바다 앞의 노을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와 잘 모르고 왔는데 기대 이상이네요. 엄청 좋아요.’


1부가 막을 내리고 쉬는 시간이 왔다. 우리는 축제 부스로 나갔다. 부스에는 음료와 간단한 음식 등을 팔고 있었다.


‘맥주가 당기는데…돈을 많이 안가져와서 그냥 놔두죠 뭐.’

‘하나 드세요. 제가 한 잔 사드릴게요.’


나는 물을 가져와서 괜찮았는데 음료를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잔 사겠다고 했더니 그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다. 카드로 살까 하다가 현금만 가능한 곳이어서 결국 내가 코카콜라를 샀다. 축제 값으로 3유로, 한 4500원이다. 몇 유로 안하는거 괜찮은데. 그것도 축제까지 와서.


폐를 끼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삼성 들어가면 뷔페 한 번 쏘세요.’


농담삼아 한 말에 툴루즈 박사님의 얼굴이 살짝 파래졌다.

부담감을 낮춰주려고 한두마디 덧붙였지만, 아무래도 그러다 파란 얼굴로 응급실에 실려갈 것만 같다.


결국 다음날 꼭 음료를 사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무튼 콜라 한 잔의 소중함을 맛 본 그는 은혜 갚는 까치처럼 친절해졌다. 내 앞의 키 큰 아저씨에 앞이 잘 안 보여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자리를 바꾸어줬다. 이 분이 가사를 보겠다고 계속 핸드폰을 사용해서 공연이 잘 집중이 안되던 것도 감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부는 핑크 마티니의 차례였다. 공연이 시작되고서야 알았는데 핑크 마티니는 유명 곡들이 정말 많은 미국의 아티스트다. 아까 부른 노래 외에도 헤이 유진!이라는 곡과 익숙한 후크의 곡들이 많았다.

아름다운 드레스의 가수와 빅밴드가 나와 웅장하고 풍성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마지막 인사를 올리며 올해가 그들의 데뷔 30주년임을 알렸다. 시상식을 연상케하는 우아하고 흥겨운 노래를 마쳤을 때는 마음이 아주 충만해졌다.



핑크 마티니
성공적이었던 주앙래팽 재즈 페스티벌



앙코르까지 마친 공연은 박수 소리, 휘파람 소리로 가득 찼다. 재즈 축제는 대성공이었다. 몇 마디를 나눈 프랑스 어머님은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떴고, 우리는 음악의 감동에 압도되었다. 너무 좋았다는 말을 얘기를 반복해 했다. 시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느낀 바였다. 너무 좋았다…




깜깜해진 주앙래팽을 지나 앙티브 시내로 걸어갔다. 앙티브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니 어선잡이 배들이 빛을 내며 바닷가에 떠 있다. 그는 여기서 풍겨오는 코를 은근히 찌르는 냄새가 대마냄새라고 알려주었다. 그 냄새는 구릿하고 쌔해서 내가 앞으로 대마에 관심을 둘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숙소 근처 골목길에서 헤어지고 다음날 보기로 했다. 다음날 몸도 안좋고 거의 12시가 되어 들어온 탓에 솔직히 좀 자고 싶었지만 일어났다. 월드컵 송화봉송을 수집한 전시관을 우연히 발견해 들어가고, 커피를 마시고, 피카소 미술관 앞을 걷다가 조각별로 파는 피자를 골라서 앙티브 바다 앞 게이트에 있는 길다란 계단식 장소에 앉아 먹었다. 그게 마지막 코스였다.


그는 이 모든 여행안내가 고마웠는지 공부 얘기와 조언을 주구장창 해줬다. 피자를 먹으면서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서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떨어졌고 침묵도 편안하지 않았다. 인사하고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래도 음악의 감동을 감동은 공유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그 다음날 기차에 타서 마무리 인사와 함께 사진을 보냈다. 여행 계획을 짤 때는 금방 답이 오더니 한시간 동안 답이 없었다. 나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대화방을 나갔다.



그는 예의가 없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내내 나와는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농담은 엇나가고 배려의 핀트도 맞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한 번 만났던 동행과 잘 통해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 번 보기로 했다고 했다. 나도 직전의 J와 여행이 잘 맞아서 동행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는데 둘 다 이번에는 영 아닌 것 같다.




만약 내가 로마에 갔다던 여자애와 공연을 같이 갔다면 어땠을까?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만남을 즐기고 그냥 흐름에 맡겼으면?


어땠을까아 ~


(내면의 주크박스 그만 나와…)


더 재밌었을까?


모르겠다. 지금 드는 생각은

살다보면 그런 만남도 있는거지, 라는 결론이었다.



안 맞는 것도 겪어봐야 잘 맞을 때 그렇다는 걸 확실히 안다.

위기를 겪어봐야 평안한 일상의 행복을 아는 것처럼.

부족함을 느껴야 성장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기억나는 한 장면을 기록하고 오늘의 앙티브 여행기를 마치겠다.




.

.

.

.




'툴루즈도 한 번 놀러오세요. 여기도 좋아요.'

'오 어디 가보셨어요?'

'저도 아직 못 가봤어요.'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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